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국수, '라면'
우리의 국수, '라면'
-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동경몽화록]에는 '장사하는 사람 집에서는 식사 때마다 음식점에서 요리를 시켜 먹어서 집에서 반찬을 준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북방요리점, 남방요리점, 사천요리점처럼 지방색이 강한 음식점, 또는 기름에 튀긴 빵이나 북방민족의 요리 등 전문적 메뉴만 취급하는 음식점이 번창했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카이펑(개봉/동경)에는 정점이라고 부르는 큰 음식점이 72곳이나 있었고, 그보다 작은 규모의 가게인 각점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즉 카이펑의 거리는 바쁜 이들을 위한 '외식의 천국'이었다.
이 외식의 핵심이 바로 '면'이었다. 파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식사 시간이 되면 몰려드는 손님들을 감당하기에 '국수'만큼 훌륭한 음식이 없었다. '국수'는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를 해도 모양이 변하지 않고, 미리 삶아놓았다가 살짝 데쳐서 국물을 붓고 고명만 얹어도 되는데다 다양한 재료와의 조화가 가능했다.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원했던 카이펑 시민에게도 후루룩 넘어가는 '국수'가 최적의 메뉴였다."
- [라면의 재발견], <1. 라면의 탄생>, 김정현/한종수.
우리의 주식은 쌀이다. 원래 쌀은 여름이 길지 않은 한반도보다 더 아랫쪽 기후에 어울린다는데 우리는 고대로부터 주식이 늘 부족했단다. 약 1만년 ~ 6천년 전 인류가 '농업혁명'을 이루었을 때, 인류도 큰 변화를 겪었지만 '밀'의 번식확장에 '사기당한 것'이라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말하는데, 인류의 주식 양대산맥은 '쌀'과 '밀'이다. 쌀은 알곡 그대로 먹을 수 있는데 그게 밥이다. 반면 밀은 그대로 먹을 수 없어 빻아서 먹어야 한다. 따라서 '제분(製粉)' 기술은 인류 문명에서 '불'의 발견 못지않게 음식사의 혁명이었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앙아시아 지대가 '밀'의 고장이란다. 이를 중심으로 밀을 빻아 서쪽은 구워 먹었고 동쪽은 삶아 먹었다. 전자가 '빵'이고 후자는 '국수'다. '국수'는 가늘고 긴 면발이 연상되지만, 원래는 밀가루 반죽을 '면(麵/麪)'이라 했으며, 이를 가공한 음식재료 일체는 '병(餠)'이라 했다. 이동을 한 사람들은 이 '면'을 구워서 '빵떡'을 먹었고, 정착을 한 사람들은 삶아서 '국수'를 먹었다. 현재는 '면'이라 하면 '국수'를 이른다.
광고홍보학 김정현 교수와 역사저술가 한종수 선생은 [라면의 재발견]을 이 '국수'의 역사로부터 시작한다. 중국 후한시대 기록에서 '삭병' 즉 '새끼줄 모양 밀떡'이 동양 국수의 첫 기록으로 추정되며, 남북조 시대 '수인병' 즉 '물에 띄워 삶은 밀떡'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탈리아 '파스타'는 폼페이 화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데 이 모두가 '국수'다. 이후 '제면(製麵)' 기술의 발전을 통해 10세기 이후 중국 북송시대부터 '국수'는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남송시대에 북송의 영화를 그린 맹원로의 [동경몽화록]에서 '동경'은 카이펑이며 이 때 이후로 중국인들은 국수를 먹기 위해 나무 숟가락을 놓고 젓가락을 들기 시작했다. 동양의 젓가락은 '국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다.
당시 북송 수도 카이펑(개봉/동경)은 이미 인구 150만명의 '메트로시티'였다. 유럽 최대도시 콘스탄티노플이 50만, 런던이 10만에 불과할 때 이미 카이펑은 물자와 유통의 국제적 중심지였다. 5대10국 시대 후주의 세종 시영이 터를 닦았고 그 어린아들 공제로부터 '진교병변'을 통해 선양받아 송나라를 건국한 조광윤이 발전시킨 도시 카이펑은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통해 후세에 그 번영의 면모를 보여준다는데 홍교라는 다리 위 즐비한 노점들에서 판 주종목이 바로 '국수'였으며 바쁜 도시에서 빨리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식품'의 원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이 '댜오쯔' 국물이 옛 도쿄의 '라멘' 국물과 꼭 닮은 맛이다. 도쿄 라멘은 가다랑어포로 국물을 우렸기에 가벼운 신맛이 있었다. 게다가 일본 간장은 중국 본래의 간장보다 신맛이 강하다. 그런데 이 신맛과 똑같은 신맛이 댜오쯔에도 있다. 돼지 내장에서 나는 신맛이다... 라멘에는 왜 챠슈라는 이름의 삶은 돼지고기가 들어가는 걸까? 삶은 돼지고기는 만주족의 간판음식이 아닌가? 어쩌면 라멘은 만주 둥베이(동북)에서 온 맛이 아닐까? 만주족이 만들어 먹던 요리가 일본에 전해진 것은 아닐까?"
- [혁명의 맛], <1.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가쓰미 요이치.
중국음식을 통해 중국의 혁명역사를 돌아보는 일본의 미술감정가 가쓰미 요이치는 우동에 버금가는 일본의 대표국수 '라멘'의 '원조'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하며 '중국요리란 무엇인가?' 묻는다. 문명은 교차하고 교환하므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음식의 '원조'를 파헤치기는 무망하다. 현지에 뿌리내린 음식의 근원을 찾았다 해도 그 형태는 다를 것인데, 1905년 인천의 화교반점 '공화춘'의 '짜장면'은 중국 화북의 '작장몐(炸醬麵)'과 다르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중국 고학생들을 먹이기 위해 처음 만들었다는 '나가사키 잔퐁'은 중국의 '잡(탕)면'도 우리의 '짬뽕'과도 다르다.
일본의 '라멘' 또한 중국 베이징 뒷골목의 돼지 내장 육수를 끼얹은 수제비 '댜오즈'와 비슷한 신맛이 난다지만 둘 사이 연관성은 알 수 없다고 한다.
"라면은 동아시아의 면 문화에 미국의 잉여 농산물이 합쳐져 만들어진 음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인스턴트화하려는 대상이 왜 역사가 더 오래된 우동이 아니라 라멘이었을까? 여기에는 그의 출신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가 처음 개발한 '치킨라면'은 대만에서 많이 먹는 '계사면(기스면)'과 유사한 점이 있다."
- [라면의 재발견], <1>.
이제, '라면' 이야기다.
'라멘'이든 '라면'이든, 그 이름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면을 만드는 방식 중 수타면처럼 밀가루 반죽을 때려서 면을 뽑는 방식인 '납면(拉麵/라이몐)'이 그 출처일 수 있다는데, 참고로 칼국수처럼 반죽을 접어서 칼로 써는 것을 '수공면', 반죽덩어리를 어깨에 지고 칼로 쳐서 날리는 방식은 '도삭면'이라 한단다.
패전 후 일본의 경제침체와 식량난 속에서 대만 출신으로 일본에 귀화한 사업가 안도 모모후쿠가 원래부터 '패스트푸드'였던 국수를 더욱 즉석식품화한 '라면'으로 탄생시킨 게 1958년이었다. 우동은 원래 일본의 전통 국수라 변형이 어려웠을 테고, 가난한 도시노동자들이 노점에서 사먹던 '주카소바(중화국수)' 또는 정체불명 '라멘'을 개량한다. 면이 손상되지 않게 꼬불꼬불하게 뭉치고 면발에 구멍을 뚫어 튀겨서 급건조시키면 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튀김면이 불면서 바로 즉석국수가 되는 방식인데 공업화의 영향으로 대량생산을 통해 상대적인 저가로 끼니를 해결하는 아이템이었다. 처음에는 맑은 닭국물 육수양념을 면에 같이 묻혀서 지금 컵라면처럼 그릇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익히는 방식이었단다. 역시 여러 기업들이 라면 상품화 경쟁에 뛰어들었고 은행원 출신 기업가 오쿠이 기요스미는 1962년에 '스프 별첨' 라면을 처음 개발했다. 우리 삼양식품 창립자 전중윤에게 라면 제조기술을 전수한 사람이 바로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다.
강원도 김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성의 우체국에서 근무하던 전중윤은 원래 동방생명보험회사를 창립하고 제일생명 경영도 한 금융인이었단다. 어느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람들이 줄서서 먹는 것을 보고는 6.25 내전 후의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결심했고 보험연수차 일본에서 먹어본 '라면'을 국내에 도입했다. 일본 최초 '치킨라면' 발명 5년 후인 1963년 우리의 10원짜리 '삼양라면'의 탄생이다.
우리 최초 '삼양라면'은 스프는 별첨이었으나 용기에 담아 끓는 물을 부어 익히는 조리방식에 맑은 닭국물 육수였다는데 1974년생인 나는 본 적도 먹어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삼양라면'을 라면의 '원조'로 알고 있다. 내가 처음 먹은 라면 맛은 처음부터 다 소고기 육수였고 모두 비슷했으니 어린 시절에는 '삼양라면'만 사 먹었다. 그러다가 막바로 라면 경쟁에 끼어들어 롯데공업으로부터 독립한 농심에서 나중에 발매한 '안성탕면'으로 갈아탄 이유는 안성탕면이 '생라면'으로는 제일 맛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친구들 집에 모이면 무조건 라면을 같이 끓여 먹었고 냄비에 코박고 서로 젓가락 싸움하며 먹던 라면이 내 인생 최고의 라면이었다. 친구랑 둘이서 라면 다섯개도 거뜬히 밥말아서 국물 한방울 안 남기고 먹던 시절이었다.
[라면의 재발견]은 국수와 라면의 '역사'를 주제로 한 책만은 아니다. 라면의 '재발견'인 이유는 미국의 밀가루 원조와 일본의 기술전수로 '자존심'은 상해도 먹고살아남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던 우리의 애잔한 역사와 그럼에도 '매운 맛'을 세계에 보여주려고 극강의 매운 라면을 만들고 먹어대는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리라. 먹을 것이 없어 식사 대체재로 물가통제를 받던 라면을 이제는 젊은이들의 유희음식으로 진화시킨 한국은 매년 한 사람이 75봉지를 먹어대는 단연 세계 최고 '라면 강국'이다.
한때 잠깐 '라면집'을 차리고도 싶었던 나는, 일 년에 200개는 먹는 것 같은데, 세상에 나보다 라면 잘 끓이는 사람은 많고 먹을 라면은 더 많다는 사실을 어느날 알게 되었고, 좋아한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구나 새삼 깨닫게 해준 것도 내겐 '라면'이기도 했다.
어쨌든,
우리의 국수, '라면'은,
내게도 참 고맙고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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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면의 재발견], 김정현/한종수, <따비>, 2021.
2.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3. [혁명의 맛](2000), 가쓰미 요이치, 임정은 옮김, <교양인>, 2015.
4. [내 안의 역사], 전우용, <푸른역사>, 2019.
5. [라면에 관한 알쓸신잡 - 라면 인문학], 하창수, <달아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