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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31. 2020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 3] - 유홍준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5. 부안 내소사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5. 부안 내소사
- 유홍준 교수의 ‘논제명찰(論題名刹)’ 5選 -

 
1.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2.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3.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4.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5.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위의 글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 정원용의 ‘논제필가(論諸筆家)’에서 영감을 얻어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전국 5개 명찰을 논한 글, 이른바 ‘논제명찰(論諸名刹)’이다. <한국문원>에서 편집한 [명찰(名刹)]을 보면, 1995년 말 기준으로 우리 국보와 보물 문화재는 1,466점이라고 하는데 이 중 불교문화재가 총900점에 달하는 바, 이들 불교문화재들을 품고 있는 곳이 대부분 사찰이다. 1995년 말 기준 282점 국보 가운데 147점, 1,184점의 보물 가운데 753점을 차지하는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사찰이야 말로 가히 우리 문화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의 숨결을 음미하고자 오래된 절을 찾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


5. 전북 부안 능가산 내소사 (楞伽山來蘇寺)


전북 부안의 변산반도 남단에 위치한 능가산 내소사(楞伽山 來蘇寺)를 찾아가는 길은 서해바다를 바짝 끼고 도는 30번 국도를 타고 꼬불꼬불 변산반도의 가장자리를 따라 가다가 23번 국도를 이용해 변산반도를 가로지르는 길인데, 다소 더디기는 하지만 우리 땅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몇 안되는 길로서 여행 전문가들이 적극 추천하는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라고 한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인 633년, 혜구두타(惠丘頭陀)라는 스님이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하는데, ‘두타’란 노숙과 걸식으로 산야를 다니며 고행하는 스님을 이른다고 한다. 원래는 2개의 절로서 ‘대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다고 하나 대소래사는 불에 타서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아 내소사가 되었다고 한다. 내소사로 이름이 바뀐 것은 7세기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이 절을 찾아와 시주했기 때문이라고 하여 ‘올 래(來)’, ‘소정방의 소(蘇)’를 각각 따서 ‘내소사(來蘇寺)’라고 명명했다고 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없고, 조선 성종 17년인 1486년에 쓰여진 [동국여지승람]에도 소래사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내소사라 한 것은 그 이후의 일인 듯 하다.

내소사에서 유명한 곳은 우선, 일주문에서 천왕문으로 이어지는 전나무 길이다.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길과 마찬가지로 답사객들에게 유명한 길이라고 한다. 하늘 높이 뻗어 올라 있는 이 전나무 길을 지나 천왕문을 들어서면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거듭되며 조금씩 높아지는 절 마당이 나오고 보물 제291호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설선당, 봉래루, 요사채 등의 단촐한 전각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데, 봉래루는 장식을 거의 하지 않은 소박한 구조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24개나 되는 기둥의 길이가 조금씩 다 다르고 그 때문에 주춧돌의 높이도 높았다 낮았다 제각각이라고 한다. 1914년 실상사터에서 이건해 올 때 인공적인 손길을 최소화하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살리려 했기 때문이란다.
봉래루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쇠못 하나 쓰지 않고 모두 나무로만 깎아 끼워 맞추었다는 대웅보전이 돌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는데, 이 건물에는 두 편의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고 한다.

우선, 대웅보전을 중건할 당시의 이야기로, 대웅보전을 지을 도편수가 기둥은 세우지도 않고 3년 동안 나무를 목침덩이만하게 깎기만 했다고 한다. 이를 본 사미승 하나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몰래 나무토막 하나를 감추어 버렸는데, 드디어 도편수가 나무깎기를 마치고 토막수를 세기 시작하였다. 세고 또 세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몇 번을 세던 목수는 주지스님을 찾아가 자신은 아직 법당을 지을 실력이 못되니 그만 포기하겠다고 간곡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놀란 사미승이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아 일은 다시 진행되었지만 목수는 끝내 그 나무토막을 부정한 재목이라 하여 사용하지 않고 대웅보전을 완공하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오른쪽 천장에 나무 하나 만큼의 빈 자리가 있다고 한다.
법당 내부의 단청도 한 군데 빠진 곳이 있는데 여기에도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대웅보전 건물이 완성된 후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하겠다고 하며, 단 단청을 하는 100일 동안 아무도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단다. 100일이 다 되도록 사람의 기척도 없는지라 방정맞은 사미승 하나가 몰래 다가가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방안을 엿보았더니 화공은 안 보이고 예쁜 새 한 마리가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단청을 해 나가고 있었단다. 그러다 인기척을 느낀 새는 마지막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는 것인데, 무위사 후불벽화의 관음보살에 얽힌 설화와 비슷한 점이 있다.

대웅보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정면 여덟 짝의 꽃무늬문살이라고 하는데, 연꼿, 국화 등 각기 다른 꽃무늬가 꼼꼼하게 수놓아져 문짝 하나하나가 그대로 꽃밭인 듯 하다. 이제는 세월에 씻겨 빛 바랜 꽃문양들이 되었다. 또한 삼존불이 모셔진 뒤쪽 벽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좌상 그림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백의관음보살 그림 중 가장 크다고 한다.

보종각에는 삼존상이 양각된 보물 제277호 동종이 보관되어 있는데, 명문에 의하면 본래 고려 고종 9년인 1222년 청림사 종으로 주조되었으나 절이 없어진 뒤 찾을 길이 없다가 1853년 청림사터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견 당시 종소리가 나지 않아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내소사 스님이 종을 치자 비로소 아름다운 울림이 이어져 내소사로 옮겨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 후기 종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내소사 마당에는 수령이 950년이나 됐다는 당산나무가 있는데, 대웅보전에서 절마당을 내려다보면 봉래루 너머 큰 나무 한 그루가 그것이다. 이 나무는 일주문 밖에서 오색천을 두르고 있는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 쌍을 이루는 ‘할아버지 당산나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 민간신앙들을 흡수하면서 산신각이니 칠성각이니 하는 전각들이 사찰 안으로 들어오기는 했어도 이렇듯 당산나무가 절 마당에 우뚝 서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라고 한다. 전통적인 민간신앙과 불교문화와의 화해의 몸짓으로 볼 수도 있겠는데, 해마다 정월 보름이면 할머니 당산나무 앞에서 내소사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당산제도 지낸다고 한다.


(끝)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3], 유홍준, <창비>, 1993~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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