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인(活人)', 사람을 살리는 삶
'활인(活人)', 사람을 살리는 삶
- [활인(活人)], 박영규, <교유서가>, 2022.
"그렇습니다. 활인(活人),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릴 것인지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학문과 경전은 사람 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활인], <8. 인연의 실타래>, 박영규.
조선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활인원'의 탄선대사에게 찾아가 왜 불교에 귀의했는가 묻는다.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왕자에게 불교는 온갖 요설로 백성을 현혹하는 '불씨잡변'에 불과했다. 할아버지인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자신의 부인 심씨도 자주 부처를 찾았지만 조선은 엄연히 성리학의 나라였고 그럼에도 왕족의 불심은 예외였다. 젊은 충녕은 이러한 모순을 내심 비판하면서 탄선대사를 마주하고 앉았다.
'활인원(活人院)'은 역병과 질병으로부터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한성부에서 관할하던 공공의료기관이었다. 태종이 고려때부터 있던 수도 개경의 동서 '대비원(大悲院)'을 조선 수도 한양(한성부)의 동쪽과 서쪽에 '활인원'으로 이름을 바꿔 설치한 일종의 '지방공공병원'이다. '제생원(濟生院)'이 조선 태조때 생긴 전국적인 각지의 국립의료원이자 약방이었다면 '활인원'은 태종때 설립한 국립서울의료원인 셈이다. 소설 속 탄선대사는 한양 사대문 중 사람이 죽어나가던 서대문(돈의문)의 '서활인원' 소속 의료원장이자 의사인 스님이다.
성리학 왕자 충녕의 비판적 질문에 대한 탄선대사의 답변은 결국 사상과 종교, 신분과 계급을 떠나 '활인', 즉 '사람을 살리는 삶'은 모두 같다는 지극히 동양적 사상이다.
[조선반역실록](2017)의 저자인 역사작가 박영규 선생의 최신 근간 예정인 소설 [활인]의 배경은 조선 초기다. 고려말에 함경도 변방의 무인집안이었던 이성계의 5남으로 열일곱에 과거급제했던 이방원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과 형제들을 죽이고 조선이라는 공적인 국가권력을 이씨왕조 사유화하는 조선 최초 반역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태종도 본래는 유생이었다. 그가 빈민의료기관 '대비원'의 이름을 고친 이유도 '큰 자비(大悲)'라는 불교용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성리학의 국가는 내세가 없다. 바로 현세에서 정치가 민중을 구한다. 유교에서 '귀신'은 절대자로서의 신(神)이 아니다. 나를 낳고 나와 현세에 함께하는 조상의 혼(魂)일 뿐이다. 유학과 성리학이 말하는 '하늘'은 내세가 아닌 온 우주 운동의 근본원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치다. 고려말 급진적 성리학자들의 유혈 역성혁명은 결국 다수 민중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합리화되었다. 맹자를 따랐던 고려말 급진적 신진사대부들의 '살인'은 '활인'을 위한 성리학적 해답이었지만 이방원이 후에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대규모 '살인'은 결국 전주 이씨가문의 탐욕으로 귀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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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은 예의 서활인원장 탄선 스님과 그의 여제자 소비, 남제자 노중례다. 배경은 일단 '가제본'인 <상권>에서는 15세기 태종이 상왕으로 군림하던 세종 즉위 초년이다.
탄선대사는 고려말 유학을 공부한 궁정의원인 태의였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불가에 귀의하며 한양의 국립의료원인 활인원에서 무급으로 역병과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들을 돌본다. 고려말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동문 양홍달은 조선의 이씨왕조에 붙어 조선 최고의 태의가 되었으나 고려말 권문세족의 일원이었던 탄선은 이씨에 대항하고 왕씨를 지키는 '충신'이 되지 못했기에 유학을 버린다. '살인(殺人)'의 삶을 산 이성계와 그 아들에 비해 본인은 '활인(活人)'의 삶을 살 것이며 그 사상은 유교든 불교든 방법론이 다를 뿐 모두 한 가지라는 깨달음이 그를 부처의 품으로 인도했다. 탄선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의술은 사람을 억지로 살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 몸의 균형을 맞춰주면서 원래의 명줄대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최근 다시 번역된 미국 내과의사 리처드 거버의 [파동의학](1987)은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현대의학을 넘어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서양적 '에테르체' 또는 동양적 '기'의 균형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길을 열고자 한다. 15세기 조선의 의사 탄선의 길이 그것이다.
시체를 검안하는 천민인 '오작인' 노중례는 열여섯에 원래 생원시 장원까지 했던 양반집 자제였다. 그러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려던 때 의주에서 관직을 하던 부친이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옥에서 의문사한 후 가족은 흩어져 관비가 되고 말았다. 천민 중 천민이라는 오작인이 되어 검시로 연명하며 부친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나름의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탄선을 만나고 그 총명함으로 인해 활인원 소속 의원으로서 탄선의 제자가 된다. 탄선의 제자가 된지 2년 만에 각지에서 그 의술을 인정받아 대군의 연경행(명나라 사신단)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친을 음모로 죽인 원수들의 목숨을 의술로 살리게 되는데, 부모의 원수라도 목숨은 살리는 게 참된 의술이라는 것이 스승 탄선대사의 가르침이었다. 한편으로 중례는 동문인 소비를 차츰 연모하게 된다.
궁정무녀인 가이의 집앞에 버려진 고아소녀 소비는 매우 뛰어난 의술을 부리는 탄선의 수제자로 충녕의 큰아들(문종)을 애기때 살리고 부인 심씨가 안평군을 낳는데 도움을 주면서 궁정의 내의녀까지 오르는 실력있는 여의사로 태의 양홍달의 시기를 사는 여인이다. 소비는 세종인 충녕과 주인공 노중례와의 삼각관계 구도를 암시하며 소설 속 뛰어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상권> 중후반을 지나며 그녀가 버려지게 된 내력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소설의 재미를 더욱 깊어지게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이 플롯은 수년 전 이미 죽은 삼봉 정도전의 등장이다. 소비는 바로 거의 멸족의 화를 입은 정도전 가문의 손녀였다.
이렇게 박영규 작가의 역사소설 [활인]은 '반역의 나라' 조선에서 의술과 추리소설의 기법을 토대로 무한반복 '반역의 정치'를 그리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활인]의 '가제본'을 받고 처음 몇 장을 읽을 때는 오래전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처럼 당시 의술이나 궁정 주변생활에 관한 신변잡기 이야기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상권>의 중후반부로 갈수록 조선 초기 정치사회 전반을 다루는 역사소설의 징후를 보았다.
더욱이 내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숭하는 삼봉 정도전이 부활할 분위기니 당최 마저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시 역사작가 박영규 선생이다 싶다.
<하권>이 기다려진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44
https://brunch.co.kr/@beatrice100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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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활인(活人)-가제본], 박영규, <교유서가>, 2022.
2.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3.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4. [파동의학](2001), 리처드 거버, 최종구/양주원 옮김, <에디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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