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조선은,
내가 보는 조선은,
-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유정호, <원앤원북스>, 2021.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 '공이 있는 이는 조로 하고, 덕이 있는 이는 종으로 한다'라고 말한 것이 <태조실록> 황조실 책호문에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나라를 세웠거나 반정에 성공한 왕에게는 조를 붙였다. 또한 국난을 극복한 왕에게도 조를 사용했다."
-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143. 묘호를 조와 종으로 구별하다>, 유정호.
나는 '왕정'이 싫다.
기본적으로 크든 작든 인간들의 공동체나 사회가 소수의 집단에 의해 굴러간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물며 '왕족'이라는 한 집안이 공동체를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게 '왕족'이란 '도적떼'의 다른 말이다.
'공화정'을 인식하기 전이었던 고등학교 때도 나는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우지 않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기록유산이라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느니 민담과 전설 또는 야사가 낫다고 보았다. '왕조'를 중심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국사시험 보는데 문제는 없었다.
'태정태세문단세...'를 새삼 외운 건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무슨 책을 읽든, 모든 게 '역사책'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론]에도, 음식이나 전쟁에도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 문학이든 철학이든 결국 역사에서 시작하여 역사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보니, '태정태세문단세...'가 비단 조선 왕들의 계보만이 아니었고,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그저 그런 '본기'가 아니었다. 부끄럽지만, 우리 역사가 아니라 기전체의 시초인 사마천 [사기]를 여러 번 읽고 나서 든 생각이었다. '승자의 기록'일지라도 남아서 후세에 전하는 문장들이 일단은 '역사'였다. 역사의 숨은 맥락은 그 다음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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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조선 왕이 죽은 후 묘호에 쓰는 '조(祖)'와 '종(宗)'의 차이가 새왕조 개창자는 성을 갈았으니 '조'로, 이후 적장자나 직계가 이으면 '종'이 되다가 반정이나 방계가 이어지면 다시 '조'가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던 중 최근에 역사 교사 유정호 작가가 쓴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2021)를 보고 그 기원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조선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의 규정이었다. '조'와 '종'의 차이는 '공'과 '덕'의 차이였다.
왕정국가에서 '왕'은 기본적으로 '덕'이 있어야 했다. 변변치 못한 자가 보위를 이어받아도 왕으로서 죽으면 후세로부터 '종'은 받았다. 개국을 하거나 반정을 성공하거나 전쟁과 같은 국난을 극복했으면 '조'가 붙었다. 예외는 있다. 조선 최초의 쿠데타 반정에 성공한 이방원이 '태종'이 된 것은 위 원칙이 틀을 잡기 전이었거나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이방원 스스로가 '정통성'과 '덕'을 선호했을 수도, 그의 아들 세종이 그런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을 수도 있겠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얼떨결에 왕이 된 중종은 이전 세조나 이후 인조처럼 '공'을 내세우기 보다는 왕위의 정통성에 촛점을 더 맞추고 싶어서 성종의 직계라는 사실을 더 강조했다고 한다.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 왕인 선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는 과정에서 조선을 쇠퇴의 길로 꺾어놓은 군주지만 그 스스로는 국난을 극복했다고 자평했다. 이후 광해군 때부터는 무능한 선왕을 선조로 칭하면서 '조가 종보다 좋다'는 인식이 강화되었단다. 왕정에서 말 뿐인 '덕'이 허위에 불과하다는 자기인식이 본격화된 것이겠다. 조선 초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이 계획한 새로운 국가에서 애초에 '군주'나 '인주'가 내세울 것은 어차피 능력이나 실력이 아닌 혈연에 기반한 '덕' 밖에 없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창업군주로서 전지전능하게 포장되어야 했으나 그의 자손들이 모두가 능력자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골간은 성리학의 '민본주의'로 무장한 사대부가 왕의 '덕'을 견제하고 보완하면서 국가를 운영하는 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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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고려의 왕은 '조'가 없다. 탄탄한 사대부 관료주의 국가 조선에서 '조'는 나름의 '덕'을 다시 세우려는 사대부 관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왜란과 호란으로 조선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원인은 성리학이 '민본주의'를 버린 이후였다. '계민수전'의 건국 초 토지공개념 정신이 사라지고 공정해야 할 과거시험은 부정했으며 대쪽 같아야 했던 사대부가 사리사욕으로 부패했을 때 조선왕조의 대다수 민중의 삶은 돌이킬 수 없이 피폐해졌다. 전쟁통에서도 구제받지 못한 다수에게 조선이라는 국가는 망해야 할 왕의 나라일 뿐이었을 게다. 당쟁이 서인 노론 독재로 끝나고 세도정치가 득세했던 조선 후기 1백년은 '민란의 시대'였다. 이런 역사의 흐름에서 왕권 강화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이다. 조선 최강의 '성리학 군주'가 되고자 했던 정조의 개혁 실패는 왕조가 기울어지는 역사의 필연이었다.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다수 민중의 혁명으로 왕의 목이 날아갔다.
군주의 시대에 '덕'이나 '왕'으로 표현되던 '공공성'은 이미 다수 민중의 몫으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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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조선은,
왕의 나라이기 전에 '민본주의'의 '공공성'을 이념으로 세운 '혁명'의 국가다.
낡은 체제 고려를 뒤엎은 이 '반역'의 나라에서는 왕권 강화를 획책한 '반정'과 쿠데타가 끊임없이 일어났는데, 언제 쫓겨날까 두려워하던 왕과 국가를 집단운영하는 주체로서의 사대부 관료들의 체계적 공생체제였다.
일제강점기는 일단 차치하고 조선의 다음 단계는 더이상 왕의 '덕'이 아닌 다수 민중의 '공공성'에 기반한 '공화주의'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보는 조선은,
우리 역사 '마지막 왕조'의 운명이었다.
"사관에게 요구되는 자질을 '삼장지재'라고 하는데, 역사 서술 능력인 '재(才)', 해박한 역사 지식인 '학(學)', 현실을 직시해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식(識)'이 그것이다."
- 같은책, <41. 사초와 사관, 역사를 기록하다>, 유정호.
[조선왕조실록]이 뛰어난 이유는 왕조차도 그 기록을 보거나 고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조선의 역사 편찬기구인 '춘추관'의 전임사관 8명은 왕실의 모든 일을 기록하고 평가했다. 따라서 이들 사관에게는 학식과 체력, 양심이 따랐다. 또한 '삼장지재(三長之才)'라 하여 '재(才), 학(學), 식(識)'을 기본으로 했다. 물론 권력자의 시각에 눈치가 쏠리기는 했겠지만 학식과 양심에 따라 소신있게 역사를 세세하게 기록했으며 후세가 조선의 역사를 돌아볼 때 가장 믿을 만한 기록이 되었다.
유정호 선생의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는 조선의 모든 것을 담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학술이 아닌 교양으로 조선 역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 한 권만 있어도 충분할 정도다. 책의 사용법은 제목 그대로 곁에 두고 '하루 한 페이지' 씩 읽고 필요할 때 다시 찾아보는 '콘사이스 조선사 사전'이 알맞을 듯 하다. 약 380여 페이지라 금세 읽을 요량으로 파고들면 작은 글씨와 간략한 설명에 당황할 수 있겠다. 글씨 크기와 행간을 키우고 그림 몇 점 넣으면 6~7백 페이지 이상은 충분히 될 만한 분량과 내용이다.
특히 노안으로 고생하기 시작하는 나이라면 너무 급하게 다 읽으려 하기 보다는 가까이 두고 '1일 1페이지' 사용법을 지키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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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일 1페이지, 조선사 365], 유정호, <원앤원북스>, 2021.
2.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3.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4.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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