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고조선(古朝鮮)'을 찾아서
'대륙 고조선(古朝鮮)'을 찾아서
-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필자는 우리 고대국가들에서의 계급투쟁의 력사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였다. 계급투쟁은 결코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된 때에 비로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대립이 생긴 첫날부터 진행된 것이다...
필자는 위만정권의 수립은 고조선 사회의 발전의 계기로 되었다고 인정하며, 그의 정변은 고조선 사회의 계급투쟁의 반영이라고 보려고 한다...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필자는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오늘의 료동, 료서 지역에 걸쳐 있었고, 서변은 우북편 지역에까지 이르렀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에게 패전한 후는 오늘의 대릉하(패수) 이동으로 축소되었다고 인정하며,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오늘의 중국 요령성 개평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래 옥저는 다만 함경남북도에만 위치한 것으로 인정한 설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문헌사료를 세밀히 검토한 바, 옥저는 옥저, 동옥저, 북옥저의 3개 옥저가 있었고, 옥저 지역은 오늘의 중국 즙안(집안)에서 압록강 밑으로 위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예맥'이 강원도에 위치했고, '예'는 그 밑(압록강 하류지역)에서 료동반도 동변에 걸쳐 위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예맥'이 강원도에 위치했다는 력대의 설이 근거가 매우 박약함을 인정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내놓으려 한다. 그리고 고대 숙신은 3세기 이후 읍루, 물길, 말갈족과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며, 그것은 곧 '고조선족'이였다는 것을 론증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 리지린, [고조선 연구], <머리'말>, 1962.
1961년 6월부터 9월까지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는 7차례에 걸쳐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개최하여 '낙랑군=평양설'과 '고조선=요동설' 사이의 끝장토론을 벌인다. 도유호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평양 일대의 청동기 유물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며 '패수'는 청천강이라는 주장, 반대편 문헌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이 요동 지역이라는 주장의 일대 격돌이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자들이 축소시킨 고조선의 강역을 벗어나려는 북한 역사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도 고고학 유물을 근거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력사과학토론회'에 한 역사학자의 논문 한 편이 제출되면서 결국 '고조선=요동설'로 급작스레 종결된다.
북한 세습정권이 반동화되면서 '평양' 중심의 '대동강 인류문명설' 따위의 어용 역사학이 지금 이북에서 득세하고 있다지만, 해방 후와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던 역동적인 시대인 1960년대에는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이 북한의 역사학계를 이끌었다.
'실증주의' 역사과학를 넘어서 고대 문헌들과 당대의 정치경제 사회구성체 분석을 통한 '과학'적 역사유물론을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을 최대한으로 넓히면서 위 토론에 종지부를 찍은 논문이 바로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다.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1916~?)는 1958년부터 중국 북경대에서 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중국의 '고사변학파'로 불리는 고힐강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데 이 학파는 중국내에서는 진보적 학파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중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대륙고조선설이 마뜩치 않았음에도 리지린의 철저한 중국 고대문헌 분석에 반박하지 못한 채 박사학위 논문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즉, 리지린은 중국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북경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역사왜곡의 본산지에서 당당하게 우리 고조선의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북경대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중국의 대역사가 고힐강조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철저한 문헌조사와 고증을 통해 중국을 딛고 귀국하여 '실증주의' 역사학을 무릎 꿇렸다.
위 <머리말>은 결국 이 논문 [고조선 연구]의 요약 서문이자 결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리지린 박사는 '고조선=평양설'을 뛰어넘은 '고조선=요동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대의 요동과 요서 지역 자체를 서쪽으로 더 확장하였고, 그에 따라 옥저와 진국(辰國/삼한:三韓)까지도 한반도 북부로 더 끌어올렸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우리가 아는 고조선 강역도 중 가장 넓은 영토를 그리고 있다.
"... '습(濕)'자 음이 '숙(肅)', '식(息)', '직(稷)' 음과 통하며, '숙신(肅愼)'(식신,직신; 息愼,稷愼)이 '습수(濕水)', '렬수(洌水)', '선수(汕水)'가 합하여 '렬수(洌水)'를 이루는 강 명에 유래했다는 고대의 설이 '조선(朝鮮)'의 명칭의 유래로 된 것으로 바뀌여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 리지린, 같은책, <1. 고조선의 력사지리>.
우리 역사의 시작 고조선(古朝鮮)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건국하여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열국시대'를 지나 고대국가 '삼국시대'의 기초가 되는 우리 역사 고대 노예제 사회였다. 원래 국명은 '조선'인데, 이후 이씨 조선과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사기], [한서] 등의 중국 고대문헌에는 '조선'이라 부르면서 <조선열전>을 따로 전한다. 물론, '조선'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 한나라 왕조 및 전국시대 왕국들과 관련된 역사로서 서술되고 있다.
'조선(朝鮮)'.
14세기말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정도전 등의 급진적 사대부들은 우리 역사의 뿌리이자 '동방의 해뜨는 나라'라는 식의 국명으로 '조선'을 채택했을 수도 있으나, 애초 중국 고대 문헌에서 부른 '조선'은 뜻을 지닌 말이 아니라 동북방의 고대 '조선어'의 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었다. '렬수'라는 큰 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습수(濕水)' 등의 음과 그와 비슷한 '숙신(肅愼)' 등의 음을 중국의 한자로 번역한 말이 '조선'이라는 것인데 우리글이 아직 없던 시절의 이두식 표현인 것이다. [사기] 등에는 '조선', '발(發).조선' 식의 표현도 있는데, 고대 조선어로 '발(發)', '불(不)'은 '국가' 또는 '지역'을 뜻한다. 고구려의 기원후 1세기 수도 '국내성'은 '불내성'이라고도 쓰며, '부여'라는 고구려 이전 열국 중 하나의 국명은 '지역국가'라는 의미의 '불여(不與)'라는 설도 있다.
그리하여 '(고)조선'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기 전 오랜 문헌에 나오는 '숙신'은 한참 후 두만강 유역에서 야만생활을 하던 '여진족'의 선조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조선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중국의 '동북공정' 따위 제국주의 역사관에 대항한 우리의 주체적 역사관은 긍정한다. 반면, 식민사학자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 사학'은 맹목의 '과학'에 불과하며 심각한 '철학의 빈곤'이 그 본질이라 보고 있다. 한편으로 '대동강 인류문명설'이나 고조선 또는 고구려 '대제국설' 따위는 문헌이나 고고학의 역사과학적 성과를 정치로서 왜곡하는 '유사역사학'이라 불린다. '고조선 연방제국'이 이후 흉노와 섞이고 결국 훈족의 일부로 유럽 문명까지 만들었다는 식의 몽상이 아니라 사료로 말하는 '과학'으로서 역사학의 본연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고조선 연구]의 리지린 박사와 이 논문을 역해한 <한가람역사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의 한목소리 주장이다. 그만큼 리지린의 중국 고대문헌 분석은 중국인 역사학자도 반박 못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리지린의 고조선이 서쪽으로 더 나아간 이유는 바로 '조선(숙신)'이라는 국명의 바탕이 된 강물, 즉 '열수(洌水)'의 위치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열수'는 '요하' 또는 '요수'인데 현재의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요하'가 아니라 그보다 더 서쪽에서 흐르는 '난하'라고 한다. '난하'는 북경에서 가까운 북쪽의 강이다. 기존 '고조선=요동설'은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을 같은 지역으로 보았으나, 리지린은 '열수(요수)'를 더 서쪽의 '난하'로 보면서 고대 요동을 현재 요동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비정한 '대륙 고조선설'의 주요 이론가였다. 리지린에 따르면 기원전 7~5세기경 고조선은 극동아시아의 동북지역 전체를 석권하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에 "열수는 요동에 있고, 열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개모성 또는 개평으로 발해만에 인접한 도시였다.
기원전 5세기에는 청동기 말기로 '구리의 나라', '고리국'이 고조선의 서쪽에 인접해 있었다. '고리국'의 민족은 '맥(貊)'족으로 표범 비슷한 '맥(貊)'이란 짐승을 사냥하던 민족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중국 전국 중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에 의해 멸망한 듯 하다. 이때 흩어진 '맥족'이 고조선을 이루던 '예(濊)'족과 섞여 '예맥(濊貊)'족을 이룬다. 이들이 바로 선비족, 부여국, 오환족 등의 선조가 되는 동호(東胡)족(동쪽 '오랑캐')이며 고조선인들이었다. '예(濊)'족의 한자는 '더럽다'는 뜻인데 고조선인들이 스스로 이런 한자를 썼을리는 만무하다. 북방 유목민 '흉노(匈奴:흉칙한 노예)'처럼 중국인들이 지칭한 차별적 언어였을 것인데, 고조선족인 '예'족은 원시야만의 나라가 아니라 주도적 철기 문명을 지닌 동북방 일대의 거대한 고대 '연방국가'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이미 '8조 금법' 등을 보아도 '원시공동체'를 벗어나 국가권력이 인민 개인을 법으로 통제하던 고대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결국, 고조선의 지배민족은 엄밀히 따지면 '예'족이었고, 부여와 고구려의 지배민족은 '맥'족이라는데 '예맥'족으로 섞인 이들은 아시아의 동북방 또는 고대 요동을 지배한 민족들이다.
"예와 맥은 일찍이 신석기 시대, 늦어도 기원전 2천여 년 이전에 오늘의 료동, 료서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보여진다. 예는 료동 개평을 수도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다. 예의 여러 부족들은 국가 형성 이전에 이미 료서와 조선반도로 퍼져 나갔고, 그 일부는 오늘의 하북성 남부인 청장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맥은 처음부터 예의 지역의 북방에 거주하면서 기원전 10세기 이전 시기에는 이미 그 일부가 중국 북부에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며, 늦어도 기원전 5세기에는 료서의 열하, 릉원, 조양 지역, 고 료동의 고조선 지역 북부에 걸쳐서 계급국가인 맥국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 리지린, 같은책, <3. 예족과 맥족에 대한 고찰>.
후대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 '혁명가'들조차 사대주의로 인해 '기자조선'을 근본으로 삼았다. 원래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 은나라의 신하 기자(箕子)가 요동으로 망명하여 세운 중국식 왕조인 '(고)조선'이라는 것인데, 리지린의 문헌 분석에 따르면 '기자'는 동북방 요동으로 오지 않았다. 고조선의 왕족 성씨가 '기'씨였기에 혼동이 전설이 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북방 유목민의 대명사 '흉노'족의 왕은 '선우(單于)'인데, 동북방 정착민 '예맥(동호)'족의 왕인 '단군(檀君/단간:單干)'의 한자가 비슷하다. 즉 1,9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단군왕검'은 개인이 아니라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왕을 뜻하며 고조선이 1,9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의미다. '단군'은 '선우', '왕'은 '왕', '검(험)'은 '곰'을 의미한다.
이후 맥국(고리국)을 멸망시킨 연나라 장수 진개는 중국 한족이 아니라 연에 귀순한 맥족이었고, 고조선 준왕을 진국 마한으로 쫓아낸 위만도 중국 한(漢)족이 아니라 맥족이었기에 고조선에 귀순한 후 준왕이 위만에게 맥의 지역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결국, 동북방 요동과 요서 지역을 장악한 민족은 중국 한족이나 한반도인들이 아닌 그 지역의 오랜 정착 '예맥족'이었다. 요동은 요동만의 역사와 문화가 이어져 왔으므로 '요동사' 자체가 인정되어야 하는 이유다.
위만의 반란 후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과 한반도 일대에서 이 부족국들을 망라한 '진국'으로 고조선의 예맥족이 넘어와 '한(韓)'족과 섞이면서 '요동사'는 우리 역사가 된다. 북방의 역사는 중국보다는 한반도와 더 가깝다.
( [요동사], 김한규, <문학과지성사>, 2004. )
고대 아시아 동북방의 '예맥(동호)' 이전의 원시민족은 '조이(鳥夷)'족이었는데, 하늘의 새를 숭상하던 풍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새에게 바치는 '조장(鳥葬)'을 시행하기도 하며 건국신화의 영웅들이 전부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신화의 공통점이 있다. 부여와 고구려, 신라와 가야의 시조들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우리말 '아씨'는 흉노 선우의 부인 '알씨'와 같은 어원이다. 또한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의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제가회의(諸家會議)'에서 '가(加)'는 '가한(可汗)', 즉 '칸(Khan)'이며 이후 돌궐, 몽골 등의 서북방 유목민과도 연결되는 증거다. 고구려 또한 이러한 '칸국'을 거느린 '5부족 연맹체'를 정치체제로 물려받았다.
( 우리에게 익숙한 우측 '열국도'에서 리지린은 옥저와 삼한(진국)의 위치를 한참 위로 끌어올렸다. )
"위만이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왕권을 탈취했다는 사실은 고조선의 계급투쟁이 첨예화되였으며, 거기에는 그 계급투쟁을 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급, 즉 봉건 지주계급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고조선에서는 기원전 3세기 말에는 호민 계층이 지주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위만은 그 계층과 결합하여 하호와 노예의 폭동을 리용하여 고조선 왕권을 전취하였다고 인정된다."
- 리지린, 같은책, <9.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그 사회 경제 구성>.
고조선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서주 시대부터 흩어져 있던 부족국가들이 기원전 8~7세기경에는 '고조선'으로 '예맥'의 통합국이 된 '고대 노예제 사회'였고, 독자적인 철기 문화를 주도하면서 중국 제나라와 활발한 교역도 했다. 노예와 같은 처지의 소작빈민인 '하호(下戶)'가 기본계급이었으나 중소지주에 해당하는 '호민(豪民)'들이 봉건 지주계급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위만은 이 '호민'과 '하호' 세력의 지지 하에 고대 노예제 국가 고조선을 뒤집어 엎고 '봉건지주 혁명'을 완수하면서 과도기적 정치경제 체제를 건설했다는 것이 리지린의 주장이다.
즉, 위만(衛滿)은 '예맥'인으로서 고조선인이었고, 고조선 왕조의 교체는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진보적 '력사학자'답게 리지린에게 우리의 역사, 고조선의 고대사 또한 "계급투쟁의 역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존 문헌 자료 상의 고조선 사회 경제 구성은 아세아적 공동체가 파괴되였으나 여전히 총체적 노예제의 유제가 강인하게 잔존한 노예 제도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노예제 사회이였고, 위만 이후 점차적으로 봉건사회에로 이행하였다고 인정한다."
- 리지린, 같은책,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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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