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이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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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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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