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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31. 2020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993) - 유홍준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4. 강진 무위사

'논제명찰(論諸名刹)' 5선(選) - 4. 강진 무위사
- 유홍준 교수의 ‘논제명찰(論題名刹)’ 5選 -


 
1. 춘삼월 양지 바른 댓돌 위에서 사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2.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3.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4.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5.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위의 글은 조선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 정원용의 ‘논제필가(論諸筆家)’에서 영감을 얻어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2권에서 전국 5개 명찰을 논한 글, 이른바 ‘논제명찰(論諸名刹)’이다. <한국문원>에서 편집한 [명찰(名刹)]을 보면, 1995년 말 기준으로 우리 국보와 보물 문화재는 1,466점이라고 하는데 이 중 불교문화재가 총900점에 달하는 바, 이들 불교문화재들을 품고 있는 곳이 대부분 사찰이다. 1995년 말 기준 282점 국보 가운데 147점, 1,184점의 보물 가운데 753점을 차지하는 불교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우리의 사찰이야 말로 가히 우리 문화재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역사의 숨결을 음미하고자 오래된 절을 찾아가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


4. 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 (月出山無爲寺)


"거기에는 뜻 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린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 있는 것이다.
… 달리는 차창 밖 풍경이 산비탈의 과수밭으로 펼쳐졌을 때 우리 일행은 남도의 황토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누런 황토가 아닌 시뻘건 남도의 황토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부안, 고창땅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황토현을 가본다면 더욱 실감할 남도의 붉은 황토는 그날따라 습기를 머금은 채 검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전남 강진은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 제1장에서 이른바 ‘남도답사 일번지’라 명명한 지역이다. 백제시대 이름이 ‘달나산’으로 남도의 전남 강진군과 영암군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월출산(月出山)은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완만한 곡선의 산등성이 끊기듯 이어지더니 너른 벌판에 첩첩이 쌓여 바닥부터 송두리째 몸을 내보이고 있는 골산(骨山)’으로 ‘신령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회화적’이라고 한다. 그의 묘사를 좀더 보자.

"계절에 따라, 시각에 따라, 보는 방향에 따라 월출산의 느낌과 아름다움은 다르기 마련이지만 겨울날 산봉우리에 하얀 눈이 덮여 있을 때, 아침 햇살이 역광으로 비칠 때, 그리고 저녁나절 옅은 안개가 봉우리 사이사이로 비치면서, 마치 산수화에서 수묵의 번지기 효과처럼 공간감이 살아날  때는 그것 자체가 완벽한 풍경화가 된다."

월출산의 영암 쪽 자락에는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한 도갑사(道岬寺)가, 강진 쪽 자락에는 무위사가 자리잡고 있는데, 유홍준 교수가 위와 같이 ‘남도답사 일번지의 첫 기착지’로 꼽는 곳이 바로 전남 강진 월출산 무위사(月出山 無爲寺)이다. 영암에서 월출산을 우측으로 끼고 13번 국도를 따라 ‘풀티재(草嶺)’을 넘어 월출산의 광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고려 시대 절터인 월남사터를 지나 강진 방향으로 3km를 가면 무위사 입구임을 알리는 간판이 있고 그 우측길이 바로 무위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유홍준 교수는 무위사의 아름다움을 “소담하고, 한적하고, 검소하고, 질박한 아름다움”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이 “소박함은 가난의 미가 아니라 단아(端雅)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무위사는 사찰 역사에 대해 논란이 있는 절이라고 하는데, 영조 15년인 1739년 당시의 주지였던 극잠(克岑) 스님이 쓴[무위사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인 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절 이름을 관음사라 했고, 그 후 헌강왕 1년인 875년에 도선국사가 중창하여 갈옥사(葛屋寺)로 바꿨으며, 다시 고려 시대에 선각(禪覺)국사가 정종 1년인 946년에 삼창하여 ‘방옥사(芳玉寺)’ 또는 모옥사(茅屋寺)로 개명했다가 조선 명종 10년인 1555년에 태감(太甘)선사가 삼(3)창하여 비로소 절 이름을 무위사로 고쳤다고 한다. 하지만 창건되었다고 하는 617년은 원효가 태어난 해이고, 선각국사가 삼창했다는 고려 정종 1년은 선각국사가 입적한 지 30년이 지난 후이며, 절 안의 선각국사 부도비 제목에 ‘무위갑사(無爲岬寺)’라 적혀 있는데다 신라 효공왕 9년인 905년에 왕건이 선각국사를 무위갑사에 머물도록 청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무위사로 불리어 왔을 것이다. 따라서 무위사의 창건 내력은 불확실한데, 10세기 초 이전에 창건되어 내려오다가 신라 말 왕건과 긴밀하였던 선각국사에 의해 사세가 커지며 후대로 이어져 온 사찰임은 분명하다 볼 수 있다.

무위사 천왕문을 지나면 곧바로 경내로 들어서는데 극락보전, 벽화보존각, 미륵전,선각국사부도비, 산신각, 천불전, 요사채 등이 있는 바, 정면에 보이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집이 바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목조건축 중 하나로서 조선 성종 7년인 1476년에 지어진 무위사 극락보전이다. 국보 제13호로 지정된 무위사 극락보전은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고 한다.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글린 친근함과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초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있다고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적고 있다. 극락보전을 포함한 무위사 문화재를 묘사한 유홍준 교수의 답사기를 그대로 인용한다.

"극락보전 안에는 성종 7년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畵記)가 있는 아미타 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원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두루마리 탱화가 아닌 토벽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後佛)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했던 고려불화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받은 명작 중의 명작이다. 무위사 벽화 이래로 고려불화의 전통은 맥을 잃게 되고 우리가 대부분의 절집에서 볼 수 있는 후불탱화들은 모두 임란 이후 18~19세기의 것이니 그 기법과 분위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무위사 벽화는 역시 조선시대 불화답게 고려불화의 엄격한 상하2단구도를 포기하고 화면을 꽉 채우는 원형구도로 바뀌었다. 고려불화라면 협시보살(夾侍菩薩)로 설정한 관음과 지장보살을 아미타여래 무릎 아래와 그려 위계질서를 강조하면서 부처의 권위를 극대화했겠지만, 무위사 벽화에서는 협시보살이 양옆에 서고 그 위로는 6인의 나한상이 구름 속에 싸이면서 부처님을 중심으로 행복한 친화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불화라도 상하2단구도와 원형구도는 이처럼 신앙형태상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니 미술이 그 시대를 드러내는 것은 꼭 내용만이 아니라 이처럼 형식에서도 구해진다.
극락보전 안벽에는 이외에도 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곧 허물어질 지경에 이르게 되어 1974년부터 해체보수를 시도하였고 지금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들어내어 한쪽에 벽화보존각을 지어놓고 일반에게 관람케 하고 있다.
후불벽화의 뒷면, 그러니까 극락보전의 작은 뒷문 쪽에도 벽화가 그려져 있다. 백의관음이 손에 버드나무와 정병(淨甁)을 들고 구름 위에 떠 있는데 아래쪽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무릎을 꿇고 물음을 구하고 있는 그림이다. 박락이 심하여 아름답다는 인상은 주지 않으나 그 도상은 역시 고려불화의 전통이라 의의는 있다. 그런데 이 벽화에는 어떤 기독교신자가 열십자를 굵게 그어놓아 일부러 불화를 파괴했으니 이는 또 무슨 해괴한 20세기의 자취인가. 그 기독교신자가 그때 했을 바로 그 말을 나는 아낌없이 되돌려 주고 싶다. “사탄아 물러가라.”"

극락보전의 벽화에 얽힌 설화도 있는데, 극락보전을 지은 후 주지스님이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던 어느날, 의복이 남루한 노승이 절에 찾아왔다고 한다. 행색은 초라하나 얼굴빛이 청아하고 행동이 사려 깊어 수도가 경지에 오른 듯한 고승으로 보였던 그는 법당에 벽화를 그리겠다고 하더니 들어가자 마자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앞으로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단다.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음식을 달라고도 하지 않은 채 날이 지나고 마침내 49일째 되던 날, 궁금증을 못 이긴 주지스님이 문틈으로 법당 안을 엿보니,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더란다. 다 완성한 관음보살의 눈에 눈동자를 그리려던 순간, 인기척을 느낀 파랑새는 붓을 떨어뜨리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는 설화다. 그래서 후불벽화 관음보살 눈에는 지금도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극락보전의 옆에는 고려초 무위사를 세번째로 중수하여 방옥사(芳玉寺)라 이름붙였던 선각(禪覺)국사의 사리탑비가1천년이 되도록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 예스러운 분위기를 살려준다고 하는데, 선각국사의 속명은 최형미(崔逈微)로 864년에 태어나 당나라 유학을 10년간 하였고 귀국하여 무위사에 8년을 머물렀고 고려 태조 왕건이 태봉의 궁예 부하로 있을 때 왕건과 가깝다는 이유로 917년 궁예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고려를 개국한 태조 왕건은 형미에게 선각대사라는 시호를 내렸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무위사 옆 도갑사에 이르는 등산로를 통해 월출산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하는 월출산 무위사는 가을에 더욱 좋은 풍광을 선사한다고 한다.


(계속)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유홍준, <창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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