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3. 서산 개심사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3. 서산 개심사
- 유홍준 교수의 ‘논제명찰(論題名刹)’ 5選 -
1.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2.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3.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4.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5.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위의 글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 정원용의 ‘논제필가(論諸筆家)’에서 영감을 얻어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전국 5개 명찰을 논한 글, 이른바 ‘논제명찰(論諸名刹)’이다. <한국문원>에서 편집한 [명찰(名刹)]을 보면, 1995년 말 기준으로 우리 국보와 보물 문화재는 1,466점이라고 하는데 이 중 불교문화재가 총900점에 달하는 바, 이들 불교문화재들을 품고 있는 곳이 대부분 사찰이다. 1995년 말 기준 282점 국보 가운데 147점, 1,184점의 보물 가운데 753점을 차지하는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사찰이야 말로 가히 우리 문화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의 숨결을 음미하고자 오래된 절을 찾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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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충남 서산 상왕산 개심사 (象王山開心寺)
상왕산 개심사(象王山 開心寺)는 예산 수덕사의 말사로서 상왕산은 풍수지리상 코끼리의 형국이라 하여 이름지어졌고 개심사로 오르는 길은 여느 사찰들과는 다르게 자연의 미 그대로인 듯 하다. 물론, 1969년 군부정권의 김종필이 서산의 농민들을 내쫓고 우리 나라 최대의 목장인 ‘삼화목장’을 조성했다는 길고 긴 길을 보고 혹자는 ‘목가적인 풍경’을, 또 누군가는 농업에서 공업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나라 ‘자본주의 근대화 풍경’ 또는 ‘한국식 엔클로저(encloser) 운동’을 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풍경을 돌고 돌아 도착하는 개심사 입구는 두 어 개의 식당 외 인적이 드문 너무도 호젓한 모습이다.
돌멩이에 흰 글씨로 ‘세심동(洗心洞)’ ‘개심사 입구(開心寺入口)’라 적힌 곳은 소박한 개심사의 입구로, 여기서부터 울창한 적송 숲 사이로 난 투박하고 경사가 제법 높은 돌계단을 따라 개심사 경내 앞에 들어서게 된다. 계단이 끝나는 즈음에는 직사각형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는데, 상왕산이 코끼리 형국이므로 코끼리의 갈증을 풀어주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며 이 연못을 통해 개심사로 들어가는 외나무 다리가 놓여 있다. 봄에 찾으면 좋은 사찰, 개심사의 연못에 봄의 연꽃이 만발하리라고 예측케 한다.
충남 서산 상왕산 개심사는 백제 의자왕 14년인 654년, 혜감(慧鑑)국사가 창건했다고 하는데, 우리에게 몇 안되는 백제 시기 창건된 사찰이다. 창건 당시에는 개원사(開元寺)였다가 고려 충정왕 2년인 1350년 처능(處能)대사가 중건하며 개심사라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대웅전의 기단 만이 백제 때의 것이고 건물은 조선 성종 6년인 1475년 산불로 소실된 것을 성종 15년인 1484년에 중창하였고 1740년에 중수하였으며 1955년에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전술했듯, 개심사는 예산 수덕사의 말사, 즉 ‘지점’에 불과하지만 충남 4대 사찰 중 하나로 칠 만큼 가치 있고 아름다운 절이며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나더러 가장 사랑스러운 절집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무조건 영주 부석사, 청도 운문사, 그리고 서산 개심사부터 생각할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 절이기도 하다. 또한 이 절은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 때 전화를 입지 않은 사찰로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하며, 가람 배치는 북쪽의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을 놓고, 앞쪽에 누각 건물을 배치하여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배치법을 따랐다고 한다.
보물 제143호로서 1484년에 건립한 대웅보전은 몇 안 남은 조선 초기의 건물로, 주심포계 다포집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주심포식 건축이란 고려 초기 신라와 송의 건축양식을 바탕으로 한 기법으로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는 방식으로 비교적 간단하게 구성되는 반면, 다포식 건축은 기둥 사이 공간에도 창방 위에 두꺼운 평방을 올려놓아 기둥 위 뿐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얹음으로써 화려하고 장엄한 겉모양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공포’란 우리나라 목조 건축 특징 중의 하나로서 처마를 안정되게 받치며 그 무게를 기둥이나 벽으로 전달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장치이다. 우리 건축은 고려시대까지 대부분 주심포식이었는데 고려 말에 다포식이 등장했다고 하며 이러한 건축 역사의 변화의 과정이었던 조선 초기에 지어진 개심사 대웅보전이 지금껏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대웅보전 안에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을 협시로 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극락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대웅보전을 등지고 나올 때 우측에 스님들의 수도처로 쓰이는 심검당(心劍堂)은 개심사에서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서 휘어진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활용하여 지어진 모습이 신기함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1962년 해체 수리할 때 발견된 상량문에 의해 개심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밝혀졌다고 한다.
개심사의 아름다움은 5월 초순 분홍색 겹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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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부근 유적지로는 개심사의 본사(本寺)인 덕숭산 수덕사(德崇山修德寺)가 있는데, 문헌상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백제 위덕왕 시기인 6세기 말에 지명이라는 고승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절로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이라고 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제 사찰로는 흥륜사, 왕흥사, 칠악사, 수덕사, 사자사, 미륵사, 제석정사 등 12개 사찰이 전한다고 하나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수덕사에는 국보 제49호로 지정된 대웅전이 유명한데, 유홍준 교수는 현재의 이해하기 어려운 대웅전 안내문 대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안내문을 써보고 있다.
"국보 제49호. 덕숭산 남쪽에 자리잡은 수덕사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 현존하는 다섯 채의 고려시대 목조건축 중 하나로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주심포 맞배지붕으로 조용한 가운데 단정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며 불당으로서 근엄함을 잃지 않고 있다. 건물의 모든 결구는 필요한 것만으로 최소화하고 여타의 장식을 배제하였으며 기둥과 창방의 연결고리인 공포장치는 단순한 가운데 힘이 넘치며, 마름모꼴 사방연속무늬의 창살은 이 집의 정숙한 기품을 더욱 살려준다. 특히 이 건물의 측면관의 면분할은 안정과 상승의 조화를 절묘하게 보여주며 거의 직선으로 뻗은 맞배지붕의 사선은 마치 학이 내려앉으면서 날잿짓하는 듯한 긴장이 살아있다. 배흘림기둥에 기둥과 기둥 사이가 비교적 넓게 설정된 것은 백제계 건축의 특징으로 생각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지붕골이 조금 높고 길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건물 외벽에 별도의 단청을 가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그림보다 더 큰 조형효과를 자아낸다. 내벽에서는 1934년 대대적인 해체수리공사 때 아름다운 야생화를 담백한 채색으로 그린 것이 발견되었다. "
서산 용현리에는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절벽의 암벽이나 거대한 바위 면에 선각이나 돋을새김 기법을 사용하여 불교의 주제나 내용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인도의 석굴사원에서부터 유래하며 서기전후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5세기 경부터는 매우 빈번히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간다라, 서역 지방을 거쳐 중국 각지의 수많은 석굴에 무수한 마애불들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산동지방의 마애불은 백제의 대중국 통로인 서산, 태안지역을 거쳐 우리 나라 삼국시대 마애불 조성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은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마애불 중 가장 뛰어난 백제 후기의 작품으로 얼굴 가득히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당시 백제인의 온화하면서도 낭만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다고 하며,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웃는 모습이 각기 달라진다고 한다. 중앙에 본존인 석가여래입상, 좌측에 제화갈라보살입상, 우측에 미륵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좌측의 제화갈라보살은 석가에게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준 과거불인 연등불의 보살일 때 이름으로서 과거, 중앙 석가여래는 석가모니의 현신으로서 현재, 우측 미륵불은 미래를 각각 표현하는 3세불 형식으로서 [법화경(法華經)]의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참고로, 현세의 석가여래 좌우의 협시(脇侍)보살로는 지혜와 지식을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입적 후 극락을 주재하는 아미타불의 양 옆에는 관음보살과 지혜의 상징 세지보살, 약사여래의 좌우에는 일광보살, 월광보살이 선다고 하는데, 이런 규칙이 다 지켜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한 개심사에서 나와 예산 방향으로 조금 가면 해미읍성이 있다. 해미읍성은 성종 22년인 1491년에 쌓은 읍성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본래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사령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직전에 이순신 장군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는데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해미읍성의 군사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과정에서 사령부가 덕산, 청주 등지로 옮겨지면서 읍성으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해미읍성은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무려 1천여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형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계속)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 유홍준, <창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