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위작(僞作)인가?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위작(僞作)인가?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통치기간은 391년부터 491년까지 정확히 백년 간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18세(374년생)로 등극하여 21년을 통치하고 412년 39세에 사망하며, 장수왕은 412년 19세(394년생)로 등극하여 80년을 통치하고 491년 98세로 사망한다. 광개토왕이 '굵고 짧은' 응축의 역사를 펼쳤다면 장수왕은 '가늘고 긴' 발산의 역사를 펼친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서문>, 이석연/정재수,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의 <고구려본기> 제8권 '영양왕'편에는 고구려 영양왕 11년인 600년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왕명을 받아 [유기] 1백권을 모아 [신집] 5권으로 요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역사서는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멸망 후 평양성에 있던 고구려 사서 일체를 불태웠다는데, 김부식 또한 신라 이전 역사서 중 대부분의 주체적인 열국의 역사서들을 없앴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만이 '기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 선생은 일제의 왕실도서관에서 촉탁사서로 근무하던 10여년 간 일제가 약탈해 간 우리 역사서들을 발췌하고 필사하였다. 신라 문인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과 1995년 순차 공개 후 지금까지도 진위 논란이 있다는데, 박창화 선생의 또 다른 필사본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구려왕조실록' [유기(留記)] 100권의 발췌본일 수도 있단다.
역사는 그 누가 지우려 한다 해도 모조리 없앨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대를 이어 지켜나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적과 김부식이 분서를 했다고 해도 망국의 열신들이 그 역사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분투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던 일제는 만주를 포함한 우리의 강역을 측정하고 역사를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사대주의사관의 [삼국사기] 이전 역사서들을 약탈해 갔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반환되지 않은 일제왕실도서관의 그 자료들 중 고구려와 백제 등의 주체적 역사서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와 다른 시각을 전하며 그 내용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다고 한다.
[고구려사략]의 원본이 고구려의 주체적 역사서 [유기]로 추정되는 이유다.
1. '정복군주' 광개토왕 고담덕
"영락 10년 신라구원은 한반도 왜잔국(부여백제)이 광개토왕에게 무참히 깨진 영락 6년 왜잔국 정벌(396년)을 배경으로 한다. 그 결과로 왜잔국의 주류세력이 일본열도에 급히 망명하여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고(397년), 이를 뒤따르던 옛 부여백제(왜잔국)의 삼한백성(궁월군과 120현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위해 한꺼번에 경남 남해안에 집결한다(400년).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삼한백성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고 신라를 구원한다. 이후 야마토는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또한 협상을 통해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완결한다(402년). 다만 이 과정 속에 백제(한성백제)는 옛 왜잔국(부여백제)의 삼한 땅을 얻기 위해 전지태자를, 신라는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보장하기 위해 미사흔왕자를 각각 야마토에 볼모로 보낸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1-2-2. 광개토왕의 정복사업>, 이석연/정재수, 2022.
[유기]는 일종의 '고구려왕조실록'이었을 것이라 한다. 원래는 [대경]이라는 왕의 기록이 광개토왕 대에 [유기]라는 이름으로 대략 70권에 이르렀고,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또 다른 전성기인 영양왕 대에는 100권에 이르니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신집] 5권으로 요약하라 명했다. 이적과 김부식이 불태웠으나 남은 이 고구려의 기록들은 일제의 식민화 과정에서 약탈되어 갔을 의혹이 짙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을 '소설'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광개토대왕릉비가 전하는 역사와 너무도 동일하기에 그 원본이 [유기]일 가능성 또한 높다는 것이다.
헌법학자 이석연, 역사작가 정재수 선생은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 '영락대제기'와 '장수대제기'를 다시 돌아보는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2022)을 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류 '사대주의' 역사관을 벗어나 대륙의 제국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세우고자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과 유물, '수성군주 장수왕'의 치세 및 외교와 유물 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영락'을 연호로 한 '영락대제'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기록한다. 때는 광개토왕 사후 2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을 통해 왕위계승을 확정한 장수왕에 의해서 414년에 국내성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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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의하면 압록강변의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다. 북부여에서 독립한 '주몽(추모)'의 졸본성(환도/해성)과 유리(유류)왕의 위나암성(철령), 그리고 장수왕이 천도한 5세기의 한반도 평양성이 역대 고구려의 수도였다. 길림(집안)의 국내성은 수도가 아니라 왕릉의 집합도시인 네크로폴리스(nekropolis : 死者의 도시)였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부터 아버지 소수림왕, 삼촌인 고국양왕을 비롯하여 광개토왕 본인은 물론 아들 장수왕의 무덤과 이들을 지키는 수묘인 일가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국내성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의 7대 외적 중 '백잔(百殘)'과 '왜잔(倭殘)' 등이 나온다. '백잔'은 고구려가 원래 같은 핏줄이었던 백제를 비하하는 말이고, '왜잔'은 '왜적'과 비슷해 보이나 실상 백제다. 그 외 '비려', '백신', '신라', '가라(임나)' 등도 나오는데, '비려'는 부여의 잔여세력, '백신'은 이후 여진족의 조상 숙신족, 나머지는 '신라'와 '가야(임나/가라/아라)' 등이다. 그 중 '왜잔'은 일본 열도의 '왜적'이 아니라 전술했듯 충남 이하의 백제 세력이다. 즉, 백제는 4세기 말 아신왕 때에는 지금의 서울 하남지역인 '한성백제'와 충남과 전라도 일대를 아우르는 '부여백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세기초 백제 근초고왕 시기였던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는 고구려가 위나암성을 중심으로 서북방 정벌을 시도했으나 성과가 크지 않았다. 그러던 중 4세기말 광개토왕의 첫번째 정벌이 '비려' 정벌이다. '비려'는 고조선 이전 '고리국'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부여족 일파들이다. 광개토왕에게 쫓겨난 '비려' 사람들이 바로 '부여기마족'인데 이들이 한성백제의 아래로 이주하여 '부여백제'로 정착한다. 이 '부여백제' 세력이 바로 '왜잔국'이다. 이들이 토벌된 후 충주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다시 고구려에 의해 쫓겨난 '부여백제' 지배층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세웠고 이 '야마토' 세력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아마도 패잔세력으로서 일본 후쿠오카와 오사카 등지로 건너가 7세기 후기에 '일본'을 세운 '야마토(大和)' 정권일 것이다. 한편, 광개토왕이 그 다음으로 정벌한 '백신'은 신라 정권의 뿌리였을 수도 있는데,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의 '김'씨 정권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손인 숙신 세력이 내려와 석씨 정권을 몰아내고 김씨 세습왕조를 세운 결과다. 한참 후 여진족의 국명이 '금(金)'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용의주도한 광개토왕은 '백신'을 먼저 토벌하고는 신라를 복속시킨다. 또한 광개토왕은 5만의 정병을 남쪽으로 보내 진짜 '왜구'인 일본의 '왜적'을 진압하면서 '고구려-신라' 연합 대 '부여백제-가야-왜' 연합의 전선을 형성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요동과 한반도를 둘러싼 '고구려-한성백제-신라'의 주류세력과 '비려(부여기마족)-부여백제-가야-왜'의 패잔세력의 거대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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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은 물론 한반도 일대, 나아가 일본 본토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은 그러나 재위 20여 년만에 멈춘다.
2. '수성군주' 장수왕 고거련
"장수왕의 대외정책 '4대 원칙'이다. 1) '원자교지(遠者交之)', 멀리 있는 자와 교류한다, 2) '근자공지(近者功之)', 가까이 있는 자는 공격한다, 3) '접자할지(接者割之)', 붙어있는 자는 떼어낸다, 4) '이자근지(離者近之)', 떨어진 자는 가까이 둔다. 이 원칙은 대외정책의 전술적 핵심가치들이다. 또한 기록은 전략적 비전도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 장수왕의 미션('부국강병':富國強兵)은 광개토왕의 미션과도 일맥상통한다. 광개토왕의 미션은 '국부민은(國富民殷)'이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부유하다. 다만 지향점은 다소 차이가 있다. 광개토왕은 '부유한 백성(民殷)'에, 장수왕은 '강성한 군대(強兵)'에 방점을 둔다. 장수왕의 수성은 외교와 정복을 병행한 '능동적 수성(守城)'이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2-1. 수성군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2022.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이름은 '거련'이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부터 태조왕 전까지는 북부여(해모수)와 동부여(해부루)의 왕족인 '해'씨였다. 태조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는 '고'씨였으니 광개토왕은 고담덕이고 장수왕은 고거련이었다. 남당 선생의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에 의하면 98세까지 산 장수왕 고거련은 늙을 수록 아버지 고담덕이 아닌 삼촌 고용덕을 닮아갔다고 하는데, 광개토왕 담덕의 둘째 부인 평양왕후와 담덕의 동생 용덕이 사통한 결과 장수왕 거련이 태어났을 것이란다. 또한 어느 스님이 바친 동자모양 산삼을 광개토왕 대신 아들 거련이 먹은 게 장수의 비결이라고도 하는데, 본인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 광개토왕이 다른 태자를 세웠으나 그 탑태자가 요절하면서 천익이라는 장수왕 삼촌이 찬탈했던 2년 동안 장수왕 거련이 이를 타도하고 실력자로 부각되면서 고구려의 제위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들을 인용한 [삼국사기]는 장수왕 기록을 조공의 역사로 남긴다. 모든 역사서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되므로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5호16국 및 남북조와 교류한 중국과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공'의 기록이 된다. 반면에 마찬가지 논리로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는 '조공'이 아닌 '외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수성군주' 장수왕은 '수성'만 한 게 아니라 '정복'을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는 장수왕의 대외정책 전략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과 달리 '남하정책'을 폈다지만 그래도 중국의 북연을 흡수했고 몽골의 선조인 '지두우'와 '실위'를 분할하고 정복하기도 했으며 5천 킬로미터 서방의 '선선(누란)'과 외교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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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년)를 국내 정치세력의 정리 및 국내외 지리적 여건 등 네 가지 요소로 들고 있다. 그러나 4~5세기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요서와 요북 및 서북 등지의 북방 유목민들이 지속적으로 중국쪽으로 남하한 것처럼 요동의 다민족적 고구려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한 것 또한 이 시기 소빙하기 기후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의 스님이 광개토왕 담덕에게 바친 동자승 모양 산삼이 의심스러워 친아들이 아닌 장수왕 거련에게 먼저 먹였을 수도 있겠다. 처음 산삼을 먹은 거련이 정신을 잃자 담덕은 그 스님을 죽이려 했는데 곧 나아질 거라는 말에 지켜보니 거련은 멀쩡해졌고 나중의 일이지만 담덕은 39세에 죽은 반면 거련은 98세까지 장수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고구려의 새로운 역사를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서 '태왕차자릉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를 잇는 '태왕차자릉비'의 유적물 일체를 통해 [유기]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태왕'의 '차자', 즉 둘째아들은 '광개토왕 담덕'(태왕)의 차자 '장수왕 거련'이 아니라 '소수림왕'(태왕)의 둘째아들인 '용덕'이다.
광개토왕 담덕의 동생 용덕은 장수왕 거련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남당 선생의 필사본들은 정식 역사가 아니라 한문소설가 박창화 선생의 창작물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단다. [화랑세기]가 그렇고, [유기]의 요약본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 또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차자릉비'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유적물과 일치한다는 기록으로서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작을 재차 생각하며 다시금 물어본다.
과연, [고구려사략] 또한 '위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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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2.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4.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5. [고구려왕조실록] / [백제왕조실록] / [신라왕조조실록], 이희진, <살림>, 201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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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신 : 좋은 내용의 책인데, 오자가 좀 많은 편이니 저자 및 출판사의 관심과 수정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