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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ul 10. 2021

[동학(東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동학(東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우르는 '포용'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이성' '근대화'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없다 해도 '영성' '전통' 아닌 '민주주의' '공화주의' 무장된 '동학'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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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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