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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11. 2020

[한국 근대문학사상사](1984) - 김윤식

'카프'의 '볼셰비키화' 제창 전후의 계급문학 운동

'카프'의 '볼셰비키화' 제창 전후의 계급문학 운동
 


목    차
1. 서론
2. 본론
    가. 조직 및 출판활동
    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의
    다.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제창

3. 결론
 


1. 서론
 
1930년대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확산과 조선공산당 재건의 움직임에 궤를 같이하여 임화, 안막, 김남천 등의 동경 '무산자파'에 의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KAPF)의 강령으로서 '볼셰비키화'가 제창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게 1930년대에는 이른바 제 2차 방향전환으로서의 KAPF의 조직적 재편이 시도되었고, 이전부터도 조선인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층을 주로 다루는 농민문학에 대하여서도 볼셰비키 강령에 맞는 재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장파에 불과했던 동경 '무산자' 그룹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된 소위 1, 2차에 걸친 사상범 검거사건을 거치면서 계획과 시도의 수준에서 멈추었을 뿐, 조직내 구체적인 실천작업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급기야 이와같은 대대적 검거열풍과 볼셰비키화의 쇠퇴는 KAPF 조직 전반의 붕괴를 야기하게 되는데, 이런 조직적 위기 상황은 한편, 창작방법상으로는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에 관한 논의가 프로계열의 작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기 시작하였고 그 논쟁은 창작기법에 대한 논의의 진전을 보이게 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글은 KAPF의 볼셰비키화 제창 전후의 조직과 출판의 움직임, 농민문학을 둘러싼 논의, 그리고 '볼셰비키화'의 실천적 좌절 이후 제기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에 대한 고찰을 위주로 전개될 것이다.
 


2. 본론
 


가. 조직 및 출판활동

일본의 동경으로부터 신진세력이 몰려왔다. 이름하여 '무산자파'. 임화, 안막, 김남천 등을 중심으로 한 이 소장파 그룹은 당시까지 조직내에서 주도권을 잡고있던 박영희, 김기진 류의 舊KAPF계를 누르고 보다 실천적이자 투쟁 본위인 '볼셰비키'화를 제창하며 점차로 조직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기서 '무산자' 그룹은 동경의 '무산자社'를 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있던 부류를 말하는데, '무산자사'란 와해되어 있던 조선공산당 재건의 임무를 띄고 있던 고경흠, 황학로 등에 의해 1929년 5월에 조직된 것이었다. 그러한 임무를 위해 조직되었기에 '무산자사'는 당재건의 예술적, 정치적 임무를 띄고 [무산자], [무산자팜플렛] 등의 출판물을 간행하며 활동을 넓혀가고 있었으며, 결국 1927년에 세워졌던 KAPF 동경지부는 이 '무산자'를 중심으로 발전적 해체를 거행하면서 '무산자'내로 흡수되어 버린다. 이는 이미 국제프롤레타리아예술의 조직적 움직임을 비롯하여 일본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 NAPF)까지도 전격적 투쟁의 단계로서의 '예술의 볼셰비키화'라는 기치를 내걸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움직임은 재건의 임무를 맡은 조선공산당이 민족 단일당 노선으로서의 신간회로부터의 계급적으로 분리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적 연대를 표방한 '무산자'파에 의해 조선프로예술에도 본격적으로 '볼셰비키화'가 강령으로서 주장이 되게 되는데, 이를 전후한 조직, 출판적 상황을 연도별로 일괄해 보도록 한다.
 
1) 1928. 78. - '식민지 테제'


1928년 7월과 8월에 걸쳐 제 6차 코민테른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의 결과 소위 '식민지 테제'가 채택이 되었는데, 그 정식명칭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서의 혁명운동에 대하여'였다. 즉, 독점자본주의가 국가권력과 결탁을 한 국가독점자본주의 세력으로서의 제국주의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식민통치에 대항한 식민지, 반식민지적 민중의 투쟁을 고취시키는 결의문이었던 것이다. 이 중, '조선 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로 알려져 있는 '12월 테제'는 일제에 의한 몇 차례의 검거와 공작을 통해 와해상태에 있던 조선공산당의 재조직 방침을 담고 있다. 이 테제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는 완연한 자본주의적 지배라는 국제적 정세판단 하에 조선 노동자, 농민의 계급적 성숙을 고려하여 그들 계급의 선도적 지도에 의한 공산당의 재건을 결정하고 강조했던 것이었다. 이 결정은 그동안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오던 조선의 단일당 노선에서 노동계급의 전위인 공산당 주도로의 노선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2) 1930. 11. - '하르코프 대회'


1930년 11월에 소비에트 연방 하르코프시에서는 국제혁명작가동맹 제 2차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현존 자본주의 국가 중 일본에서 혁명문학운동이 가장 조직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는 평가 하에 다른 나라 프롤레타리아예술가의 표본으로서 선정이 되었으며 농민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농민문학에 대한 관심이 제기되어 NAPF내에 '농민문학연구회'라는 새로운 기관이 결성되는 결과를 낳았는데, 여러모로 이는 조선 프로예술의 이론적 경향이 일본의 그것을 추종할 수밖에 없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3) 1931. 전반기 - [군기] 사건


조선공산당 재건활동 중 예술적, 정치적 임무를 띈 임화, 안막, 김남천 등의 동경 '무산자' 그룹이 귀국하여 KAPF내의 중앙으로 진출을 하면서 점차로 볼셰비키화 강령의 제창을 시도했던 시기이다. 한편, 1929년 기관지 [예술운동]의 폐간 이후 내세울만한 기관지가 없던 KAPF는 개성지역의 양창준이 발행을 주관하고 있던 [음악과 시]라는 잡지를 보강하여 새로운 기관지를 발행하게 되는데, 이 기관지의 제호가 [군기]였다. 즉, 1931년 1월은 세칭 '반카프음모사건'이란 조직내부의 분열을 겪게 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KAPF의 기관지로 결정된 [군기]는 제 2호에서부터 박영희가 주도하고 있던 경성본부의 권위에 도전하여 조직의 전국적 재편을 주장하고 나섰다. 말하자면, 舊KAPF와 新KAPF내의 갈등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舊KAPF 계열인 경성은 이에 강하게 반발을 했고, 결국 그해 3월로 예정되었던 확대위원회가 결렬됨으로써, [군기] 계열인 新KAPF의 조직개편 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하지만 이러한 내분은 KAPF가 이미 본부와 지부 사이의 전반적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돌출적 사건이었으며, 중앙의 박영희는 [군기] 사건 이후로 조직적 영향력을 점차 잃고는 일선에서 후퇴하게 되었다. 임화를 비롯한 동경의 '무산자'파는 이러한 빈자리를 치고 올라오면서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무산자'파는 KAPF 조직내 '서기국'과 '기술부'의 신설을 계획하는데 특히 '기술부'의 조직은 KAPF가 문학인 위주가 아닌 전문예술인 조직으로의 개편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예운동에서 전문예술인 조직 개념이란, 결국 Leninism의 직업적 운동가 개념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신간회는 해방후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에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내게 되는 김병로 부류의 민족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의 재건운동을 계기로 계급운동가들이 해소를 주장하며 대거 이탈하게 됨으로써 신간회는 그해 5월로 해산을 결의하게 된다.


4) 1931. 후반기 - 제 1차 검거사건, 침체기


조선공산당 재건 사건과 관련하여 약 70여명 정도의 좌익계열 지식인들이 대거로 검거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박영희를 비롯한 11명의 KAPF 동맹원이 함께 검거되었는데, 이는 좌익 지식인이 주축을 이루었던 신간회의 해체와 관련하여, 그 사건과 조선공산당의 재건과의 관계, 그리고 조선공산당 재건과 KAPF와의 관계에 대해 일본 경찰이 주목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제 1차 검거사건 이후, 박영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KAPF 맹원들은 불기소로 풀려났지만, 조직의 활동은 크게 위축이 되고 말았으며, 舊KAPF계의 지도자 박영희는 조직의 중앙으로부터 거의 이탈을 하게 된다. '무산자'파이자 볼셰비키론자인 임화가 비로소 조직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 것이 바로 이 1차 검거사건 이후라 할 수 있다. 임화는 위축된 조직의 단결과 문학적 역량을 과시하기 위한 시도로서 김창술, 권환, 박세영, 안막 등과 함께 [카프시인집]이라는 사화집을 간행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별다른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볼셰비키화의 투쟁전술로서 계획했던 '전국적 문예(문화)동맹' 또한 실천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결국, 국제적 볼셰비즘이라는 1930년대 국제공산주의 운동 노선에 부합되는 강령을 내세웠다곤 하지만 국내 기반이 취약한 동경 '무산자'파로서는 조선공산당의 재건은커녕 프로문예조직의 재건마저도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국내 조직적 상황이 사향길에 접어든 그해 11월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전세계적 대결"로서 현실을 규정한 김두용, 이북만, 이찬 등이 동경에 '동지'사를 창설하고는 "이러한 보편적 대립은 문화, 예술 영역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보다 전투적 노선을 제창한다.


5) 1932. - 쇠퇴기


[군기] 사건 이후로 조직의 기관지였던 [집단]은 2호(1932년 3월호)마저도 일본 당국에 의해 압수됨으로써 발간되지 못하고, 조직은 [카프시인집]만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해 11월에 결성된 동경의 '동지'사는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국제적 연대성을 주장하며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이하 NOPF)'에로의 통합을 시도했고, "일본의 프롤레타리아와 조선의 프롤레타리아 공동의 적은 일본 제국주의"라고 선언하였다. 그해 2월, '동경'은 해체되고 NOPF내의 '조선협의회'로 재결합되었다. 그리하여 '조선협의회'는 일본의 NOPF와 조선의 KAPF 사이에 혁명적, 국제적 연대의 직접적 고리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무튼, 국내의 침체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나마 이런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그 이전까지 이식적이며, 상호분리되어 전개되던 프롤레타리아 문예활동이 이 시기에 조선, 일본 공동전선단계로 들어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도 할 수 있다. 12월에는 일선에 물러나 있던 박영희가 카프 탈퇴원을 본부 서기국에 제출한다.


6) 1934~1935. - 제 2차 검거사건과 조직의 해산


전반적인 침체일로를 걷고 있던 KAPF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劇團)활동은 꾸준히 전개하고 있었던 듯 하다. 즉, '신건설'이라는 극단을 통한 활동이었는데, 이른바 2차 검거는 '34년 5월경, 나웅, 이상춘, 장철기, 장병창 등 8명의 극단 신건설 단원을 검거하면서 시작되었고 이듬해 5월까지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약 30명 가량이 검거된 당시 조직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당시의 상황은 1차 검거사건에서 유일하게 실형을 선고받았던 김남천이 형기를 마친 상태였고, 김기진은 기소유예 판결을 받아 풀려나온 상태였으며, 임화는 전주법원으로 송국되는 과정에서 기상천외(奇想天外)한 졸도로 말미암아 재판을 면한 상태였다. 이에 일본 경찰은 요양중이던 임화를 찾아가 조직의 해산을 권고했고 조직 중앙의 남은 세 사람, 즉 임화, 김기진, 김남천등은 협의를 거쳤으며 1935년 5월, 결국 당시 KAPF의 서기장이었던 임화가 일본 경찰에 해산계를 제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조직은 해체된다.
 
 
나. 농민문학론을 둘러싼 논의
 
문학의 영역의 지도적 위치는 그의 온갖 물질적,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있어 노동계급에 속한다. 농민작가는 우정대우를 받으며, 우리의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야 된다. 우리의 과제는 그들의 성장하고 있는 일단을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궤도에 도입시키는데 있다.
- 1925년, 조선공산당의 '문학테제'.
 
1) 농민문학론의 대두


1930년 하르코프 대회를 계기로 하여 계급문학 운동에서 예술대중론이 하나의 중심과제로 제기되면서 새로운 관심사가 된 것이 농민문학론이다. 1920년대 이후 농민 생활의 궁핍화와 농촌 경제의 파탄이 사회적 관심사로 제기되고 있었던 점이라든지, 농민운동에 대한 일제 총독부의 탄압이 가중되면서 농민운동의 성격이 정치운동으로 변질되고 지하적색 농민단체가 출현하게 된 점 등도 모두 농민문학에 대한 관심의 확대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배경이라 할 것이다. 특히, 계급 문단의 예술대중화론에서 농민문학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한 점은 농민문학론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계급문학운동이 농민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을 고찰할 때 하르코프 대회를 필두로 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영향과 일본내 프로문예 운동의 흐름을 간과할 수는 없다. 즉, 전술하였듯이 그 전에 계급문학의 선도 역할을 하고 있던 일본에서 이미 농민 문학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구체화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계급문단에서는 위와같은 일본의 흐름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2) 농민 문학을 둘러싼 안함광과 백철의 논쟁


농민 문학론이 KAPF 진영의 중요 과제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1931년 8월 <조선일보>에 게재되었던 안함광의 [농민 문학에 대한 일고찰]이었고, 같은해 10월에 백철이 같은 신문에 [농민 문학 문제]라는 글을 기고함으로써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안함광과 백철이 각기 제기한 농민 문학론의 전개 과정과 그들 사이의 논쟁은 그 나름대로의 특색을 지닌 차별화된 입장들이었다.
우선, 안함광은 조선 사회의 현실 자체가 농민 문학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외면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농민 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그 범위와 주제, 그리고 그 방법 등의 개요를 제시하고 있는데, 농민 문학의 대상과 그 범위는 농민 전반을 포괄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자본가 계급과 결탁하여 빈농을 착취하는 토착 부르조아지를 배격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입장에서 농민 계층에 관심을 두는 농민 문학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같은 안함광의 농민 문학론은 농민 문학을 프로 문학의 발전 과정과 관련시켜 파악하고자 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은 농민 문학론의 쟁점으로 제기된 것인데, 농민 문학에 있어 노동자, 농민의 유기적 제휴, 그리고 이에 따른 빈농 계층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을 농민 문학의 중요한 기능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는 농민 문학을 노동 계급과 독립적인 형태로 생각할 경우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농촌 문학의 질적, 양적인 면에서의 강화를 가져오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안함광은 농민 문학을 주장하면서도 농민 문학이 농민의 문학이면서도 동시에 농민을 위한 문학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측면을 보이고 있다. 즉,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 주입에 급급함으로써 농민의 구체적인 문학 활동에의 참여 문제를 등한시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안함광의 주장은 곧바로 백철에 의해 반박을 당하게 된다.


"빈농계급의 자발성을 촉발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같이 혁명적이게끔 해야 한다."

- 백철, [농민문학문제].


백철의 농민 문학론은 농민의 계급적 위치와 그 특수성에 대한 인식의 문제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민이란 토지 소유의 봉건적 관습으로 인해 아무런 혁명적 역할을 담당할 수 없다고 전제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농민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한 지도 아래서만 그 계급적 역할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 안에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 존재로서 농민 계층은 근본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동일한 조건 하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궁극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의 혁명적 동맹 아래 동일한 궤도를 밟는 역사적 필연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생활 기반에서 생각할 때에 거기에는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토지 소유와 연관된 여러 가지 특수한 조건들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 문학에서 그 운동의 전위에 서서 헤게모니를 쥐고 나아갈 것도 도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이며 농민은 그 영토 하에서 동맹군의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전제인 것이다. 백철은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농민 문학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한 분야가 아니라 프로 문학과는 별개의 동맹문학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안함광이 말한 '빈농 계층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 이데올로기의 적극적 주입'을 기계주의적인 좌익 편향이 잠재해 있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그는 프롤레타리아 운동에 있어 빈농 계층에 대한 견해와 정책은 결국 빈농에게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를 기계적으로 주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구체적 실천 내용에 관철된 프롤레타리아트의 감화력에 의하여 빈농 계층에게 일정한 방향을 가르치며 행동을 제시함으로써 자발적으로 그 영향권 안에 들어오도록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덧붙여 백철은 농민 문학의 실천 방안으로서 우선 그 제재가 다양할 것, 구체성을 띨 것, 조선 농민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을 고려할 것 등을 내세웠으며, 또 표현 형식 문제에서도 직접적으로 농민 대중의 요구를 들으며 감정과 의식을 알아보는 데에서 더욱 절실한 방법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백철의 견해는 그 당시 문단에서 훨씬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농민 문학이란 개념 규정에 있어서, 안함광은 농민 문학론은 프로 문학의 일부로서의 농민 문학을 지칭하고 있는데 비해, 백철은 프로 문학과 구별된 독자적인 농민 문학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데 그 차별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논의는 구체적인 작품을 대상으로하여 전개되기 보다는 추상적인 논의 수준에서 이루어져 그 구체적 면모를 파악하기에 어려움이 많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논쟁은 농민 문학론이 비록 그 실제적인 작품의 성과에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농촌과 농민이 비로소 문학의 관심사로 부각되고, 농민이 주체적인 입장에서 문학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까지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제창
 
"실천은 (이론적) 인식보다 우위에 있는 것인바, 왜냐하면 실천이란 보편적이라고 하는 가치를 지닐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현실성이라고 하는 가치도 지니기 때문이다."
- V. I. Lenin, [철학노트], 1915.
 
1931년, 1차 검거사건을 겪은 후 KAPF는 급격하게 조직적 침체기를 맞게 되었다. 실천적, 정치투쟁적 장애에 직면한 조직은 그리하여 1932년 즈음에는 그러한 실천적 장애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문학적 실제 창작방법에 관한 논쟁이 활발히 진행된다.


1920년대 초, 신경향파 문학의 표현기법은 사실주의, 혹은 자연주의적 기법이었다. 그러나 KAPF 결성후, 1927년경에는 이른바, 1차 방향전환이 이루어짐으로써 특정 경향으로의 목적의식성을 문학과 결합시키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김기진 대 박영희의 유명한 내용/형식 논쟁 그리고 김기진의 '예술대중화' 논의가 있었으며 이후, 1930년대에 조직의 볼셰비키화가 제창되었을 시기에는 그러한 "김기진류의 '예술대중화', 혹은 사회민주주의적 '예술대중화'를 비판하고 공산주의 예술로서의 볼셰비키화"에 대한 주장으로서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이 제창되었다. 이러한 기법은 문학을 "당의 문학"으로, 문학창작방식을 "전위의 눈으로 세계를 보라"라는 식으로 규정하던 관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그 창작을 노동계급의 혁명전위로서의 당에 의한 정치적 선전선동의 도구로 정의내리고는 그 수단을 통해 전조선인민 대중화를 꾀하던 볼셰비키론자들의 시도는 효과적인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말았다. 이에 신유인은 당시의 문학적 실천은 "완전히 개념화하고, 예속화하고, 고정화하고, 그리고 발전의 질곡이 되고, 현실과의 심대한 이반에 의하여 '표면의 공허한 포말'로서 떠 있다"면서 그때까지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론'이 현실적 모습들을 고정화시키고 관념화시켰다고 비판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대두되는 창작방법이 바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이었던 것이다. 즉, 물질적인 조건을 일차적으로 하여 그것을 "물질의 최고산물인 두뇌"를 통해 반영, 이론적 종합의 과정을 거치고는 다시 물질적인 현실에서 실천적 검증을 하게 되는 일련의 절차를 인식의 과정으로 규정하는 유물변증법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방법이므로, 문학창작을 함에 있어서도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에 철저하게 입각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물변증법적 창작기법은 종래의 이론적, 관념적인 성격을 벗어나서 보다 구체적인 현실을 실천적으로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을 주창했던 볼셰비키론자 임화도 1932년에 들어서는 세계정세가 급변하고 있다고 분석한 후 KAPF도 이 새로운 단계에 조응하여 전환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즉, 공황이 나타나 제국주의의 일반적 위기인 제 3기에 처했다며 이에 대응하여 진정한 변증법적 방법을 가지고 서로 교차하는 복잡성과 다양성 속에서 움직이는 발전과정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여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내세우고 있다. 보편성과 특수성, 혹은 개별성의 변증법적 대립과 통일 또한 유물변증법의 주요 전제이기 때문이다. 결국, 유물변증법의 요지는 물질적이며 현실적인 구체성, 또는 특수성과, 철학적 양대 진영 중에서 진보적인 부분을 담보했던 유물론적 노선의 견지라는 보편성과의 변증법적 통일로 볼 수 있고,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요지는 각 시대적, 현실적인 것들과, 계급해방을 지향하는 혁명에의 견지와의 변증법적 결합의 과정에서 그려지는 작품창작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구체적 계급분석"이 우선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우리들의 창작행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 이 계급적 분석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현실의 한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온갖 예술작품들을 대할 때에 '계급사회의 예술은 언제나 계급적-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계급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작품은 언제나 정당한, 명확한 계급적 분석 위에서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제를 다시 우리들이 전면적으로 문제삼고 있는 유물변증법적 창작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할 때에는 정당한 창조적 방법에 의하여 명확한 프롤레타리아 작품이 제작된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적확한 '구체적 계급분석'을 통하여 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체적 계급 분석'이란, 우선적으로 계급구분의 형식논리를 극복하고 사회발전의 본질을 계급적으로 파악, 즉 프롤레타리아의 입장에서 다양한 사회변화와 사물의 모든 관계양상을 유물변증법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은 이전 볼셰비키론자들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과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창작기법은 아니다. 이 기법은 오히려 프로문인을 자처하는 작가들의 세계관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반성을 가능케 했으며, 단순한 도구로서만의 문학이 아닌 계급사회에서 그 나름대로 특수적 존재로서의 문학에 대한 고민의 폭도 넓혀줄 수 있었던 계기였다 할 수 있다.


이후, 1935년에서 36년 사이에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논쟁이 일어나는데, 이는 이러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조차 극복하려 했던 시도로서, 한효, 권환 등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찬성론자와, 김두용, 김남천, 백철 등의 반대론자들 간의 대립이었다. 즉, 당시 소비에트의 창작기법으로 제창되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도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논쟁이었던 바, 찬성론자는 국제적 공산주의운동의 한 맥으로서 그것의 도입을 주장, 반대론자는 조선사회의 특수성에 더욱 가치를 두며 기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고수를 주장했다. 이 시기, 우리는 대표적 반대론자였던 김두용의 글을 통해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의 한 특성을 살펴볼 수 있다.


"원래 유물변증법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적 방법인 이상,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은 곧 마르크스주의적 창작방법이며, 현실의 역사적 내용과 진실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원칙적 방법으로서 전혀 하자가 없다.
이는 과거 조선의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상 오류는 그 자체의 오류가 아니라 작가들의 실천적 오류였다는 주장으로서 그 창작기법에 대한 철저한 옹호를 확고히 하고 있다."

- 김두용.
 


3. 결론

이상으로 KAPF내 볼셰비키화 제창 전후, 즉 1928년경에서부터 조직의 해산기인 1935년까지의 조직과 출판에 관한 내용과 당시 프로문예 운동에서 농민문학에 관한 논의, 그리고 볼셰비키론의 창작방법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리얼리즘에 대한 대안으로서 도입, 제시된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에 관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조선프로문학, KAPF에 대한 평가는 일제 시대부터 해방공간까지 한반도의 근대화 역사 속에서 나타났던 좌익에 대한 평가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할 것이다. 즉, 극단적 환상(幻想)화, 아니면 극단적으로 폄하(貶下)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1930년대 KAPF내에서 제기되었던 볼셰비키화나 농민문학, 그 시기 창작방법에 관한 논쟁 등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에 있어서 당시 식민지 현실의 타파를 포함하여 전반적 사회변혁까지를 그려보았던 그들의 의의를 보다 역사적,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선 사회에서의 계급문학의 위치와 성격을 대략 여섯 가지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계급문학 운동의 대중적 조직확대를 기반으로 문학을 통한 집단적, 공동체적 현실인식과 대응의 가능성을 들 수 있고, 둘째, 이러한 적극적 대중화를 통한 노동자, 농민을 위한 문학의 태동과 그 사회적 실천 과정. 셋째, 과학적이고 적극적인 이론 투쟁을 통해 확보될 수 있었던 근대비평의 논리성. 넷째, 문학을 통한 현실인식과 실천. 다섯째, 노동자, 농민의 생활, 의식수준에 맞는 적합한 문학형식 개발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문예의 민중적 형식 창출. 마지막으로, 식민지 상황에서 적극적인 반제, 반봉건 투쟁을 통해 민족 주체성을 고취시켰고 이는 보다 넓은 의미의 저항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점 등으로 톺아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문학적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동시대의 국민문학파, 민족문학류의 문인들보다는 KAPF 문인들의 활약 이후에 보다 과학적이고 적극적인 문학비평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노동자, 농민 등의 대다수 피지배 민중의 삶을 문학의 차원에서 주체화시켰다는 사실은 우리 문학사에서의 크나큰 발전을 뜻하는 부분인 것이다. 물론,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의 이와같은 계급 문학 운동과 그것의 역사적 의의는 이런 정도에서 그치지는 않을 것이며, 후대 사람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비판을 필요로 하는 것임에는 결코 재론의 여지가 없다.
 
 
* 참고문헌
1. [한국 근대문학 사상사], 김윤식, <한길사>, 1984.
2. [한국문학통사] 제 5권, 조동일, <지식산업사>, 1988.
3. [한국 근·현대문학사], 윤병로, <명문당>, 1991.
4. [일본프로문학과 한국문학], 임규찬, <연구사>, 1990.
5. [한국계급문학 운동사], 권영민, <문예출판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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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V. I. Lenin, 1905, 이채욱譯, <돌베개>, 1993.
8. [철학노트], V. I. Lenin, 1914, 홍영두譯, <논장>, 1989.
9. [제국주의-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V. I. Lenin, 1916, 박상철譯,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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