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
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슈테판 클라인, 2021.
"하지만 '프로메테우스'가 역사적 인물이 아닌 것처럼 천재 숭배 역시 현실에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최신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창조성'은 몇몇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재능이 아니다... '창조적 사고'는 인간 이성의 기본능력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의 이성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는 개인적인 자질보다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소통하고 교류하는가에 달려있다. '창조성'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펼쳐지기 보다는 타인,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생산적으로 만나는 가운데 펼쳐지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새로운 착상을 빚어내는데 필요한 정신적 재료와 연장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들어가는 말>, 슈테판 클라인, 2021.
'행복'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라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아닌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100% 동물'이라는 전제 하에 수억년간 '생존과 번식'을 위해 각 시기 '행복'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이용하면서 지금까지 종을 유지해 왔다는 거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73
독일의 생물물리학 박사 슈테판 클라인(Stefan Klein)은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를 통해 인간의 '집단적 뇌'가 수백만년 동안 진화해온 과정을 총 <4부>로 나누어 고찰한다.
이는 인류 역사에서 4차례의 '혁명적 사건'을 기준으로 하는데, <1부>는 인류가 이동생활을 하던 330만년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뗀석기(주먹도끼/돌칼)'로 표현되는 물질적 영역, <2부>는 인류 정착 후인 1만년전부터 '상징'적 사고인 신화와 예술로 대표되는 정신적 영역, <3부>는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세계교류를 통해 인류의 뇌가 연결되고 창조적 사고가 세계화되는 과정, 마지막 <4부>는 컴퓨터와 이동통신기계, 인공지능을 통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영역이다.
슈테판 클라인은 '구텐베르크'로 불린 금속세공사 요하네스 겐스플라이슈(Johannes Gensfleisch), 콜럼버스와 코페르니쿠스, 아인슈타인과 스티브 잡스 등 인류 진화사에서 '창조적 사고'를 대표하는 인물들을 언급하고 있지만, 실은 이 천재들의 뇌가 특출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지능이 '창조'적으로 발휘되게끔 했던 인류 역사상 '집단적 뇌'(같은책, <1-3>)에 주목한다.
소수의 '천재'가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불'만큼이나 신화적이라는 말이다.
330만년 전 '르메크위'라는 곳에서 실용적이고 심미적이기까지 했던 '뗀석기'의 '창조성'이 등장하기까지 인류는 역시 300만년 이상을 척박한 자연에 적응해야 했다. '상징'과 정교한 '언어'로 공동체를 꾸려나가기까지 또한 그만큼의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인류의 '집단적 뇌'가 오랜 세대를 통해 전승되는 공시성은 물론 동시대의 '집단적 뇌'를 연결시키는 통시성을 획득한 계기는 단연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이것의 확산을 통해 글을 접하고 읽을 필요성을 느꼈던 수많은 다수 민중들의 실천이었다. 1430년대 성지순례자들로부터 성지의 신성한 빛을 담아올 청동거울을 만들어 팔기 위해 목재 프레스기계를 주문 제작한 구텐베르크의 동기는 물질적 '이익'이었다. 흑사병으로 사업은 실패했고 이 목재 프레스기계로 어떻게 20여년 후 성경을 대량인쇄할 발상을 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인쇄술의 '영웅'의 사업실패로 인해 오히려 인쇄술은 다수가 공유할 수 있었고 그만큼 더욱 자유롭게 널리널리 퍼져나갈 수 있었던 역설 또한 이 '창조성'의 역사 속에 도사리고 있다.
결국 문자와 책은 말과 달리 증발되지 않고 공시적이고 통시적으로 인류의 '집단적 뇌'를 혁신적으로 연결하며 진화시켰다.
이제 컴퓨터와 기계에 의한 '혁명'은 단기간에 이루어졌고 그 기간은 앞으로 더욱 단축된다.
"두뇌는 5억년 이상의 진화를 거치면서 유기체의 존속과 번식에 기여하도록 발달해 왔다. 이것이 인간의 지성과 기계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다. 컴퓨터는 문제해결, 두뇌는 생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뇌의 작동원칙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모든 행동은 유익하다고 보는 것이다... 컴퓨터에는 특정한 목표가, 반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창조'적 사고가 인간을 자연계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사고에 식량과 후손으로 보답한 자연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 남았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0. 예언과 현실>, 슈테판 클라인, 2021.
그러나 저자는 이 '기하급수적인 발전'(같은책, <1-2>)을 이루는 로그 척도 도표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명확한 관점을 유지한다. 즉, 단지 연산능력이 인간보다 빠를 뿐인 컴퓨터와 경우의 수 확률데이터로 그 능력이 확장된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창조적 사고'의 유구한 역사를 압도할 수는 없다는 희망적인 주장이다. 인류라는 종에게는 수백만년, 전 생명체로 보면 5억년 동안 진화해 온 생물학적 뇌의 장대한 역사를 보았을 때, 특정 '목표'에 맞춰 프로그램 되어진 컴퓨터 등의 '4차 혁명' 요인들은 오랜 기간 진화를 거듭한 인간 '집단적 뇌'의 '자유'를 따라올 수 없다. 인간은 '행복'과 같은 '감정'을 통해 이 '창조적 사고'의 혁명적 진화를 가능케 해왔고 앞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인류에게는 생각과 사상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 관건이다.
단, 종의 존속을 위한 조건이 있다.
지구와 자연을 더이상 파괴시키면서까지 필요 이상의 욕심을 부리면 안될 것이며,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다.
이것이 현재 '삶의 자세로서의 창조성'(같은책, <4-11>)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 무엇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모든 것을 실험할 준비가 되어있는 '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본다. '창조성'은 재능이 아니라 삶의 자세다.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것은 '창조성' 덕분이다. 인류의 역사는 우리 조상들이 서로에게 배우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경험자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후손에게 전해주었기에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 <4-11. 세상을 변화시키는 법>, 슈테판 클라인, 2021.
***
1. [창조적 사고의 놀라운 역사](2021), 슈테판 클라인, 유영미 옮김, <어크로스>, 2022.
2. [행복의 기원 - 생존과 번식, 행복은 진화의 산물이다], 서은국, <21세기북스>, 2021.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2751833646&navType=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