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동이 Jan 27. 2020

#7  입덧을 겪고 넷플릭스를 보고

임신 12W, 마인드 플레이어가 우리 집에



인디애나 주, 호킨스 마을.


숲과 호수로 둘러싸여 있는 평온한 마을에 이상한 현상이 발생한다. '뒤집힌 세계'로 일컫는 제3 공간에 인간 세계를 호시탐탐 노리는 '괴물'이 살고 있는데, 어쩌다 그 틈이 열리면서 평온한 호킨스 마을이 위험에 처한다. 뒤집힌 세계를 보는 윌 바이어스와 괴물을 물리치는 염력의 소유자 엘, 그리고 어떤 두려움에서도 당당하게 맞서 싸우는 어른 친구들이 마을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상대가 만만치 않다. 

때론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인간을 숙주로 포섭해 힘을 배가시키는 '괴물'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벽지를 뚫고 나오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서 군가 피를 흘리면 귀신 같이 냄새를 맡고 낚아  간다. 지하에  놓은 땅굴로 기밀하게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체육관과 대형 쇼핑몰에 등장해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드는데........



며칠 밤을 새워가며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리즈 3편(시즌 3개, 25편, 약 25시간)을 몰아봤다. 세계적인 인기가 증명하듯 촘촘한 줄거리에 감탄하고 어린 주인공들의 열연에 박수쳤다. 드라마가 아무리 재밌어도 하루에 딱 2편을 보는 것이 우리 집 국론인데, 아내가 종일 잠에 취해 있어 눈치 보지 않고 연속해서 재생 버튼을 눌렀다. 가끔은 세 시간 자고 출근하는 날이 있을 정도로, 한 주 동안 이놈의 연속극에 흠뻑 빠졌다. 



서울시 북가좌동 DMC역 근처. 


월드컵 공원과 불광천, 상트럴파크를 끼고 있는 보금자리에 '미식이'가 살고 있다. 임신한 여성의 몸을 숙주 삼아 잠복해 있는 이것은, 호킨스 마을을 들쑤셔 놓은 것처럼 상암동의 평온한 가정을 뒤집어 놓았다.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여성의 속을 윽- 하고 뒤집어 놓은 미식이의 사회적인 명칭은 입덧(이라고 쓰고 구토를 확인한다)이다. 이번에는 숙주가 '오빠 속이 미식거려-' 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얼떨결에 '미식이'로 불리게 되었다. 

이것은 괴물 치고는 다양한 페르소나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자아를 발현한다. 감기 바이러스처럼 잠복기 동안에 아무 증세가 없기도 하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8개월 이상 질질 끌기도 한다. 

증상의 세기도 다양하다. 사람을 용가리로 만들어 변기통을 부여잡고 울도록 자극하고, 온종일 뱃멀미를 한 듯 어지럽고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런 괴물이 미식이라는 탈을 쓰고 아내의 몸에 셋집살이를 시작하는데....




여기까지-


너무 몰입했다.

아내가 기묘한 이야기를 보지 않아 호킨스가 어디인지 괴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알면 글을 지워버리고 넷플릭스 앱을 삭제할 거다. 하지만 미드를 보면서 괴물의 습성과 입덧의 유사성이 자꾸 떠올랐다. 확인되지 않은 다른 세계에 서식하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그것. 사람을 괴롭히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입덧. 일레븐(밀리 바비 브라운 역)을 바라보는 호퍼나 빌리를 생각하는 맥스의 마음이 이랬을까, 하는 감정이입과 동시에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혼자 받고 있는 아내가 안쓰러웠다.



미식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예고 없이 찾아온다. 

느닷없이 깜짝 등장하는 게 정말 드라마 속 괴물과 비슷하다.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때와 장소를 가늠할 수 없다.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숨죽이고 있다가 불쑥 문을 두드린다.

 

꿉꿉- 히터, 수많은 사람이 끼여  버스는 미식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혹여나 베이비 드라이버(안셀 엘고트 ) 영화 주인공 같이 가속과 급정거를 즐겨하는 화끈한 기사님을 만난 날이면 미식이는 미쳐 날 뛰기 시작한다. 그 외에도 사무실, 화장실, 엘리베이터, 차 안, 음식점, 도서관 등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냄새와 특정 시간에 민감한 특징이 있다. 아직까지 어떤 향을 좋아하는지는 발견하지 못했으나, 일단 민감한 것은 확실하다. 조금이라도 냄새가 강하면 강한 거부감을 일으킨다. 그리고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 왜 나쁜 것은 꼭 밤에 일어날까. 어둠이 내리고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밤은 미식이가 기지개를 켜는 낮이다. 안 그래도 출퇴근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누워 잠들 때가 되면 활동을 시작하는 미식이를 맞이하느라 아내의 몸에서는 전투가 시작된다.


그때가 되면 아내는 그윽- 거리며 목 아래, 가슴 위, 명치를 세차게 두들긴다. 체기가 있거나 소화가 너무 잘 돼 트름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미식이가 부르는 신호일뿐. 잠깐 방심한 순간을 틈타 마치 용가리처럼 몸속 안에 음식물을 뿜어낸다. 먹은 게 뭐 있지 싶어 가까이 가면 희멀건 위액까지 게워낸다. 으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술을 자주 먹는 사람들 중 일부는 구토에 익숙할 수 있겠지만, 결혼 후 둘이 마신 술이 맥주 한 병이 되지 않는 우리에게 구토라는 행위는 몸서리칠 정도로 싫은 행동이다.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장면을 아내는 하루에 몇 번이고, 매일 밤 반복하고 있다. TV를 보다가도, 자려고 누워 있는 와중에도 밤이면 높아지는 호르몬과의 치열한 사투를 벌인다.


아쉽지만 구성원이 둘 뿐인 우리 가족 중에 미식이의 존재를 보거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아내뿐이다. 그것도 미식이가 찾아오기 바로 전, 찰나의 타이밍만 허락한다. 그분이 오시는 느낌이 들면 일레븐의 염력도,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특별함은 1도 없는 나는 분주해진다.


일단 속이 비어 있으면 안 된다. 몇 번 학습을 해보니 속이 비어 있을 때 대체적으로 헛구역질이 올라온단다. 어떤 책에서는 그 느낌을 만취 후 다음날 숙취가 풀리지 않은 채로 하루 종일 이어지는 그 기분이 계속 쭉- 연결되는 느낌이라던데.. 술알못이라 패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출, 퇴근 시 만약에 사태를 대비해 검은 봉지를 챙기고, 사탕이나 초콜릿, 마이쮸 같은 당분을 준비한다. 혹시 자리 선정에 실패해 히터 위에 서게 되는 경우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조심히 양보를 구하고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이미 지쳐 있는 아내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 목 끝까지 올라온 미식이를 조금이나마 억누른다.


평일 저녁과 주말에는 음식점 리스트를 최우선 순위로 챙겨야 한다. 미식이 때문에 바로바로 먹어야 하는 이유도 있지만, 이 시기에는 아무 음식이나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느낌적인 느낌이 오는 음식. 배가 살짝 고파올 때 적당한 거리에서 적당히 먹을 수 있는,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까지 챙길 수 있는, 그런 (정말 어려운) 음식점을 찾아야 한다. 며칠 이내에 먹었던 메뉴를 후보군에 올리는 건 성의가 없어 보이니, 후순위로 미루고 오늘의 날씨와 기분을 고려하여 당길만한 신선한 메뉴를 제안한다. 사실 동네에서 갈 수 있고 시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기서 거기겠지만, 하나씩 읊조리다 보면 얻어걸리는 게 분명 생긴다. 운이 좋으면 숨어 있는 동네 맛집도 발견하고 가끔은 제안한 음식이 간택되는(그만큼 거부를 많이 당해야 한다ㅜㅜ) 조그만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초긍정으로 무장했을 때 위 멘트가 나오는 것이지, 제안한 음식이 까이고 까이다 보면 실제로는 짜증이 솟구친다. 일단 예민해져 있는 아내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오기가 쉽지 않다. 몸이 힘든 데 말이 편할까. 서로 예민해져 가끔은 툭탁툭탁 티키타가를 주고 받지만, 이내 끙끙 앓는 아내를 마주하면 미운 마음이 싹 가라 앉는다. 편안하게 잠을 청하는 모습 만으로도 감사하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우리는 역동적인 부부다. 

그동안은 몰랐는데, 대부분의 신혼부부는 이렇게 놀러 다니는 줄 알았다. 주변 부부에게 들어보니, 의외로 집순이, 집돌이 부부가 많다. 둘 다 운동을 좋아해서 평일 저녁 퇴근 후에도 한강을 자주 뛰었고 주말이면 전시회나 핫플레이스를 꾸준히 찾아다녔다. 특히 컨셉이 깃든 공간에 대한 관심이 있어 이동이 잦았다.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한 달 가까이 집에만 있다 보니 좀이 너무 쑤셨다. 아내는 컨디션이 안 좋다 하지만, 혼자 남은 나는(아내한테는 미안하지만) 자연스럽게 이것저것을 시도했다. 가을에 꼭 뛰고 싶었던 하프 마라톤에 등록하고, 잠시 멈췄던 피아노 학원 재수강, 농구 동호회 가입, 회사 근처에서 가능한 독서 또는 영어 회화 모임에 참여해볼까 사부작 거렸다. 나름 회사 출근 전 시간과 점심시간, 그리고 주말 이른 아침에 소화할 수 있는 일들로 조심스럽게 진행했는데 웬걸, 딴 일을 꾸미는 걸 금세 알아차린 모양이다. 훅 치고 들어오며 쨍하게 하는 말.



. 오빠, 내가 지금까지 편하게 해 줬지? +-+

.. .....


조용히 농구화 검색을 멈추고 핸드폰을 충전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록. 책없남에서 책못남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