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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ug 29. 2021

[초망(楚亡)](2015) - 리카이위안/김영문

[포스트-전국시대 : 2] "초나라는 멸망한다"

[포스트-전국시대 : 2] "초나라는 멸망한다"

- [초망(楚亡)](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수천 년 동안 '역사'는 중국인의 '종교'였다. 우리(중국인)에게 '성경'은 없지만 '고전'은 있다... 물을 거울로 삼으면 얼굴을 비춰볼 수 있지만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시대의 흥망을 알 수 있다([묵자]). 자신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으므로 거울에 비춰봐야 한다. 당대의 사실로는 당대를 인식할 수 없으므로 '역사'에 비춰봐야 한다. 사마천은 또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의 세상을 살면서 옛날의 이치를 기록하는 것은 스스로를 비춰보기 위해서다'([사기], <고조공신후자연표>)... 위대한 사마천은 자신의 생명을 '역사'에 쏟아부어 일가의 언어를 저술하는 가운데서 영생을 얻었다. '역사'는 그의 종교였고, 그는 '역사'의 사제였다."

- [초망], <후기 : 역사는 우리의 종교>, 리카이위안, 2015.



기원전 206년, 진(秦) 나라가 멸망했다.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학박사 리카이위안은 '초한전쟁' 무대였던 진말한초의 시기를 '포스트-전국시대'로 규정하며 '진나라 붕괴(秦崩)'의 과정을 서술했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의 이 '열전'은 '역사의 공백'을 메우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사마천의 후예로서 그는 생생한 현장답사를 통해 고대 문헌이 말하지 않는 '공백'의 '역사'를 '문학'적 서사로 채운다. "궁극적인 의미에서 모든 역사는 추측과 상상"([초망], <프롤로그>, <6-6>)이라고 말하는 리카이위안에게 "때로는 '문학'이 '사학'에 비해 훨씬 진실하다"([초망], <프롤로그>).


'역사'는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는 말은 오래된 은유다. '유가'의 공자가 지은 [춘추]부터 [묵가]는 물론, 사마천의 [사기]와 [구당서]의 <위징전> 등의 내로라 하는 역사책들이 전하는 잠언이다. '유일신'의 '종교'적 전통이 없는 동아시아에서 '신'은 '하늘'이었다. 유교에서 '천인합일'은 동양사상 궁극의 목표였다. 인간과 구분되는 '천상'의 신이 아닌 인간과 함께 호흡하는 '귀신'을 섬기는 제사의 전통이 있다. 신과 인간의 이분법이 아닌 자연만물과 인간사회의 공존의 철학이기도 하다. 기후위기로 자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지금,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우리를 포함한 동아시아인들에게 '역사'는 어쩌면 '종교' 대신이었고, 그만큼 '역사'라는 '거울'은 두고두고 닦아써야 했다. 그리고 고대 기원전 3세기의 중국역사를 [진붕(秦崩)](진나라의 붕괴)의 '거울'로 비춰보았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에서 진(秦) 나라의 뒤를 이은 '초(楚) 나라의 멸망'을 살필 차례다.

드디어 [초망(楚亡)의 시간이다.





"(초 회왕)의제의 죽음은... 진나라 말기의 대란 이후 잠시 부활된 '포스트-전국시대'와 왕정복고 시대의 종결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중국역사는 초나라와 한나라 양웅의 주도 아래 여러 제후국이 분쟁을 벌이는 시대로 접어든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말기의 '합종연횡'이 재현된 것과 같았다. 새로운 초한전쟁의 역사에서 항우는 초나라를 계승하여 '합종책'의 패왕이 되었고, 유방은 진나라를 계승하여 '연횡책'의 맹주가 되었다... 고국의 옛주군 초 회왕의 정통을 계승하는 것은 천하쟁패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자 처리해야 할 난제였다."

- [초망], <2-6. 의제의 죽음>, 리카이위안, 2015.



초(楚) 나라의 멸망은 비단 유방과 겨루던 초 패왕 항우의 몰락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나라가 6국을 병탄한 후에도 정복과 탄압을 그치지 않자 열국의 사람들은 진나라에 이를 갈았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시작되자 망국의 사람들은 복국을 외치며 '포스트-전국시대'를 열었는데, "진나라를 멸하는 것은 초나라"라는 참언처럼 반란군 지도자의 대부분은 초나라 사람이었다. 진승, 항우, 유방까지 모두 초나라 사람이었다. 그들이 '반진(反秦)'의 기치를 올렸을 때 반란군의 제도와 편제, 병력과 근거지 일체는 초나라의 그것이었다.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의 일족인 항씨 가문은 말할 것도 없고 '평민' 건달 출신인 유방도 그랬으며, 초 회왕(의제)이 선포했던 '포스트-전국시대'의 천하공약이자 계책으로서 '회왕의 약속(약조)' 또한 초나라 중심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초망(楚亡)]은 항우의 멸망이 아니라 '초나라 중심사상'의 종결이었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물론 대장군 한신으로 인해 유방이 초나라의 근간에 진나라의 사상을 접목하면서 초나라가 지양된 것이 바로 [초망(楚亡)]의 실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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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은 이미 황석공으로부터 [태공병법]을 전수받은 이후 천하통일의 대전략을 고민했고 유방이라는 그릇에 그 방략을 담고자 했다. 천하를 양분하는 건곤일척의 '초한전쟁' 전선을 최초로 그려낸 인물은 아마도 장량일 것인데, 이를 군사적으로 제안한 인물은 바로 한신이었다.





"'한중대(漢中對)'는 초나라와 한나라 쟁패의 역사적 기점이었다. 유방 집단은 이때부터 북상하여 삼진을 다시 평정하고, 동쪽으로 나아가 천하를 쟁패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에 전개된 역사에 의거하여 살펴볼 때 '한중대'의 정확한 정책결정과 성공적인 추진력이야말로 유방 집단을 수동적 위치에서 주체적 위치로 전환시키고 연약함을 강력함으로 바꿔놓은 변곡점이었다. 나중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쟁취한 토대는 바로 여기에서 마련된 셈이다. 이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에서 제시된 전략결정 중 성공적인 모범으로 '한중대'를 손꼽으면서 제갈량이 유비에게 답한 '융중대'에 비견하고 있다."

- [초망], <1-7. 한중대>, 리카이위안, 2015.



삼국지에서 유비는 '삼고초려' 후 '융중'에서 제갈량으로부터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 계책을 듣는다. 삼국이 "솥발처럼" 서로 견제하며 자립하는 정세다. 유방보다 스물여덟살 정도 아래인 한신이 항우의 진영에서 나와 우여곡절 끝에 유방을 만나 기묘한 계책을 제시한 것이 훗날 '융중대'의 표본이 된 '한중대(漢中對)'였다. 소하와 하우영과의 면접 후 그들의 추천을 받았으나 유방은 신출내기 한신을 크게 중용하지 않았다. 항우처럼 자기를 중용하지 않은 유방에게 시위하듯 탈영을 하는 한신을 소하가 직접 다시 끌고오는 한바탕 쑈를 하고난 후 '한중'에서 한신이 유방에게 제시한 전략이 '한중대'다. 이를 전후로 소하의 적극 추천에 힘입어 한신은 스물셋의 나이에 유방군의 대장군이 된다. 아마도 '한중대'는 한신 개인의 의견이라기 보다는 한중에 갇혀 항우군에 비해 군사적 열세를 겪던 유방에게 장량과 소하 등의 중신들이 [손자병법] 등에 능한 '군사천재' 한신의 입을 빌려 제안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고립되었지만 풍족한 관서와 한중을 기반으로 관동의 항우와 동서로 대치하는 전선이 그어진 순간, 동남쪽의 초나라 문명은 이미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한신은 장량의 '천하양분지계(天下兩分之計)'를 바탕으로 유방이 관중을 나가 옛 진나라의 수도권인 삼진땅을 차지하는 '암도진창' 계책으로 '초한전쟁'의 천하양분을 실현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유방의 연합군이 항우군에게 몰살당할 때마다 신병을 보충해주는 화수분이었다. 유방이 팽성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후 한신은 전장을 북방으로 확장시켜 대장군 본인이 옛 조나라와 위나라는 물론 연과 제까지 평정하고 항우의 북방을 위협하는 전략을 또 다시 제시하고 실현한다. 모사 괴통의 '천하삼분지계' 제안에도 불구하고 한신은 끝까지 '천하양분지계'를 고수하다가 '토사구팽' 당하고 만다.

장막에서 큰 그림을 그리는 기획자 장량도 위대하지만 이를 군사적으로 현실화하는 대장군 한신이 누구보다 공이 큰 이유다. 전투시 후방보급과 국정운영을 한 소하와 책사 장량, 군신 한신이 한나라 건국 '3걸'이 된 이유다.


한편, 한신처럼 항우의 진영에서 유방의 진영으로 온 모사 진평은 유방군의 첩보부대 책임자였다. 초나라와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 음모꾼 진평의 이간책이 빛을 발하는데, [사기]에는 항우의 사자에게 항우의 스승과도 같은 책사 범증의 사자인 줄 착각했다면서 진수성찬을 허접한 음식으로 새로 세팅했다고 하나 이는 일화에 불과하다. 홍문연에서부터 항씨 가문과 범증의 정적관계를 알고 있는 진평이 항백과 범증을 이간질시켜 결국 항우로 하여금 범증을 내치게 만든 것이다. 범증은 초나라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의제를 지키고자 했고, 항씨는 초나라 왕족의 성인 웅씨를 항씨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결국 의제는 살해되고 범증 또한 숙청되었을 때, 초나라는 멸망했다. 초나라는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보루였다. 오래된 '전국시대'를 계승하는 구체제의 대표였다.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도륙하고 불태운 후 기존 '전국시대' 제도를 본인이 패왕이 되는 '춘추시대'의 제도와 시간적으로 결합하면서 이후 '연합제국'의 과도기를 열었다. 항우의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유방은 진나라가 놓은 '제국'에 기초하여 초나라가 추진했던 기존 '전국시대'의 분봉을 결합하면서 '연합제국'을 열었다고 리카이위안은 평가한다([초망], <5-8. 유방이 정도에서 즉위하다>). 진시황의 진제국과 달리 유방의 전한은 황제가 다스리는 중앙집권적 수도권과 유씨 지방제후국의 '연합'이었다는 것이다.

초나라 사람 유방군이 초나라의 옛 제도를 무너뜨리고 새시대를 연 것이 바로 [초망]이다. 그렇게 "초나라는 멸망한다".





"[사기]와 [한서]의 <공신표>... 항우를 죽인 다섯 명의 기병 장수는 모두 옛 진나라 출신이며, 또 모두 옛 진나라 군대의 장수였다... 항우를 죽인 한나라 기병대 장수 5명이 모두 진나라 본토의 수도 내사지 출신이며 진나라 기병 장교 출신이라는 점을 <공신표>로 알 수 있다... 즉, 이들은 진나라 멸망 후 관중 지역에서 유방집단으로 편입한 사람들이다."

- [초망], <6-1. 누가 항우를 죽였나>, 리카이위안, 2015.



형양에서 초-한의 군대가 오래도록 대치하고 있을 때, 후공이라는 신비로운 모사가 항우를 찾아가 홍구를 사이로 양국이 천하를 나누고 휴전하자는 협정을 성사시킨다. 팽성대전의 참패 후 한나라는 진나라의 기병부대를 흡수하여 전력이 보강되었다. 초나라의 보병 중심 전술은 항우 기병대의 파괴력에 무력했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유방의 주력군은 최초 기의시 풍패의 유협집단인 '패현자제병' 3천을 기반으로 진승의 장초에 편입되었을 때 받은 탕군의 군사 6천, 항량 밑에 들어가 늘어난 5천을 모은 약 1만 명이었다. 초 회왕의 휘하에서 3만으로 늘어난 이 '탕사초인집단'은 유방이 '회왕의 약조'에 따라 관중에 들어갈 때의 주요 병력이었고 이후 한나라 건국 후 지배집단을 형성했다고 한다. 여기에 살상과 약탈을 삼가면서 진나라 관중지역의 민심을 얻은 유방에게 옛 진나라 군대가 세를 불려주는데, '탕사초인집단'이 똑같은 초나라 군대인 항우군으로부터 열세에서 우세로 전환된 계기가 바로 이 진나라 군대의 결합이었다. 북방의 흉노 및 서방 기마민족과 초원에서 전투를 벌이던 진나라 군대는 당시 유라시아 제국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했다고 한다. 초나라는 물론 예전의 열국과 망국 진나라의 '민심'을 얻고 '군심'까지 가세한 유방의 한나라 군대는 수차례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미 '초-한' 대전쟁에서 이기고 있었다. 오강정에서 '하늘의 탓'이라며 31세에 자결한 항우의 시체를 갈기갈기 나누어 가진 장수 5명은 모두 진나라 사람들이었는데, 신안에서 진나라 사람 20만 명을 생매장하고 함양을 불태움으로써 '민심'을 잃은 항우에 대한 진나라 사람들의 깊은 원한을 알 수 있다.





"유방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고,

항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 [초망], <2-10. 팽성전투를 돌아보다>, 리카이위안, 2015.



팽성대전에서 60만 연합군으로 10만 항우군에 대패한 유방은 그럼에도 기죽지 않았다. 겨우 한신의 군영에 살아돌아온 후 말 안장에 기대어 "나는 관동 등지의 땅을 여러분에게 봉토로 주고자 하는데 누가 나와 함께 공을 세울 수 있겠는가?"([사기], <유후세가>)라고 물었다는 유방은 "보통사람의 경지를 초월한... 실로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초망], <3-1. 유방의 강인함>)라고 리카이위안은 평한다. [삼국지]의 진수가 촉한의 유비를 "백절불굴", 즉 '백 번 꺾여도 굽히지 않는다'라고 평한 것처럼, 사마천을 잇는 역사가 리카이위안은 유방을 "심리적 강인함이 대단한 천재적 영수"로 정리한다. 관동으로 호기롭게 진출하다가 순식간에 60만을 잃고도 적장 항우가 차지하고 있는 그 관동 땅의 봉지분배를 논하는 멘탈이 어디 보통 사람의 그것이겠는가? '약법삼장' 등으로 얻은 '민심'의 지지와 대장군 한신은 물론 선봉장 영포, 후방유격부대 팽월 등의 '군심' 또한 유방 본인의 편이며, 이미 '민심'이 떠난 항우는 결코 유방 본인을 이길 수 없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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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잃은 자는 천하를 잃는다!"

- [초망], <에필로그>, 리카이위안, 2015.



결국, "초나라는 멸망했다(초망)".

'포스트-전국시대'의 마지막 주자 초나라의 낡은 체제는 가고, '제국' 시대의 새로운 체제가 등장한다. 그러나 유방 집단이 개국한 한나라는 기존 진나라와 달랐다. 다스릴 능력도 없으면서 억압하기만 했던 진제국의 시행착오를 넘어 '포스트-전국시대'의 '초-한전쟁'을 겪으면서 구체제와 신체제를 결합한 '연합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그 기반은 말할 것도 없이 다수 민중의 '민심'이었다.


"초나라는 망했다(楚亡)"지만, 미흡하기는 해도 '민심'과 '혁명'의 역사는 [초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


1.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2.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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