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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un 05. 202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 유홍준

그렇게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을까

그렇게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을까

- 우리 엄마 한연순 여사의 팔순 기념 '수덕사' 순례기





"입학금만 대주면 내가 알아서 댕기겠다고 몇날 며칠을 졸랐거든. 근데 우리 엄마가 중핵교 합격통지서를 찢어서 날리는데, 그게 눈발처럼 막 휘날리드라고..."




2남 7녀의 아홉 형제자매 중 여섯 째인 우리 어머니는 '국졸'이다. 내 어릴 적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중졸', 어머니 '국졸'로 외워서 적어댔던. 내 어머니의 오빠인 나의 외삼촌은 등교길에 산길로 빠져 화투판을 펼치기 일쑤로 일찌감치 배움을 포기했고 어머니의 바로 위 언니인 지금의 '인천이모'는 학교가 싫어 도망을 다녔단다.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는 그래서 언니인 인천이모 '한간난'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녔다. 일곱살도 안된 소녀 한연순은 언니 대신 학교로 가 교실 창 밖에서 매일 시위를 했단다. 선생님이 "넌 아직 때가 아니니 오지 말라"며 돌려 세워도 다음날 어김없이 창 밖에 와서 섰다. 결국 소녀 한연순은 학교에 등교하지 않은 '한간난'이라는 이름으로 국민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공부는 재미있었고 시험도 곧잘 보았단다. 충남 서산군 지곡면 '곤재벌'에 있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중학교에 합격통지서까지 받았다는 것을 보면 '한연순' 본명으로 정식 졸업은 했는가 보았다. 어머니는 기쁜 마음에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가지고 집으로 뛰어 갔는데 나의 외할머니가 "아들도 못 보낸 핵교를 딸년을 보낼 수 없다"며 중학교 합격통지서를 발기발기 찢어 어머니 눈 앞에서 뿌렸단다. 중년이 된 한연순 씨는 소녀 시절의 그 장면을 두고두고 눈발처럼 날리던 장면으로 늘 회상했고, 그 이야기를 무한반복으로 들어온 어린 내 눈 앞에는 언제까지고 눈꽃처럼 흩날리는 중학교 입학통지서 앞에 키작은 어린 소녀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어머니의 형제자매들 중 아마도 처음 시도되었을 중학교 입학 도전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외할머니는 들과 논으로, 산과 바다로 딸들을 몰고 다니며 일을 시켰는데, 키도 제일 작고 농땡이도 잘 피웠다는 내 어머니 소녀 한연순은 '노동력'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백수'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놀았단다. 사월 초파일에 외삼촌의 양어머니를 따라 절에 가서는 돌아오지 않고 몇 달을 개기다가 추석에나 집에 왔다고 한다. 서너살 어렸던 '세창이 스님'과 맨날 뛰어놀고 골방으로 물러난 노스님 등을 긁어드리다가 몰래 나가 고기를 사다 드리기도 했다. 불사의 현역에서 물러나 뒷방에 앉은 노스님은 그래도 아직 중이었지만 고기를 먹고 싶어 어머니에게 돈을 주며 심부름도 시켰다. 어느날은 어머니보고 집에 가지 말고 여승이 되라고 꼬시기도 했다는데 백수건달소녀 한연순은 한사코 손사래를 쳤단다. 부처님이 좋아서 찾은 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난세를 맞은 후고구려 궁예나 명태조 주원장처럼 반란 또는 생계를 위해 행각승으로 숨어들었던 것일까. 어머니가 '김이륵'으로 기억하는 옛날 이야기 잘 해주고 '이화대학'을 나왔다는 늙은 여승은 일제시대 신여성이었다가 38세에 속세를 떠난 김일엽 스님이었다.

꿈에 그리던 중학교를 끝끝내 갈 수 없었던 소녀 한연순이 한 때 살았던 그 절은 충남 예산의 '덕숭산 수덕사'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85



"내포 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는 수덕사(修德寺)이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해발 580미터)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 스님이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불교계의 덕숭문중은 큰 일파를 이루어 종정 선출이 난항을 거듭할 때면 으레 덕숭문중의 의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런 중에 수덕사는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이 있던 곳으로 유명해졌다. 또 여승들의 큰 선방이 여기에 있어 청도 운문사와 같은 청순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가수 송춘희가 부른 '수덕사의 여승'... 같은 유행가까지 나왔다.

그러나 수덕사는 더 이상 그런 수덕사가 아니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예산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유홍준, <창비>, 2018.



64년 만이라고 했다.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의 '팔순'을 맞아 하루 휴가를 내고 당일로 예산 수덕사를 가게 된 건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로 인해 팔순 잔치는 못하고 생신 전 주말에 자녀들인 우리 형제자매들만 우리집에 모여 잔치상을 차렸다. 낮술판으로 왁자한 와중에 수덕사 얘기가 나왔다. 팔순을 맞아 큰누나와 둘이 다녀온 강원도 동해바다 여행에서 어머니가 "수덕사에 가보고 싶다"고 하셨단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수덕사에서 '좀 놀아봤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본 바 있었고 나는 불자는 아니지만 사찰을 좋아했기에 어머니 생신 당일에 수덕사 구경을 시켜드리겠다고 즉흥적으로 제안했다. 어머니는 또 한차례 손사래를 쳤다.

이틀 후 어머니 팔순 생신 당일날, 생일자 어머니와 단둘이 예산으로 가는 차 안에서 수덕사에 관한 어머니의 기억은 16세 소녀 시절 기억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그렇게 팔십세가 된 어머니는 자그만치 64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내려가고 있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83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2], '영주 부석사', 유홍준, <창비>, 1994.



충남 서산 출신인 어머니는 적어도 나와 내 형제자매들 기억에는 '깡'이 센 분이었다. 더 나아가 나는 내 주변에서 남의 말을 제일 안 듣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바로 내 어머니를 꼽을 정도로 고집이 세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를 엮은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그 간의 사찰에 관한 답사기록을 골라 2018년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산사순례' 편을 냈다. 유교수는 이른바 '논제명찰(論題名刹)'이라고 하여 경북 영주 부석사, 경북 청도 운문사, 전남 강진 무위사, 전북 부안 내소사 등과 함께 '봄의 절'로 충남 서산 개심사를 추천하는데, 서산 제일의 절 개심사는 예산 수덕사의 '말사' 즉 지점 정도에 해당된다. 예산 수덕사는 조계종 조직으로 치면 '충남지역본부' 정도 되며 개심사는 '서산지점' 격이 되리라. 수덕사에서 노스님의 등을 긁고 김일엽 선사와 농담따먹기를 하던 백수건달 행각소녀 한연순 씨는 정작 서산 출신임에도 개심사는 못 가봤다고 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생신 당일 예산 수덕사 다음 일정으로 서산 개심사까지 네비게이션에 입력해 두었다.



충남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 일대는 '내포(內浦)' 지역으로 불린다.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고 기록했고 유홍준 교수에 의하면 내포 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기골이 강해서 '깡'이 센 사람들"이라고 적고 있다. 최영 장군, 이순신 장군, 사육신 성삼문, 추사 김정희,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남로당 박헌영, 만해 한용운 등을 예로 든다. 더 거슬러 가면 백제 부흥운동이 활발했던 '반란의 땅'이기도 하고 새왕조 개창의 시기에는 이 새로운 '반역자'에 대항한 반역을 도모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아마도 강원산간 지역 못지 않게 한반도 중남서부의 '오지' 취급을 받던 '내포' 땅이 정보와 유행에 둔감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 지역민들의 '반역'은 주로 낡은 왕조의 '부흥운동' 형태였을 테고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느린' 정치적 성향으로 표출되었을 수도 있겠다. 이건 오로지 내 생각이기는 하나, 실제로 1939년 당진 출생 아버지와 1942년 서산 출생 어머니는 6.25 전쟁이 일어난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고 한다. 참고로 팔순을 앞두고 '총기'가 많이 쇠하기는했지만 늘상 기억력은 최고라 자부하는 내 어머니 한연순 여사는 네 살때 광복을 맞아 흰저고리 입고 "만사이~"를 부르던 동네 할머니까지 기억할 정도로 총명한데도 그렇다.



서산 출신에 '눈발처럼' 휘날려 흩어지던 중학교 입학통지서를 평생 기억하며 살아온 나의 팔순노모는 그래서 굶어 죽더라도 자식들은 꼭 고등학교까지 보내리라 굳게 결심했고, 그 외진 '내포'에서 인천으로, 인천에서 서울로 여관방 등을 전전하면서도 네 명의 자녀들을 적어도 고등학교 이상까지 졸업시켰다. 모든 부모들이 말로 다 못할 고생을 했겠지만 내 형제자매들 기억에서도 어머니는 단 하루도 쉬지 못했고 한 시도 손을 놀리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항상 가난에 허덕였으나 고집과 자존심은 세상 누구보다도 셌으니 역시 '반역의 고장'인 천생 '내포' 사람이었다.



조촐했던 팔순 잔치의 마지막 행사로 64년 만에 다녀온 수덕사는 16세 소녀 한연순의 기억들을 온전히 담고 있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부터 약 700년을 버텨온 대웅전과 그 뒷 산길은 여전했으나 일주문부터 천왕문까지 일체의 풍경에서 여든살의 어머니는 생전 처음 온 듯 두리번 거렸고 다소 헤매기도 했다. 결국 어린 시절 함께 뛰어 놀았다던 '선수암' 주지 '세창이' 스님은 뵙지도 못하고 왔는데 만약 만났다면 여든살의 할머니 얼굴에서 중학교도 못 간 슬픔을 웃음 뒤에 감춘 열여섯 소녀의 얼굴을 찾을 수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 어떤 때는 그냥 못 하고 오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미처 찾지 못한 수덕사의 오랜 모습이나 세창 스님의 기억은 그렇게 여전히 열여섯 소녀 한연순의 기억으로 온전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시간이 모자라 개심사행은 다음으로 미루고 수덕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첫선 이야기도 하고 그간 나누지 못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며 나는 골방 노스님의 꾀임에 넘어가지 않고 다시 '속세'로 돌아온 내 어머니께 내심 고맙다는 생각을 줄곧 했다.

중학교를 끝내 가보지 못했던 열여섯 소녀 한연순이 만약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더라면 나는 지금의 여든살 한연순 여사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하다.

중학교도 못 간 소녀 한연순이 앞으로 그렇게 고생하며 살 운명을 미리 알았다면, 노스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수덕사의 여승'이 되었을까.



***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산사순례], 유홍준, <창비>, 2018.

2.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 2], 유홍준, <창비>, 1994.


* '논제명찰' 나머지 참고


1) 경북 청도 운문사

https://brunch.co.kr/@beatrice1007/84

2) 전남 강진 무위사

https://brunch.co.kr/@beatrice1007/86

3) 전북 부안 내소사

https://brunch.co.kr/@beatrice100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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