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기원전 1~2세기
'롤모델'을 찾아보다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기원전1~2세기.
1.
2016년 말.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서 떨어졌다.
혼자 점쳐본 주역 괘가 온통 물에 빠진 불길하고 곤란하였지만, 누구보다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2017년 초.
처음 며칠 동안은 책상 밑에서 통화를 했다.
6년 간 노조 전임자를 마치고 돌아온 현업에서 나의 업무전화를 누가 들을까 왠지 부끄러워 통화하다가 나도 모르게 책상 아래로 고개를 쳐박고 전화기 너머 상대에게 속삭였다.
물론 첫 한 달이 그랬고 그 다음달 적응 후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나는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생산성'에 집중했다. 매월 20일 일한다 생각하고 하루에 무조건 다섯 건 이상 처리하고 퇴근 후 싹 다 잊기로 했다. 손해사정사로서 보험금 '손해사정' 업무도 중요하지만 나는 하루 다섯 건 이상 '문제해결'을 위해 출근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업무시간에는 무조건 일을 많이 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이 끝나면 업무용 휴대폰은 끈 채 업무는 아예 잊고 취미생활이자 내 유일한 소일거리인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어떤 동료들은 내게 말했다.
이제 노조 '색깔'은 벗고 열심히 해서 팀장을 목표로 해보라고.
그에 대한 내 대답은 한결 같았다.
누가 날 그런 걸 시켜주겠는가. 난 하루를 살아도 쪽팔리게 살긴 싫다고.
그러던 중 아는 부장형님이 또 말했다.
그래도 놓지는 말아라, 용원아...
그렇게 말해주는 몇 분 선배들의 격려 덕이었을까.
고령의 부친이 폐암말기 진단을 받고 한달 후, 중학생 아들이 공부를 내 생각보다 훨씬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혼자 세상 스트레스 다 받던 그 시기에 경기도 오산의 보상사무소 팀장으로 발령받게 되었고, 나는 병든 아버지와 어머니께 큰 절을 올렸다.
2.
"한신이 말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선생이 보기에 과인의 관상은 어떻습니까?'
괴통이 대답했다.
...
'장군의 관상을 보니 제후로 봉해지는 데 지나지 않으며, 게다가 위태롭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장군의 등을 보니 귀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 한나라 왕(유방)과 항왕(항우)의 운명은 당신(한신)에게 달렸습니다. 당신께서 한나라를 위하면 한나라가 이기고 초나라 편을 들면 초나라가 이길 것입니다...
... 들짐승이 다 없어지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게 마련입니다(兎死狗烹).'"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보상센터장으로 불리는 손해보험회사 팀장으로 일한지 1년이 되는 시기에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떤 인물을 '롤모델(role model)'로 삼을까.
역사를 좋아하니 거창하게 5천년 인류 문명사에서 톺아보려 했지만 표본으로 삼고 싶은 대상이 너무 많았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가 가장 존숭하는 인물 삼봉 정도전으로 해볼까. 너무 혁명적이고 비타협적이다.
대중적인 충무공 이순신으로 삼기에는 장군의 공적과 품격은 너무 높다. 무엇보다 내가 따르기엔 인기가 너무 좋다.
한고조 유방이나 광무제 유수, 송태조 조광윤 또는 명태조 주원장 같은 황제나 왕, 레닌이나 마오쩌뚱 같은 혁명지도자들을 삼기에는 내 그릇이 미치지 못한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인물이 바로,
기원전 3세기 중국 항우와 유방의 건곤일척 초한전쟁 시기 한왕 유방 진영의 대장군 한신(韓信)이다.
물론, 사마천 [사기]에서 기록하듯,
'토끼를 잡으면 사냥개를 삶는다'는 뜻의 고사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의 말로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공'과 '실패'를 결말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그 인물이 역사에 기여한 바를 볼 일이다.
그것이 내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삼봉 정도전을 꼽는 이유인데, 솔직히 직장업무를 삼봉처럼 할 자신은 없다.
( 서한삼걸(西漢三杰) - 한신, 장량, 소하 )
그렇게 나는 팀장 롤모델로 한나라 대장군이자 좌승상이며 중국 전한 시기 유방을 도와 천하를 제패한 장량과 소하 등과 함께 '서한삼걸(西漢三杰)'로 불리다가 '반역자'로 생을 마감한 제왕(齊王)이자 초왕(楚王), 회음후(淮陰侯) 한신(韓信)을 떠올렸다.
( 젊은날의 한신 )
"회음후 한신은 회음 사람이다.
처음 평민일 때에는 가난한 데다 방종하였으므로 추천을 받아 관리도 될 수 없고,
또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어 늘 남을 따라다니며 먹고 살아 사람들이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한신은 강소성 회음 출신에, 가난했지만 뜻은 커서 항상 큰 칼을 차고 여기저기 다니며 빌어먹었다고 한다. 아마도 몰락한 귀족 집안 출신이었을 수도 있겠는데 나중에 항우를 제압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으로부터 군대를 빼앗기고는 제왕에서 초왕이 되어 고향에 부임한 후 본인에게 밥을 준 아낙네는 물론 시장바닥에서 자기를 가랑이 사이로 기게 했던(과하지욕;袴下之辱) 양아치한테도 상을 내렸다. 지금의 본인을 있게 한 보은이라기보다는 아량넓은 복수였겠다.
약 2세기 후 한신의 일생을 [사기]의 <회음후 열전>으로 기록한 사마천은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했다는데 한신의 고향 회음까지 찾아가서 그 지역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기반으로 한신이 '겸양하지 않고' 원래부터 거만하여 천하를 통일한 초한전쟁의 승자 유방에게 어리석게 반역했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나는 절대권력자가 된 한고조 유방이 한신으로 하여금 모반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으로 본다. 한신이 제니라 왕이었던 시절의 모사 괴통의 말대로 항우라는 사냥감이 사라지니 이를 쫓던 사냥개 한신을 삶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의 표본이 된것이다.
이는 한신이 아니라 유방의 권력욕에 기인한 것으로 나는 평가한다.
한고조 유방의 나이는 정확하지 않다.
초한전쟁의 승자가 되어 황제가 된 것이 오십세에서 육십세 정도로 보는데 항우가 서른 둘에 죽었으니 둘의 나이차는 최소 18년 정도 될테고 항우보다 네살 정도 어린 것으로 추정되는 한신은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단다.
참고로 중국 역사가 리카이위안의 [초망]에 따르면 당대 주요 인물들의 출생년도는 아래와 같다.
- 진승상 이사 : 기원전 280년생
- 진시황 영정 : 기원전 259년생
- 한고조 유방 : 기원전 256년생 (조고와 동갑)
- 풍신객 장량 : 기원전 254년생 (기원전 260~250년 사이 추정)
- 초패왕 항우 : 기원전 232년생
- 대장군 한신 : 기원전 228년생
https://brunch.co.kr/@beatrice1007/224
( 한신 - 이문열 초한지 삽화 )
"유방은 제후의 군사들과 함께 초나라 군대를 공격해 항우와 해하에서 겨루었다. 한신이 삼십만 군대를 이끌고 직접 대결하니 공장군(공총)은 왼쪽에, 비장군(진하)은 오른쪽에, 유방은 뒤에 있고 주발과 시장군(시무)은 유방 뒤에 있었다. 항우의 병사는 대략 십만 명이었다. 한신이 먼저 초나라 군대와 교전했으나 불리해 물러났다. 공장군과 비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자 초나라 군대가 불리해졌는데 한신이 이때를 틈타서 다시 공격해 해하에서 (초나라 군대를) 크게 쳐부수었다.
항우는 한나라 군대가 초나라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서(四面楚歌), 한나라가 초나라 땅을 전부 차지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항우가 싸움에 지고 달아났으므로 초나라 병사가 크게 패한 것이다...
... 유방은 노공의 호칭으로 항우를 곡성에 장사 지냈다. 돌아와 정도에 도착하자마자 말을 몰아 '한신의 군영으로 들어가' 그 군대를 빼앗았다."
- [사기], <고조 본기 - 한나라 5년>, 사마천.
위 내용은 한고조 유방의 일대기인 [사기] <고조 본기> 기사이다.
"한나라 왕이 고릉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장량의 계책을 써서 제나라 왕 한신을 불렀다. 한신은 군대를 이끌고 해하에서 한나라 왕과 만났다. (한나라 5년) 항우가 패하자 고조 유방은 '제나라 왕(한신)의 군사를 습격해서' 빼앗았다."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이상은 한신의 일대기인 [사기] <회음후 열전>의 기록인데, 원래 대왕급인 제왕이나 초왕이었더라면<세가>에 실었겠지만 사마천은 제후급인 회음후로 생을 마친 한신에게는 박하게도 일반인과 같은 <열전>에 실었다.
진나라에 대항하여 최초로 반역의 깃발을 든 진승은 오히려 <진섭 세가>라 하여 제후나 왕 급의 <세가>로 편집한 사마천은,
참고로 집필 당시 어용 편찬이 아니었던 [사기]를 지으면서 한고조 유방의 최대 적수이자 대왕급인 항왕 항우를 한나라 황제들과 동급인 <본기>로 분류하는 파격을 보이고 있다.
아마도,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귀향 및 권토중래를 포기하고는 오강에서 자결한 항우의 심경에 사마천이 크게 공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릉을 변호하다가 한무제로부터 궁형의 치욕을 받은 사마천이 [사기]를 통해 묻고 싶은 질문이 "하늘의 도는 과연 존재하는가?"였다.
사마천은 한신에게는 감정이입을 전혀 하지 않은 듯 한데, 항우로부터 중용되지 못했던 한신은 유방의 진영으로 귀순하였으나 크게 쓰이지 못하다가 승상 소하의 강력 추천으로 대장군으로 특진한다. 모두가 놀란 승진이었지만 '한중대(漢中對)', 즉 한왕 유방의 본거지 한중에서 한신은 한왕 유방과의 대담을 통해 유방의 전략을 실행할 수 있도록 했다. 의제를 시해하고 의리를 저버리며 민중들을 무자비하게 도륙한 동쪽의 항우를 주적으로 설정한 후 한신의 확장책을 통해 항우 고립책을 제안한 것이다. 즉 천하를 서쪽의 유방과 북동쪽의 한신의 두 세력이 중앙과 남동의 항우를 포위한다는 '천하삼분지계'의 원형인데, 아마도 한참 후 [삼국연의]에서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출한 제갈량의 '융중대'의 원형이기도 할 것이다.
이처럼 [초한지(연의)]는 [삼국연의]에 모티브를 많이 제공한다.
그렇게 한신은 한중땅을 나와서 옛날 진나라의 중심지였던 조-위-한의 삼진땅은 물론 북동의 연, 제나라땅을 제패하면서 유방의 영역을 넓히고, 팽성전투 등 항우와의 대전에서 크게 패한 유방에게 끊임없이 병력을 보충해 주었다. 또한 조나라땅을 접수할 때 펼친 '배수진(背水陣)'으로 유명한데([삼국연의]에서도 촉한의 재상 제갈량은 조위의 장수 서황을 상대로 '배수진'을 쓴다), 신출귀몰 병법의 비결을 묻는 수하 장수들에게 한신의 병력이 정예군이나 사대부조차도 못되는 오합지졸이라 '배수진'의 급박한 상황에서 목숨걸고 싸우게 한 병법의 하나라고 해석해 준다. 그 이유 또한 한신의 세력이 유방 군대의 '신병교육대' 역할도 했음을 시사한다.
그런 한신의 대군은 항우를 물리친 유방에 의해 단박에 접수되었는데, [사기]를 보면 <고조 본기>에서는 그냥 "빼앗았다"로 표현했지만 <회음후 열전>에서는 "습격해서 빼앗았다"로 적고 있다. 유방이 잠재적 경쟁세력 한신을 공격한 것이다. 이처럼 [사기]의 '기전체'는 역사적 진실을 은연 중에 교차시켜 보여준다. 후에 한나라 권력 눈치를 더 보던 반고의 [한서] 또한 [사기]를 베끼다 보니 한신을 공격한 유방의 행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6
https://brunch.co.kr/@beatrice1007/68
( 한중대(漢中對) )
"고조(유방)는 일찍이 한신과 함께 여러 장수의 능력을 마음 놓고 말하면서 각각 등급을 매긴 일이 있었다. 고조가 물었다.
'나 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 군대를 이끌 수 있겠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는 그저 10만 명을 이끌 수 있을 뿐입니다.'
고조가 물었다.
'그대는 어떻소?'
한신이 대답했다.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多多益善).'
고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면서 어째서 나에게 사로잡혔소?'
한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군대를 이끌 수는 없습니다만 장수를 거느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폐하께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이른바 하늘이 주신 바이니 사람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사기] <회음후 열전>에서 한신이 보여준 또 하나의 고사가 '다다익선(多多益善)'이다. 아마도 유방이 한신의 정예병력을 접수하고 제왕에서 초왕으로 전근시키고 또 다시 모반의 꼬투리를 잡아 대왕에서 제후급인 회음후로 강등시켜 감시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둘의 대화로 추정된다.
한신은 군대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유방은 대군을 이끌고도 큰 전투에서 패배를 일삼기도 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실무능력은 떨어져도 팀장들을 부려먹는 관리능력은 유방이 더 뛰어나며 더구나 황제의 자리는 '천명'을 받아야지 한신 본인에게는 불가능한 일임을 자조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한신의 입장에서도 항우나 사마천처럼 묻고 싶었을 게다.
"과연 하늘의 도는 있는가?"라고 말이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회음에 갔을 때 회음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말이 한신은 평민일 때에도 그 뜻이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고 한다.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가난해서 장례도 치를 수 없었지만 (결국) 높고 넓은 땅에 무덤을 만들어 그 주위에 집이 1만 호나 들어설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내가 그 어머니의 무덤을 보니 정말로 그러했다.
만약 한신이 도리를 배워 겸양한 태도로 자기 공로를 뽐내지 않고 자기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한나라에 대한 공훈은 주공, 소공, 태공망 등에 비할 수 있고 후세에 사당에서 제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려고 힘쓰지 않고 천하가 이미 안정된 뒤에 반역을 꾀했으니 온 집안이 멸망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 [사기], <회음후 열전>, 사마천.
사마천은 한신이 거만하고 어리석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신은 항우측 유세객 무섭과 제왕 시기 한신 진영의 책사 괴통이 한신 본인이 '한중대'에서 제시한 '천하삼분지계'를 구체적으로 실현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며 유방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결국에는 '반역자'가 되어 한나라 황제 유방의 묵인 하에 여태후의 간계에 넘어가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한신을 모반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한신의 어리석은 야망이라기 보다는 천하통일 후 잠재적 모반자들을 숙청하려는 유방의 권력욕이었다. 물론 유씨 권력의 욕심 한편에는 더 이상의 전란을 막겠다는 평화의지도 있었겠지만 정치권력에게 그런 '평화'는 명분이자 이데올로기일 가능성이 더 높다.
천하를 삼등분하여 한 축을 형성할 수도 있었던 시대의 실력자 한신은 절대권력자 유방이 숙청해야 할 최후의 적수였다.
3.
삶에서 성공과 실패를 당대에 평가할 수는 없다.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대인배 위인들이 소인배들에게 패배했던가.
남송의 명장 악비는 북방 금나라와 평화를 명분으로 협잡하던 간신 진회에게 당했지만 후세들은 악비를 칭송하고 진회에게 침을 뱉는다.
성웅 이순신 장군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도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지는 못했으나 우리 역사 최고의 명장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사마천의 냉정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내가 마침 팀장 1년차를 돌아보며,
'롤모델'로서 한신을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0
***
1. [사기(史記)], 사마천(司馬遷) /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2011. /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2. [한서], 반고, 이한우 옮김, <21세기북스>, 2020.
3.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4. [원본 초한지(서한연의)](17세기), 견위, 김영문 옮김, <교유서가>, 2019.
5. [이문열 초한지 - 큰 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 이문열, <동아일보 연재>, 2004~2005. / <민음사>, 2008.
6. [유방(劉邦)], 사타케 야스히코, 권인용 옮김, <이산>, 2005.
7. [사기와 한서], 오키 야스시, 김성배 옮김, <천지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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