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파괴'의 '기업가 정신'?
'창조적 파괴'의 '기업가 정신'?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요제프 슘페터, 1942.
"나의 역설적인 결론이란 바로, 자본주의는 그 '눈부신 성취'로 인해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 J. 슘페터,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초판 서문>, 1942.
얼핏 읽으면 마치 마르크스의 말 같다.
자본주의는 그 체제 자체에 붕괴의 씨앗(맹아)을 품고 있다는 그 유명한 '최초의' 예언.
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소수 독점으로 인해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 노동계급을 양산하고 소수의 부르주아지 자본가계급의 착취로 인해 이 다수의 '궁핍화'가 심화되면, 건곤일척의 격렬한 '계급투쟁'이 재앙처럼 만연하고 소수 자본가에 의한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다수 노동계급에 의한 생산의 사회화의 모순이 깊어져 결국 자본주의가 붕괴된다는 철학적이고 경제학적이며 역사학적인 논리를 19세기 인류에게 '최초'로 선사했다.
20세기에 들어 고전주의 '노동가치론'에 대항한 '한계효용론'의 발견과 정밀한 사회과학으로서 '경제학'이 발전하기 시작했지만, 19세기의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본인의 사상을 고전 정치경제학의 전통에 따라 여전히 '정치경제학'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위에 인용된 이 문장은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결코 '과학적'이지 않다고 비판했던 20세기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1883~1950)의 주장이다.
자본주의 '생산 엔진'의 역동성을 강조하는 슘페터는, '유효수요' 거시경제학의 대가 케인즈와 함께 마르크스 이후의 20세기 경제학에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에 미국 하버드대 교수로 생을 마감한 20세기 '천재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는 '귀족'적이었고 보수적이었으며, 마르크스를 존중했지만 그의 논리가 오류임을 증명하려 했고 동갑내기 케인즈를 평생 의식했다.
자본주의가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변혁을 이루어 나가는"(같은책, <1-3>) 그 자체의 '역동성'으로 인해 멸망한다는 결론은 마르크스와 비슷하나, 자본주의는 결코 마르크스가 예측한 대로 '다수 프롤레타리아만을 양산하면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계급투쟁'만으로 현상하지 않았을 뿐더러 더욱이 그들 노동계급을 '궁핍화'시키지도 않았다고 슘페터는 주장하면서 경제학자로서 "사실의 길을 따라(via facti)"(같은책, <옮긴이의 말>) 증명하려고 한다.
"자본주의 엔진을 작동시키고 유지하는 근본적 충동은 새로운 소비자 물품, 새로운 생산이나 수송방법, 새로운 시장, 기업이 창조하는 새로운 산업조직 등에서 나온다... 이 과정은 '내부로부터' 경제구조를 혁명적으로 꾸준히 변화시키면서,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이 자본주의의 핵심적 사항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고, 모든 자본주의적 회사들이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 J. 슘페터, 같은책, <2-7. 창조적 파괴의 과정>, 1942.
1950년에 심징마비로 급사하기 전 미국 경제학회의 강연에서 슘페터는 "나는 사회주의자를 옹호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그가 평생 오류를 지적하려던 마르크스주의와 역설적이게도 동일하게 자본주의가 멸망하고 사회주의로 '전진'한다고 예측했지만, 이는 슘페터가 '사회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20세기 초중반 자본주의를 분석하다보니 불가피하게 "도출된 추론"(같은책, <4-23>)이라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고 슘페터가 활동하던 미국이 이제 본격적으로 전쟁에 개입하려던 1942년부터 그가 사망하기 한 해 전이었던 1949년까지 슘페터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라는 대표적인 대중서를 꾸준히 증보하고 발표했다.
이 책의 <1부>에서 슘페터는 "미래 예측의 경제이론을 구체화한 최초의 인물"(같은책, <1-3>)인 '마르크스의 이론'(같은책, <1부>)을 '예언자'(<1-1>), '사회학자'(<1-2>), '경제학자'(<1-3>), '역사가'(<1-4>)의 측면에서 살펴보며 마르크스가 예측한 자본주의 특성으로서 '계급투쟁'과 '다수의 궁핍화'가 사실(facti)과 다르다는 점을, 적어도 19세기 마르크스 생전은 몰라도 20세기 당시 슘페터의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틀렸다고 수차례 강조한다.
'자본주의'를 다룬 이 책의 <2부>에서 슘페터는 자본주의 경제학자이면서도 전혀 자유주의적이지 않게 시장의 '완전 경쟁'을 부정한다.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추구하나 이를 '자유 시장'이 아닌 대기업 독점과 관료제의 '효율성'을 통해 구현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의 필연적 '독점화' 현상을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 '제국주의'로 규정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다르게, 슘페터는 자본주의가 이 대기업 독점과 관료제의 '효율성'으로 인해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스스로 '창조적 파괴'와 '혁명'적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고 본다. 이들 '창조적 파괴'(같은책, <2-7>)의 '기업가 정신'(같은책, <2-9>)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주식회사' 같이 '자본가'로부터 분리된 소유 체제가 '사적 소유'를 본질로 하는 자본주의를 '내부로부터' 변혁시키고 '국유화'로 전환되는 '사회주의'로 이행시킨다는 예측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배경은 19세기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과 '다수의 궁핍화'가 아니라, 대기업 독점자본의 생산력 발전으로 자본가 1인 소유가 제한되는 한편 부르주아의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거나 실제로 부유해지는 노동자들과 제1~2차 세계대전 이후 '국영화(국유화)'와 누진세 등으로 정책전환하는 20세기 자본주의 현실에 두고 있다.
슘페터는 20세기에 세계를 장악한 자본주의가 정치경제 체제를 넘어 이미 "문명"(같은책, <2-11>) 자체라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든 기타 체제든 분명 붕괴한다"(같은책, <1-4>)는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슘페터 역시 '자본주의 멸망'을 예언한 점도 있다. 어쨌든 20세기에 자본주의 종언을 예측한 슘페터의 사상은 마치 '21세기 럭셔리 공산주의'를 선언한 현재의 미국 사회사상가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과 흡사하다. 공공의 생산재를 모두가 무상으로 공유하는 21세기 자본주의는 '완전히 자동화된 럭셔리 공산주의(사회주의)-FALC(Fully Automated Luxury Communism)'의 기본 배경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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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주의 사회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배 자본주의 사회가 남겨놓은 풍요로운 환경-경험, 기술, 자원 등-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결정에 따르는 '불확실성'(은)... 사회주의 경제에서 거의 완전하게 사라져 버릴 것이다."
- J. 슘페터, 같은책, <3-16. 사회주의 청사진>, 1942.
'사회주의'에 관해 서술한 이 책의 <3부>에서 슘페터는 '사회주의자'에 다름 아니다. 그가 자본주의 본질적 특성으로 정리한 이 모든 문구들, 즉 대기업 독점과 관료제의 '효율성'으로 인한 '창조적 파괴'의 '기업가 정신'으로 자본주의는 생산발전을 이루지만 '계획경제'일 수가 없기에 "불확실성"(같은책, <3-16>, <3-17>)을 노정한다. 슘페터는 소비에트연방을 '사회주의'로 보지 않는다. 스탈린주의는 제2차 대전에서 '파시즘'과 싸워 이긴 승전국임에도 슘페터에게는 또 다른 '차르 전제권력'이자 '파시즘', '제국주의'에 불과하다. 물론, 영국과 미국을 찬양하던 슘페터로서는 불가피한 관점이기도 하다. 슘페터가 보기에 마르크스주의 대중정당인 유럽대륙의 사회민주당보다는 영국 노동당의 전후 국영화 정책이 더욱 '사회주의'적이다. 한편으로 북유럽 스웨덴 사회민주주의는 보편적 형태도 아닌 그 지역만의 특성으로 치부된다. "정말로 그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스웨덴 사람들을 수입하여 그 일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같은책, <5-26>)는 참신한 개그가 북유럽 사민주의에 대한 슘페터의 논평이다.
결코 '사회주의자'일 수 없는 슘페터에게 '사회주의'는 유럽의 마르크스주의 또는 '과학적 사회주의'로, 심지어 북유럽 사민주의로 한정되어서는 안되었다.
자본주의가 어쩔 수 없이 이행하는 '사회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변신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신화 속 신 '프로테우스'(같은책, <3-15>)가 되어야 했다.
자본주의 '불확실성'을 제거해야 하는 슘페터의 '사회주의' 자체가 '불확실'하다.
그렇게 슘페터는 이 책 <4부>의 '민주주의' 문제로 넘어간다. 슘페터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목적"이나 이상이 아니라 당대 현실 속 "하나의 정치적 방법"(같은책, <4-20>)에 불과하다.
20대에 이미 스승들로부터 "신들로부터 받은 위험한 선물"(같은책, <옮긴이의 말>) 같은 재능을 지녔다던 천재 경제학자 슘페터는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낮게 평가한다. 직접 민주주의가 구현될 수 없는 현대 정치에서 불가피했던 20세기 대의 민주주의는 '국민'의 "지적 수준을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뜨린다"(같은책, <4-21>). 이런 현상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선동'을 통해 '국민'을 호도하고 '마르크스주의' 같이 '폭력'과 '혁명' 따위를 퍼뜨린다는 것이다. 천재 슘페터에게 민주주의는 체제를 변혁시키는 무기가 아니다. 그에게 체제 전환은 대중이 주체가 되는 '혁명'의 실천이 아니다. 슘페터에게 오로지 유일한 '변혁'은 자본주의 '합리성'과 대기업 독점 및 관료제의 '효율성'에 기반한 '창조적 파괴'의 '기업가 정신' 뿐이다.
'신이 내린 위험한 선물'인 천재 슘페터에게 '계급투쟁' 대신 "계급들의 공생"(같은책, <2-12>)만이 보이고, '계급' 대신 "국민의 의지"(같은책, <4-22>)를 위해서는 '민주주의'는 필수가 아닐 수도 있으며,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필연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같은책, <4-23>). '사회민주주의'든 '민주적 사회주의'든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는 반드시 함께 작동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기업 독점과 관료제의 '효율성'이 체제 변혁을 '선동'하는 '민주주의'보다 더 '국민의 의지'를 반영할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우연이 아니다.
"결국 사회주의 경제의 '효과적 관리'는 '공장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니라 그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를 의미한다."
- J. 슘페터, 같은책, <4-23. 도출된 추론>, 1942.
자본주의 체제를 변혁하는 '창조적 파괴'의 주체를 불안정한 노동조건 속에서 착취당하는 다수 노동계급이 아니라 '기업가 정신'으로 대체하면서 자본의 논리를 은폐하려던 슘페터는 19세기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한편, 20세기 초중반 당시 경제학자도 아니면서 '천재 경제학자'인 본인보다 더 유명해진 케인즈를 자본주의 생산발전을 회의적으로 의심하는 "정체론자"(같은책, <4-28>)로 규정하며 역시 비판한다.
비록 '사회주의'를 마지 못해 인정하게 되었지만, 그나마 케인즈주의 또한 마르크스주의 못지 않게 깔아뭉개 줘야 천재 경제학자인 슘페터 본인이 유일한 '천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다.
동의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는 주장을 읽느라 힘들었다. 역시 내게 '경제학'은 재미가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남은 것은 한 가지 있다.
다음 읽을 책으로 '천재 경제학자' 요제프 슘페터가 그리도 견제하고 싶어했던, 경제학자도 아니면서 그 분야에서 또 다른 천재로 인정받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의 대표작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1936)을 선택한 것이다.
둘 다 마르크스주의를 싫어했지만,
왠지 케인즈는 슘페터보다는 읽어줄 만 할 것 같다는 기대와 함께 이제 책장을 열고 케인즈의 말을 직접 한 번 들어봐야겠다.
***
1.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1942), Joseph Alois Schumpeter, 이종인 옮김, <북길드>, 2016.
2.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ployment, Interest and Money](1936), John Maynard Keynes, 조순 옮김, <비봉출판사>, 1985~2020.
3. [21세기 공산주의 선언 - FALC](2019), 아론 바스타니, 김민수/윤종은 옮김, <황소걸음>,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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