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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Nov 29. 2020

[한국 고대사 신론](2017) - 윤내현

고조선 역사에서 '기자'와 '위만'의 정체

고조선 역사에서 '기자'와 '위만'의 정체
-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서기전 195년엔 위만이 연나라로부터 난하를 건너 기자국으로 망명해 왔는데 자부의 아들인 자준(준왕)은 그를 신임하고 난하 유역에 거주하게 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서 중국의 망명자를 규합한 위만이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했다. 정권을 탈취당한 자준은 소수의 궁인을 이끌고 오늘날 발해로 도망했다. 그 후 자준은 정치세력을 형성하지도 못했고 그의 후손도 전멸했는데 기자신을 제사지내는 것만이 오늘날 난하 유역에 민속신앙으로서 고구려시대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지배계층에서는 이것을 사악한 신을 제사지내는 것으로 취급했다.
결국 기자국은 중국의 변방에 있었던 소국이었으며 그 말기인 자부 때에 고조선의 변방으로 쫓겨왔다가 오래지 않아 망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도 없으며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혀 부당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 점은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의 경우에도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 윤내현, [한국 고대사 신론], <4. 기자신고>, 2017.


고조선의 영토를 가장 넓게 본 이론으로서 1962년 북한의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를 읽은 것은, 현재 '대동강 인류 문명설' 같은 주체사상 어용 역사학 따위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북조선에는 그래도 아직 인류 역사를 '과학'적이며 유물론'적으로 보려했던 역동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고고학자를 중심으로 한 '낙랑군=평양설'과 문헌사학자를 중심으로 한 '고조선=요동설'이 대립했던 1961년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에 종지부를 찍은 리지린의 북경대 박사학위 논문 [고조선 연구]는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중국 북경 인근 난하 지역까지 최대로 넓혀 놓았고, 고조선 사회구성체를 '계급투쟁'을 동력으로 하는 '역사단계설'에 따라 '고대노예제'로부터 '(아시아적)봉건제'로의 '과학'적 이행으로 분석했다.

물론, 우리 남한의 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고조선 연구]에 관해서도 들어보았으나 나는 '실증주의' 경향이 강한 우리 강단 사학계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그러던 중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에 관한 내 서평에 대하여 어느 분의 의견이 있었다. 리지린은 "성급한 발표로 인해 논리가 꼬이고 억측이 많다"며 "식민사관 지리에 토대를 두었지만 일관적 논리를 구사한" 윤내현의 연구가 오히려 낫다는 의견이었다.

그래서 단국대 사학과 교수 윤내현 선생(1933~)의 이론을 알기 위해 [고조선 연구], [한국 열국사 연구]에 이어 우리 고대사를 정리한 '3부작' 중 마지막 저서인 [한국 고대사 신론](2017)을 펼쳤다.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고조선 사회 성격'을 비롯한 총 6편의 글로 이루어진 논문집인데,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윤내현 교수가 1983년에 이미 발표한 '기자조선'에 관한 '새로운 고찰'인 '기자신고'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 고대사에 관한 독자적 문헌자료가 없어 중국의 고대문헌에 의거하여 유추해야 하는 바, 북한의 리지린 박사나 남한의 윤내현 교수 모두 [사기], [한서], [삼국지] 등의 중국 고대문헌에 밝은 한편, 윤내현 교수는 '실증적'이고 고고학적 근거에 좀더 중점을 두고 있다.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난하로 본 견해는 일찍이 1916년 장도빈이 제출했다. 그리고 신채호, 정인보, 최동 등도 그 견해가 장도빈의 것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았지만 고조선의 강역을 발해 북안으로까지 확대해보고자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민족사학자들의 견해는 한국사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재검토의 여지가 있었음에도 역사학을 전문으로 하는 한국 역사학계로부터는 외면을 당했고, 이른바 재야사학자라고 불리는 일부 인사들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1960년대에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날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로 보는 견해와 오늘날 발해 북안(요동)으로 보는 견해 사이에 큰 논쟁이 있은 후, 지금은 고조선의 강역을 오늘날 중국의 요령성에 있는 대릉하로부터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까지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이 설은 필자의 견해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북한에서 우세한 위치에 있는 설은 민족사학자들의 견해가 수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윤내현, 같은책, <서장>, 2017.


결과적으로 윤내현 교수가 보는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은 리지린 박사의 영역과 같다. 서쪽으로는 대릉하보다 더 서쪽의 '난하'를 고대 '요수'로 보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 동쪽으로는 바다, 남쪽으로는 청천강 이북까지다. 물론 한반도 전역은 고조선의 간접적 문화권으로 보고 있어 결론은 같으나, '재야사학자'가 아닌 '역사 연구' 전문인 역사학자로서 '민족사학자'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논증에서는 중국 고대 문헌사료 분석을 넘어 '실증사료'를 학자 스스로 연구하고 밝혀낸다는 자부심이 읽힌다. 1960년대 북한의 문헌사학자 리지린 박사는 '고고학'적 유물에는 그리 밝지 못하다 고백한 바 있다.

식민사관은 대동강 유역인 한반도 북부 '평양'에서 '낙랑군' 유물들이 발굴되었다는 '실증자료'를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로 획정한다. 그러나 윤내현 교수는 고조선 수도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고대 한국어에서 '대읍', '장성'을 의미한 보통명사였으며 발해 북안(요동)의 '왕검성'이 고조선의 '평양'이었음은 물론, 북한 '평양'의 '낙랑' 유적은 고조선이 '멸망'했다는 기원전 108년 서한의 한무제 시대의 것이 아니라 기원후 1세기 동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견제를 위해 기습공격으로 '평양'에 설치한 '낙랑' 괴뢰국의 유물임을 밝히고 있다.


( '한사군의 낙랑군 위치도', 같은책, <6장> )



그런데 왜 '낙랑'이 여러 곳인가? 이를 보려면 우리 고대사에서 '기자(箕子)'와 '위만(衛滿)'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 '기자국 이동로(4장)' / 위만조선의 강역(5장)' )




"... 원래 연나라의 동쪽에는 그 지역의 토착세력의 군장이 있었고 그 토착세력과 연나라의 경계에는 성이 있었으며 그 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쌓은 것이다. 그리고 그 토착세력의 서쪽에는 '기자국'이 있었고 '기자'의 후손인 준이 또한 군장이라고 했던 바 '위만'에게 공벌되어 해중으로 옮겨가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준이 위만에게 공벌당한 시기는 서한 초가 되는데 당시에 서한제국의 연 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정치세력은 고조선이었다. 따라서 '기자국'의 준이 '한(칸/가한)'이라고 칭하기 이전부터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동쪽의 토착세력은 고조선이었다는 것이 된다."
- 윤내현, 같은책, <4. 기자신고>, 2017.


우리 역사 교과서는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세웠고 중국 은(상)나라 제후인 '기자'가 동쪽 조선으로 와서 '고대국가' 체제를 세운 '기자조선'으로 '대체'되었으며 이후 '위만조선'이 되었다가 중국 한나라에게 망한 후 '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도)'이 설치된 것으로 가르친다. 고려 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일연의 [삼국유사] 조차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이 시각을 유지한다.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을 민족사학자와 리지린 박사는 부정한다. 심지어 '해'를 좋아했던 친일 전 최남선은 태양(해)을 숭상하는 고대 조선어 '개'와 '기'가 비슷한 음이라는 근거로, 리지린은 고조선 왕족의 성이 '기'씨였다는 근거로 '기자'가 오지도 않았음에도 혼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윤내현은 '기자동래설'은 긍정하나 '기자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차지했던 '기자국'에 불과하며 '기자'의 성은 은나라 성씨인 '자'씨로 주나라에 의해 은나라가 멸망했을 때 중국 동북부 '조선' 인근으로 망명한 것을 긍정한다. 준왕(자준)으로 끝난 '기자국'은 고조선 전체 영토의 200분의 1 정도 서쪽 변방만 차지했을 뿐이며, 성이 '기'씨든 '자'씨든 지금의 청주 한씨와 덕양 기씨, 선우씨 등이 그 후예라는데 고대 조선어 발음과 한자 표기의 결합의 결과다. '한'이나 '선우(단간/단군)'는 몽골-퉁구스 계 왕인 '칸(가한)'을 의미한다.

농경과 정착 초기인 '읍제국가'에서 사유재산과 계급발생의 초기형태인 '추방(추장)국가'로의 이행에는 청동기 발전이 있는데, 기원전 4세기경 철기 시대가 본격화되면 '연맹체'를 넘어서 중앙집권적 고대 '국가' 체계가 확립된다. 왕권이 강화되고 왕족의 조상을 숭상하며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면서 사유재산 집중을 위해 세금을 수탈하는 이 '고대 국가' 체제는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만연하는 바, 고대 기록에는 동시대 동북부의 고조선도 그러한 사회체제를 이루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황하 유역의 '앙소(주)' 문화나 '용산(은)' 문화와 별개의 고조선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말이다.


"위만의 모반은 준왕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볼 때는 준왕이 베푼 후의에 대한 어이없는 배신이었지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 변혁의 파급 효과였다고 이해된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에 이미 상(은)-서주의 봉건질서가 와해되고 전국시대를 거쳐 진제국의 성립과 더불어 중앙집권적 군현제가 실시된 후 불과 15년 만에 진제국은 멸망하고 한미한 출신의 유방에 의해 서한제국이 건립되고 군국제가 실시되었다. 한편 고조선은 당시까지도 고대의 '읍제국가'적 봉건질서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고조선의 국가질서에 새로 편입된 기자국도... 왕실의 교체 없이 40여 대를 내려왔기 때문에 고래의 통치체제와 질서에 안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 윤내현, 같은책, <5. 위만조선의 재인식>, 2017.


중국의 전국시대에는 이미 열국의 제후들이 스스로 '왕'이 되어 침략전쟁을 일삼던 시기인데, 연나라에서 고조선의 서쪽 변방 '기자국'으로 망명한 '맥족' 장수(리지린에 의하면) '위만'은 '기자국' 정권을 탈취한 후 동쪽의 고조선까지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서한 정권의 묵인과 동조가 필요했는데 오만해진 결과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 한무제의 정벌을 당해 멸망한다. 식민사관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고조선의 종식을 선언하나 고조선의 '예맥'족은 동쪽 최초 수도인 '왕검성'으로 천도하여 '읍제국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나 시대는 이미 강력한 철기 문화를 기반으로 '고대 국가' 체제를 정립하던 '전국시대'였다.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신정정치'를 펼치던 고조선은 중국 '동주'와 같은 명맥만 유지한 채 아시아 동북부의 '열국시대'가 열린다. 우리가 잘 아는 북쪽의 부여와 고구려, 옥저, 남쪽의 진국(마한/진한/변한), 동쪽의 '큰 바다'에 둘러싸인([삼국지],<동이전-예전>) '예'가 바로 고조선이다. 결국 중국의 동북부는 고구려에 의해 통일되고 기원후 1세기 동한의 광무제는 중국의 전란을 어느 정도 평정한 후 고구려의 서진을 견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지금의 평양 지역을 공략하여 '낙랑국'을 건설하는데, 이 '괴뢰국'은 고구려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전설과 같이 기원후 4세기에 고구려에 복속된다. 같은시기 요동 서남부 '낙랑군'도 고구려는 흡수하게 되는데 이래저래 '낙랑'은 우리를 헷갈리게 하지만, 윤내현 교수 등이 밝혀낸 지금 '평양'의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라, 위만에 의해 밀려난 예전 '낙랑' 지역 사람들의 소국인 '낙랑국'과 이후 동한 광무제의 '낙랑 괴뢰국'인 것이다.


"위만의 정권 탈취와 성장은... 동아시아의 역사 전개 과정에서 본다면 중국에서 춘추시대 이래 있었던 사회 변화와 정치 변화의 여파였고 철기의 보급에 따른 고조선의 사회 구조와 경제 구조 변화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의 쇠퇴와 위만조선의 성립은 읍제국가로부터 영역국가로의 변화를 가져왔다...
...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을뿐 아니라 그 멸망은 한국 고대에 있어서 읍제국가의 붕괴와 열국시대의 개시를 가져왔으므로 한국사의 범주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사의 주류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며, 한국사의 주류를 고조선으로부터열국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윤내현, 같은책, <5>, 2017.


'기자국'의 '배신자(윤내현)'이자 '혁명가(리지린)'였던 위만은, 한고조 유방의 사후 모반의 죄를 쓴 노관이 흉노로 도망쳤을 때 방향을 달리 하여 '조선'으로 망명한 연왕 노관의 부장이었다는 일본 사학자의 추측도 있지만, 리지린 박사에 의하면 고조선 서방 2천리를 빼았았던 연나라 장수 진개처럼 '중국인'이 아닌 '맥족'으로 볼 수도 있다. 요동 자체의 역사인 '요동사'의 시각으로 보면 요동 지역의 다수 원주민 자치정권인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읍제국가의 형태로 지속되었으며, 중국식 정치 체제의 영향을 받은 '기자'와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 일부를 지배했다. '중국인' 기자는 오래 가지 못했으나'요동인' 위만은 '중앙집권' 국가를 만들기 위해 동방의 고조선에 도전했고 이로 인해 요동의 '열국시대'가 개시된다.

우리 고대사는 이제, 우리 역사의 '주류'가 아닌 '기자'와 '위만'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고대 아시아 동북부를 아울렀던 '토착세력'으로서 고조선의 역사,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기자가 조선에 봉해진 후... 아사달(왕검성/평양)에 돌아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이가 1,908세가 된([삼국유사],<고조선조>)" 단군왕검이 다스린 그 고조선 자체의 역사에 직면하게 된다.


"기자국은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 없음이 확인되었고 '기자'와 '위만'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당시에 고조선이 강한 토착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 방증되었다. 이제 고조선의 역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르게 복원하는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는 것이다."
- 윤내현, 같은책, <4. 기자신고>, 2017.


요동의 고조선 '단군왕검' 체제는 중국의 정치체제와는 독립적인 '토착세력'으로서 2천년 이상 그 자체의 역사를 이어갔던 것이다.


***

1.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2.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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