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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9. 2021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 - 김소진 소설집

어린 영혼이 깃든 곳 : 김소진을 추억하며

어린 영혼이 깃든 곳 : 김소진을 추억하며.

- 김소진 소설집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솔>, 1993.





"'얘야, 이게 무슨 소리니? 어디서 비행기 떴나 보다.'

놀라움에 휘둥그래진 눈동자가 부딪쳐 왔다. 민홍은 백태가 낀 듯 부유스름한 철원네의 눈동자와 맞닥뜨리자 금세 자신의 눈동자로 껄끄러운 이물질이 스멀스멀 몰려들어 덩달아 시야가 부예지는 느낌을 받았다. 민홍은 눈을 씀벅거리며 고개를 바투 쳐들었다. 철원네의 등 뒤를 곧이라도 덮칠 듯 기우듬하게 서 있는 허름한 진보랏빛 비키니 옷장이 눈에 들어왔다."

- 김소진, <쥐잡기>, 같은책, 1991.



군입대 전인 1995년 3학년 1학기,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망상에 빠져 있을 때 내 손에는 한 권의 소설책이 들려 있었다.

서른 두 살의 소설가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1993)이었다.


1991년에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쥐잡기>로 등단한 김소진은 6.25 때 월남한 아버지와 어머니 '철원네'의 신산한 삶으로부터 시작된 어린 시절의 '원체험'을 토대로 1980년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한 운동권 대학생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첫 작품 <쥐잡기>는 전쟁통에 포로수용소에서 천장의 쥐를 따라 가다가 남쪽을 택한 아버지와 남한의 풍요와 성장에도 소외되던 집안, 독재자를 잡겠다고 화염병이나 던지던 대학생 아들이 고작 철원네의 구멍가게에 사는 쥐 조차도 못 잡는 어찌 보면 아주 슬프고도 비루한 이야기를 순우리말 단어들과 함께 그려낸다.


3개월 후인 1991년 3월에 발표한 <키 작은 쑥부쟁이>는 어린 시절 '쑥부쟁이'로 불리던 작은 소녀의 삶과 역시 비루한 그녀의 운동권 대학생 딸 이야기다. 1991년 1월 아버지 이야기로 등단 후 바로 어머니 이야기를 푸는 것을 봐도 김소진 '원체험'의 근원이 부모의 신산한 삶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물론 등단 전부터 써 놓은 습작들 중 신중하게 선별했을 게다.


1991년 가을에는 그 해 봄 우리 학교 김귀정 열사 투쟁을 배경으로 '밥풀떼기'로 불리던 도시빈민들이 '주류' 민주시민들로부터 배척되는 내용을 [열린 사회와 적들]로 그려낸다. 칼 포퍼의 거창한 담론이 아닌, '열린' 공간에서 '닫힌' 제도화로 선을 긋던 그 '열린 사회'의 '민주시민'들과 그 '적들'인 '밥풀떼기'들의 대비가 역시 웃기고도 슬프게 담긴다.


그렇게 소설가 김소진의 주인공들은 '열린' 주류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41



김소진이 등단한 1991년의 고등학생 나는 학창시절 줄곧 '주류'에 들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 말을 잘 듣기 싫어 제대로 말도 섞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사고치고 다니지도 않아서 선생님들이나 나나 서로에 대한 관심 따위 없었다. 나는 앞자리에서 시험문제 맞춰보는 '범생이들'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노는 애'도 아니었다. 아마도 수많은 다수 중 눈에 잘 안 띄는 하나였을 우리는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각자 중학 시절 친구들을 데리고 철봉대 밑에서 모였다. 이른바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경희고 31회 졸업 '철봉파'였다.


우리는 야간자율학습 시작전 모이고 '야자' 끝나고 모여서 철봉과 평행봉을 했다. 나름대로 아주 건전한 '운동모임'이었는데, 조직 외에서는 "저 새끼들 뭐냐"는 식의 경계하는 시선도 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그때 이미 그저그런 약자들은 일단 모여야 산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다. 1990년대 초, 그 당시는 '왕따'라는 개념도 없었고 신체의 일부와 같은 몽둥이를 깜빡 두고 수업 들어와 기분 상하신 선생님부터 우리를 싸대기로 교실 한바퀴 돌리는 게 다반사라서 친구들 사이에서도 '학폭'이 사회문제가 아니라 그냥 등교와 함께 시작되는 일상이었던 시절이라 모르긴 해도 '철봉파' 아니었으면 졸업 한참 후 "내가 지금 말로 왕따였구나" 추억할 놈이 한둘 아니었을 거다.

'범생이'도 '노는애'도 아닌 '철봉파'는 건드려봐야 별 거 없었겠으나 굳이 건드리는 애도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정상'스러워 보이지는 않았을터, 우리 조직과 친구들의 정신상태가 지금도 이상하다 싶은 경우도 없지는 않은데, 어른이 된 후 언젠가 처자식 대동하고 옛날 아빠 살던 동네와 초중고등학교를 우연히 돌아보던 중 그 '기원'을 추적하기도 했다.



선배나 강자들한테 끌려가던 추억의 경희대 크라운관 부근 '돌다방'은 그저 백면서생이었던 나로서는 철봉대보다도 추억이 없으나, 어린시절 동네 뒷산 '고황산(원래는 '천장산')'에서 동네형들한테 맞으면서 백원짜리 털리던 중 저 멀리 바라보던 고딕양식의 성당같은 건물이 있어 가까이 가보니 다 완공된 듯 하여 둘러보았는데, '인류사회재건', 문화세계창달', '밝은사회구현' 등의 구호와 함께 비둘기가 날아가는 부조와 괴벨스스럽게 횃불 들고 나팔 부는 동상들은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문구의 어깨띠를 둘렀더랬다.

경악한 나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문을 열려고 했는데 자재도 완전 싸구려인데다가 조악한 스테인드 글래스가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그 고딕건물, '평화의 전당'이라면서 월계수 잎을 문 비둘기 몇 마리 날리고 있었다.



이 사학재단 이거 완전 싸이코 냄새 난다 싶어 나는 '철봉파' 친구들 단톡방에 보고했다.


"친구들아, 아마도 정신세계 이상한 사쿠라들에게 우리의 어린 영혼을 맡겼던 것 같다."


충격의 그 와중에도 대망과 선망의 '경희여고' 유적지는 백만년만에 발굴해냈고.



우리들의 어린 영혼이 깃든 곳.

그 시절 철봉대는 비록 사쿠라들한테 유린당했으나, 졸업때 최종 명단 '15명'은 '주류'든 아니든 관계없이 지금도 건재하다.




"- 모르지, 맹탕 헷것이 눈에 보였는지두.

아버지의 늘쩡한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 민홍은 찬찬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골목 저편에서 비닐봉지와 함께 다가온 바람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리칼을 달싹이고 갔다. 민홍은 입을 굳게 다물어보았다. 그냥 그렇게  있고 싶었다. 불끈 쥐어본 주먹에는 연탄집게가 알맞춤하게 들어 있었다. 왠지 느꺼운 감정이 밀려오면서 저만치서  시작되지도 않은 겨울의 출구가 보이는  했다. 그쪽은 맨발이었다."

- 김소진, <쥐잡기>, 같은책, 1991.



1997년, 군복무 중 소설가 김소진이 요절했다는 소식을 신문기사로 읽었을 때, 잠깐 눈물이 흘렀던가, 모르겠다. 머릿속에 '소설쓰기' 밖에 없었던 스물세살의 나는 아마도 많이 슬펐을 것이고 무언가 인생에서 큰 게 하나 빠져나간 심정이었을 텐데, 존경하는 고인께는 정말 미안하게도 그의 소설이 더 이상 변하지 않을 것임에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주류 제도권'에 들어선 김소진은 이미 1996 ~ 1997년에는 <쥐잡기>에 실패한 어리숙한 운동권 대학생도, 도시빈민을 아마도 연민하면서도 담담히 묘사하던 신문기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지난 후, 여전히 비루하고 '열린 주류'에 끼지 못하던 스물일곱의 나는 <쥐잡기>를 실패한 소설 속 청년처럼 맨발로, 겨울바람 앞에 서 있었고, 여전히 김소진을 잊지 못한 채 그를 따라 써보려 했지만 내용은 진짜로 비루해진 이야기를 묶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응모하고는 마지막 교문을 나섰다.

어린 영혼을 어딘가에 남겨두고 그 때 나간 교문은 내가 사회로 처음 들어가는 입구였다.


내 어린 영혼이 깃든 곳이 어디였는 지도 모른 채, "맹탕 헛 것이 보였는 지도 모르는" 그 아련한 시간이 내게서도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쥐잡기(1991), 김소진 소설집, <솔>,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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