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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01. 2021

[병서, 조선을 말하다](2018) - 최형국

'병서(兵書)'로 읽는 조선의 역사

'병서(兵書)'로 읽는 조선의 역사

- [병서, 조선을 말하다], 최형국, <인물과사상사>, 2018.





"정조는 [무예도보통지]에 군사 업무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입장까지 담아놓았다. [무예도보통지]는 사도세자의 [무예신보] 편찬 의도와 맥을 같이하며, 이 병서로 기존의 당파와 무관한 새로운 무반을 육성하고 장용영을 중심으로 무예 체계를 표준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에 이루어진 단병 무예서 편찬은 [무예제보], [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신보], [무예도보통지]로 이어지며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병서, 조선을 말하다], <3-4. 동양 삼국 무예의 집대성 [무예도보통지]>, 최형국, 2018.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은 군주부터 신하는 물론 가능하다면 일반 민중들까지도 '유학'으로 신념화되기를 바랬다. 권문세족과 불교로 인해 부패한 고려 왕조를 뒤집어 엎은 급진 성리학자들은 "토지는 농민에게, 권력은 성리학자에게!"라는 민본주의적 '계민수전(計民收田)'의 슬로건으로 새로운 국가 조선을 건설하고 절대왕권을 견제하기 위한 성리학자들의 관료지배체제를 공고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상계는 조선을 '문인' 관료의 사회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개국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새 국가 체계의 틀을 잡고 군사적으로 사병을 혁파하여 국가 상비군을 강화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사찬 형식의 병서 [진법(陣法)]을 저술한다. 혁명 초기 '혁명국가' 조선의 권력을 호위하기 위한 '문무겸전'의 시작이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정도전' 레온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연방의 외무부 인민위원이자 붉은 군대 사령관으로 내전을 지휘한 것과 같다. 물론 정도전의 '문무겸전' 프로그램은 그를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태종 이방원이 그대로 물려받는다. 정도전에 의해 '사병', 왕자의 개인군대를 해체당하기 직전 이방원은 그의 사병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지만 왕권 강화를 위해 형제 및 처가와 사돈 등의 사병을 해체하고 중앙군 체제를 확립했다. 태조 이성계의 북방 사병들은 새 국가 조선에서 '신권 강화'를 바탕으로 한 삼봉 정도전의 중앙군제의 [진법]으로 개편되어야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왕권 강화'를 위한 태종 이방원의 사병 쿠데타로 혁파된다. 이방원은 '역적' 정도전의 길을 따라 사병을 해체하여 중앙군을 강화했고, 조선 최초의 병서인 정도전의 [진법]을 [진도지법]으로 계승한다. 세종 즉위 초 상왕으로 병권을 잡고 있던 태종에 의해 병조가 공식편찬한 조선 최초 어정 병서가 [진도지법]이다.

물론  사람의 정치강령은 달랐다. 정도전은 성리학 관료들이 지배하는 조선, 이방원은 성리학 군주가 지배하는 조선을 각각 꿈꾸었고 결국 이방원이 승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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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의 '문무겸비' 학자인 최형국 박사는 수원시 무예24 시범단장이다. 그는 2021 정조가 편찬한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 번역하고 해설하였다. 조선 후기를 개혁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가 '문치 개혁' 핵심인 규장각과 '무치 개혁' 중심인 장용영에게 명하여 조선의 단병접전 전투기술을 총망라하게  병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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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16~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급격한 체제 위기를 맞았다. 왕권 강화를 위한 중앙군은 시대를 따라가지 못했고 국가 위기에도 성리학 관료들은 쓰잘데기 없는 유교식 예법 강화에서 국난 위기 극복의 해법을 찾았다. 대외 국력은 허약한데 내부 신분적 계급체제를 격화시켜 조선 후기는 필연적으로 '민란의 시대'를 불러왔다.

 중에도 조선 후기 군사전술 변화의  계기가  사건은 1811 관서지방의 '홍경래의 '이었는데, 세도정치와 삼정 문란으로 격화된 민심이반을 토대로 허술한 조선의 군사력이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자 이후 조선 농민들의 치열한 반란을 예고하는 중대 사건이다. 이로부터 자생적으로 훈련된 '직업혁명가'들은 한반도 일대를 누비며 각종 민란을 조직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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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세도정치'와 '민란의 시대'를 배태하고 있던 조선 후기를 개혁하기 위해 조선 22대 왕 정조는 '성리학 부흥'과 '왕권 강화'의 길을 택하는데, 국가의 사상적으로 [대전통편], 군대의 집단 진법적으로 [병학통], 군인의 단병접전의 [무예도보통지] 등 '3통(通)'이었다. '통(通)'은 과거시험 만점과 같이 모든 것을 '통달'했다는 자심감의 표현이자 각 부문별 '소통'을 의미할 수도 있었겠다. 최형국 박사는 "'통'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막힘없이 소통할 수 있는 상태([병서, 조선을 말하다], <3-4>)"로 정의한다. '문치규장, 무설장용'의 '문무겸전' 부활을 통한 전방위적인 조선 개혁을 꿈꾸었던 정조는 [경국대전]을 '개헌'한 [대전통편]에서 군사력 강화의 <병전>을 특히 더 개혁하고, 단병술인 '무예24기'를 전국적으로 통일 확립하는 [무예도보통지], 즉 각 단병접전술(무예) '24기'의 그림(도)과 해설(보)을 총망라한 기록(통지)를 완성하는데, 이는 임진왜란 중 선조 때(1598년) 편찬된 [무예제보] '6기'와 광해군 때(1610년) 증편된 [무예제보번역속집]의 '10기',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절(1759년) 지어졌으나 소실된 [무예신보]의 '18기'를 이어 조선의 단병접전 무예를 '24기'로 확정한 기록이다. [대전통편]과 [무예도보통지]의 중간에 위치한 집단적 군사진법 병서인 [병학통]은 정도전과 이방원이 길은 달랐지만 함께 꿈꾸었던 조선 중앙군의 [진법]과 [진도지법]과 같은 조선 진법의 집대성이었다.





"[병학지남]은 명나라 장수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에서 군대 훈련과 군사 선발에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편집한 병서로,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대적으로 변화한 조선 후기 군사 조련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병서다. [병학지남]은 그 이름처럼 조선 후기 '군사학의 길잡이'가 되었다.

[병학지남]은 명나라 병서인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지만, 조선군에 필요한 내용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주체적인 문화 수용이 나타났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처음에는 [기효신서]의 내용 몇 가지를 뽑아서 훈련에 차용하다가 수정, 보완을 거듭하면서 점차 단일 병서로 묶어나갔을 가능성이 높다."

- [병서, 조선을 말하다], <2-6. 정조, 새로운 군대를 꿈꾸다 [병학지남]>, 최형국, 2018.



정도전의 [진법]과 이방원의 [진도지법], 문종과 수양대군의 [오위진법] 등 왜란과 호란 전까지 조선의 진법 관련 '병서'들이 있었다. 이후 조선 중후기 진법서들은 발췌본과 편집본 형식으로 숙종 시기부터 [병학지남] 이름으로 산재한 것을 정조가 1787년에 통합편찬본 [병학지남]을 간행했다. 이 집단 교련서에 앞선 것이 1785년 [병학통]이었다. '지남철(나침반)'처럼 군사학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병학지남]이 조선 중후기 조선 진법을 집대성한 병서라면, [병학통]은 이를 위한 정조의 '진법'을 총망라하는 개혁 '3통'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은 중국대륙의 영향을 많이 받던 동아시아 문화권에 있었기에 [무예제보]로부터 시작한 무예서 일반 또한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모원의의 [무비지] 등의 중국 병서에서 발췌한 것이 기본이었다. 그러나 우리식으로 수정과 보완을 거쳐 주체적 문화수용를 통해 조선식으로 재구성했다.



해방 후 1949년 무예가 곽동철이 지은 [무예도보신지]는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책 제목도 비슷하게 지었는데, 국정 편찬은 아니지만 아마도 '해방 후 남한 최초의 무예서' 아닐까 싶다. 조선 무예서의 전통을 이으면서 현대식 '총검술'과 '검도'를 포함했다는데 일본식 검도술이 아닌 우리식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한 주체적 검도술도 담고 있단다. 총검술의 달인이었던 저자 곽동철은 조선의 '본국검'과 같은 검술을 망라하면서 검도술에서 맨손무예인 다리걸기와 상박 등도 포괄하고 있다는데 이는 대한검도회의 '정통(일본)' 검도와는 맥을 달리 한다고 최형국 박사는 평가한다.


이외에도 최형국 박사는 국내 유일 '무예 인문학자'답게 무예와 인문학을 접목한 서술을 이어왔다.

모든 만물에는 '역사'가 깃들여져 있다. 그러므로 '전쟁 인문학'은 물론 '음식 인문학', '스포츠 인문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은 '역사'를 필수로 바탕한다.

'무예 인문학'의 권위자 최형국 박사의 [병서, 조선을 말하다]를 통해 조선 5백년의 역사는 물론 일제강점기 독립투쟁과 해방 후 역사를 '통사'로 돌아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


1. [병서, 조선을 말하다], 최형국, <인물과사상사>, 2018.

2. [정조, 무예와 통하다 - 正譯 武藝圖譜通志],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지음, 최형국 역해, <민속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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