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전국시대 : 1] "진나라가 붕괴한다"
[포스트-전국시대 : 1] "진나라가 붕괴한다"
- [진붕(秦崩)](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유방은 동시대의 영웅호걸들과 함께 '전국시대'를 회복하고 왕정을 부활하며, 지나간 것을 이어받아 미래를 열고 옛것을 회복하고 혁신했다. 그들은 함께 '포스트-전국시대'의 역사국면을 열었다. '포스트-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이 나라를 회복하고 합종연횡하면서 분쟁과 병립이 재현되었다... '포스트-전국시대'라는 이 새로운 관념 역시 또 다른 역사의 발견일 것이다."
- [진붕], <서문을 대신하여>, 리카이위안, 2015.
지난 세기말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이라는 용어가 유행했다. 우리말로 '후기-모더니즘' 정도로 번역되었다. '후기 인상주의'와 같이 어느 사조의 '후기'를 뜻하는 '포스트(post)'와 '근대성'의 모더니즘(modernism)'이 조합된 신사조였다. '후기' 인상주의는 인상주의이자 인상주의가 아니었고 '매너리즘' 등이 나타난 '후기' 르네상스도 르네상스만은 아니었다. '모더니즘'은 20세기 초 지난 세기와 구분되는 '근대성(modernity)'의 예술적 선언이었다. 지금에야 '근대성'이지만 그 당시는 '현대(modern)성'의 구현이었다. '모더니즘'은 말 그대로 고전적으로 정형화되지 않은 '새로운' 것의 포괄적인 표현이었다. 서구에서 1980년대부터 등장하여 1990년대에 우리 사회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은 정형화되던 '근대성'보다 더 새로운 '후기-근대(현대)주의'였다. 신세기를 앞두고 모든 규정과 틀을 거부하는 '현대성' 자체였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자 '모더니즘'이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면 다른 체제로 이행하기 전 모든 '후기'의 양상이 그렇다. '양-질 전환' 법칙의 본질이다.
중국 역사학자이자 일본에서 문학을 전공한 리카이위안은 중국 각지를 현장답사하며 기원전 3세기 진-한 시대 역사를 문학적으로 서술한다. 2015년 [진붕(秦崩)]과 [초망(楚亡)] 세트로 진-한 교체기를 다루면서 [사기]의 사마천의 본을 받아 역사 서술에서 '문사철(文史哲)'을 소통시키고자 한다. 리카이위안에 의하면 "역사학의 본원은 '역사 서사'다"([진붕], <맺음말>). 2천년 전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은 역사적 사료인 문헌과 유물 등을 기본으로 역사가 침묵하는 사안들은 발로 찾는 현지 답사와 민간의 전설과 담론을 직접 취재하면서 '역사의 공백'을 메꿨다. 그렇게 풍부해진 역사 서사는 그 자체로 역사적 문헌자료가 되었고 이후 사가들의 고전이 되었다. 현대적 사마천이 되고자 하는 이 역사학자는 "발산 형식의 추리와 연쇄 형식의 연상" 및 "고대사 고증과 추리소설 간의 내재적 연계"를 통해 이미 장기판처럼 진부해진 '초한전쟁'을 복구하는데, 리카이위안에게 "역사학자는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혹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포와로와 같다"(이하 [진붕], <맺음말>). 또 다른 중국 역사학자로 중국통사를 집필 중인 이중텐 역시 역사 서술에서 '추리소설' 기법을 중시한다.
'역사'의 서사에서 '철학'을 담기 위해서는 '문학'이 결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사철'이다.
리카이위안이 사마천의 길을 따라 새롭게 구성한 '초한지'의 키워드는 '포스트-전국시대'다. 진-한 교체기로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쟁패하던 시기는 이전 열국의 춘추전국 시대로부터 제국의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기였다. 진시황제에 의해 중국 역사 최초로 '제국'의 기반이 다져지는 신시대였음과 동시에 '전국시대'의 '포스트(post-)', 즉 '후기성' 또는 '말기성'의 향연이었다. 진시황 영정의 급사 후 진시황릉 부역자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에서 반진의 깃발을 처음 올렸을 때, 15년 전 진나라에 의해 멸망된 '초, 제, 조, 위, 연, 한' 6국 사람들은 다시금 복국과 왕정복고를 위해 봉기하고 호응했다. 유방과 항우, 한신과 영포 등의 반란군 지도자들이 주로 초나라 출신이었지, 위표와 조헐 등은 망국의 귀족공자로서 열국의 독립을 통해 전국시대의 부활을 바랬다. 유방의 책사 장량은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새로운 중앙집권식 제국 체제 구상을 정립하게 되지만 진제국이 무너지던 진말 시기에는 한(韓)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 박랑사 진시황 테러를 시행하기도 하고 유방의 한(漢) 나라를 위해 일하면서도 고국인 한(韓)을 복국하기 위해 길을 떠나던 한(韓) 나라의 몰락 귀족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봉기로 '장초(楚)' 정권을 세운 진승 또한 리카이위안의 고증과 추리에 의하면 '진(陣)' 씨의 성으로 보아 춘추 열국 중 하나로 초나라에 의해 멸망한 진(陣) 나라의 왕족이었단다. 어떤 사가에 의하면 귀족이나 무관이 아니었기에 말을 잘 못타서 전장을 직접 지휘할 수 없었던 진승은 평민으로 자라서 말을 못 탔을 뿐 그 핏줄은 왕족이었다고 추리된다. '진시황에서 유방까지'를 부제로 한 [진붕] 다음으로 '항우에서 한신까지' 다룬 [초망]에서 저자는 한신의 성 '한(韓)' 씨를 증거로 그를 한(韓) 나라 왕족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마도 고대의 평민들은 성이 없었을 것인데 진말에 봉기한 군웅들은 각기 다 성씨가 있어 일반 평민보다는 몰락 귀족이나 왕족의 후예들이었을 수 있다. 죄수로서 얼굴에 먹칠을 한 구강왕 경포의 본명이 영포인데 그의 성 '영' 또한 오래전 춘추시대 '영' 땅의 후예였기에 그 땅의 '왕족'이었을 수 있다고 저자는 [초망]에서 추측하고 있다.
[초망]은 [포스트-전국시대 : 2']를 통해 서평하고자 한다.
"통일제국 2천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고 무장할거로써 대업을 이룬 영웅은 망탕산에서 흥기한 유방이었다. 이후 그의 발자취를 잇는 인물들이 잇달았다. 무장할거를 통해 대성공를 거둔 경우는 두말할 것 없이 징강산(정강산)의 마오쩌뚱이다...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했다. 고금을 두루 훑어보면 역사의 연속과 반복은 바로 망탕산-징강산과 연결되어 감응한다."
- [진붕], <2-9. 망탕산이 징강산과 감응하여 통하다>, 리카이위안, 2015.
[진붕]의 주인공은 역시 유방이다.
다른 반란군 세력들은 거의 망국의 귀족이나 왕족으로 추정된다는데, 유방(劉邦)은 그 '방(邦)'이라는 이름조차 제위에 오른 후 '나라'의 뜻으로 고상하게 지은 것이고 원래 초한전쟁터에서 한창 굴러먹을 때 이름은 '계(季)'였다. 유씨 집안의 '막내'라는 뜻으로 정식 이름조차 기록에 없던 평민이었다는 것이다. 사마천 [사기]의 <고조본기>에는 '계(季)'가 그의 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고대에 '유(劉)'라는 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방의 부친 유태공은 패현 풍읍 일대의 자산가 또는 유지 정도 되었을 수 있다. 중국 역사에서 제업을 이룬 '평민' 지도자는 세 명인데, 그 시초가 한고조 유방이고 다음이 명태조 주원장이며 마지막이 중화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모택동(마오쩌뚱)이다. 마오쩌뚱 또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유방과 같은 지역 자산가의 집안 출신이라 하니 오로지 주원장만이 하층 계급 출신 황제다. 유방은 한량이나 건달 같은 '유협' 출신이었으나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킨 후 지역 보안관 같은 '정장'을 맡으면서 말단 관리의 세계로 진입하여 소하와 조참 같은 유능한 관료 인재를 만났고 이들은 번쾌, 하우영, 노관 등 유협 시절 동지들과 함께 한나라 제국의 지배집단을 형성한다. 주원장은 굶어죽지 않으려고 탁발승을 전전하던 진정한 흙수저였고 마오쩌뚱은 주은래처럼 유학은 못 갔지만 최소한의 배움은 받은 '식자층'에는 속했다. 이들로 대표되는 '혁명'의 전통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의 '수직이동'으로 나타났다. 리카이위안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이래, 중국은 여러 나라가 전쟁을 벌이던 열국시대를 매듭짓고 왕조가 교체되는 제국시대로 진입했다"([진붕], <2-9>)면서 "열국시대에는 정권교체의 동력이 대부분 국외에서 비롯되었고, 권력은 통치계급 사이에서 '평행'으로 이동"한 반면, "제국시대에 정권교체의 동력은 주로 민간 사회의 무장폭력에서 나왔고, 권력은 통치계급과 피통치계급 간의 '수직'으로 이동했다"면서 "이것이 2천년 중화제국 정권교체의 기본특징을 형성했다"고 규정한다. 민중반란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교체한 역사는 유방의 '망탕산'과 마오쩌뚱의 '징강산'의 무장투쟁의 정신으로 "감응하여 통한다"(이하 [진붕], <2-9>).
"진승은 장초 정권을 세움으로써 포악한 진나라를 멸망시킬 대업을 열었다. 항우는 진나라 주력군을 소멸시키고 진나라 멸망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천하 분할의 기초를 마련했다. 유방은 관중을 공격해 진나라 정부가 투항하게 함으로써 최종의 제업을 성취했다... 사마천은 ([사기]) <진초지제월표>에 진나라 말의 난에서부터 한왕조 건립까지의 역사를 '진-초(秦-楚) 시기'로 간주했는데, 여기서 강조한 것은 진나라 말 역사에서 초나라와 초나라 사람의 독특한 지위와 역할이다."
- [진붕], <4-9.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라는 말의 참된 의미>, 리카이위안, 2015.
'포스트-전국시대'는 결국 '진-초 시기'였다. 반진의 선봉 초나라는 열국의 패국으로서 연합군을 형성하여 진나라에 복수하고 멸망시킨다는 것이다. 항우의 숙부 항량이 진나라 명장 장함에게 패한 후 항량이 세운 초 회왕이 친정에 나서면서 제일 먼저 관중을 평정하고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한 자를 '진(秦) 왕'으로 정한다는 기원전 208년 '회왕의 약조'를 선포했다. 초나라의 전략은 각지의 '전국 7웅' 열국을 복국하면서 초나라가 '패업'을 달성한다는 것인 바, 진나라를 멸한 유방만 '진왕'이 되면 완성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항우의 생각은 달랐다. '포스트-전국시대'의 대전략은 동의하되 초 회왕의 자리는 본인의 것이 되어야 했으며 '전국 7웅'을 갈가리 찢어 더 나누고 본인은 서초의 '패왕'이 되는 것이었다. 항우는 계속 자신을 견제하던 초 회왕의 심복인 대장군 송의를 죽이고 다소 독립적이던 제나라와의 동맹을 끊었으며 유방이 관중으로 진군하던 사이 40만 반진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의 주력군인 장함의 군대를 거록에서 물리쳤다. 그러나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함의 항복을 받고 60만 대군이 된 항우의 연합군은 진나라 사람들의 반항으로 진군이 지체되었으며 결국 신안에서 20만 진나라 투항군들을 살육하고 생매장함으로써 진나라 사람들의 철천지 원수가 되고 만다. 결국 '신안의 20만 생매장 사건'으로 항우는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정복하고도 관서 지역에서 창업하지 못한 채 강동으로 '금의환향'하여 팽성을 수도로 '서초패왕'의 길을 택한다. 초나라 패왕 항우는 결코 진나라까지 정복할 수 없었다.
관서지역의 민심은 함양에 먼저 도착하여 '약법삼장'으로 진나라 사람들의 망국의 한을 어루만진 '한왕' 유방의 차지가 된다. 이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국은 다수 민중의 민심을 얻은 관서의 유방 한(漢) 나라와 각국 영지의 지도자들을 지배하려는 관동의 항우 초(楚) 나라의 건곤일척 천하쟁패의 양상으로 진화한다. 열국의 복고주의자들은 유방의 '연횡책'과 항우의 '합종책'을 두고 이해득실을 저울질하며 다시금 전국시대처럼 '합종연횡'을 재현했으나 관건은 더 이상 전국시대처럼 지배계급의 이익 보다는 '초한전쟁'에서 어느 편이 더 민심을 얻는가의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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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의 책사 장량이 기획한 '전국시대'에서 '초-한 쟁패'로의 정국 이행은 '전국시대'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포스트-전국시대'의 정세에서 '팽성 대전'과 '형양 전투'를 거치며 수세에 몰린 유방으로 하여금 다수 민중의 민심과 군웅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결국 마지막 '해하의 전투'의 승리를 쟁취하게 만들었다. "민심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결론은 '항우에서 한신으로' 이어지는 [초망]에서 다루는 주제이므로 다음에 살펴보기로 한다.
[진붕]의 결론은 '포스트-전국시대' 정세에서 '진나라 붕괴(진붕/秦崩)'의 원인이다.
"진나라 말의 역사... 후안무치한 영웅시대였다... 모두 음모와 모략 뿐이었다... 당시 역사 무대에서 각축을 벌이던 정치인물들은 단지 권력과 이익만을 따졌고 윤리도덕에 구애되지 않았다. 그들은 인생의 근본이 이익에 있다고 보았다. 이익이 있는 곳이 바로 행동이 있는 곳이었다. 이익은 도덕과 무관했고, 이익이 도덕과 충돌할 때는 도덕을 버렸다. 윤리도덕의 규범이 세워진 건 한왕조가 들어서고도 100년이 지나서다... 덮어놓고 진취와 발전만 추구한 게 사회의 불안을 초래... 오랫동안 공리주의를 받들어 실행한 반면 윤리도덕의 규범 및 인문교육 체계의 건설을 홀시... 진제국 멸망의 원인..."
- [진붕], <8-10. 진나라 멸망의 역사 교훈>, 리카이위안, 2015.
사실 진시황과 유방은 '동시대인'이었다. 진시황 영정은 유방보다 고작 세 살 많았다. 13세에 온갖 고난 끝에 진왕이 된 영정은 마흔 전에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가 되었으나 정복의 근성을 버리지 못한 채 민중들을 끊임없이 동원하고 괴롭히다가 50세에 죽었다. 유방은 50세가 거의 다 된, 지금 나와 동갑인 48세에 봉기하여 50대 중반에 천하를 통일했다. 이들 세대는 모두 '천하'를 위한다는 '공리주의'를 앞세워 이익을 쫓던 '영웅 시대' 인물들이었다. 진나라 통일의 마지막 주역 이사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많았고 전국시대의 틀을 깬 항우는 유방보다 스무살 이상 적었다. 진 2세 호해를 앞세워 부소와 몽염의 세력을 숙청하고 승상 이사까지 제거한 조고는 고증에 의하면 거세된 환관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진제국의 황제 측근 최고 관료였는데, 유방과 동갑인 조고는 유방이 관중에 진입한 후 2세 황제를 버리고 유방과 손잡으려고 했던 진말 '이익 최상주의자'의 전형이었다. 물론 부소라는 '도덕'을 버리고 호해라는 '이익'에 아첨하며 목숨을 부지하려던 이사는 그의 본보기였다. '법가'를 숭상했다는 진나라는 공손앙(상앙)부터 여불위는 물론 이사와 조고까지 본인 스스로가 놓은 수에 본인이 걸려 넘어졌고, 진나라 자체의 운명도 그러했다. 열국을 짓밟고 민중을 잔인하게 억압하며 수탈했던 진나라는 이들 다수 피억압자들의 손에 붕괴되고 말았다. 그 선봉에 진나라를 향한 복수심이 가장 강했고 가장 광범위했던 초나라 사람들이 앞장섰을 뿐이다. "초나라에 '3호'가 남는다 할지라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은 반드시 초나라다"라는 참언에서 이르는 '3호', 즉 세 집은 바로 진승, 항우, 유방이었다([진붕],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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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초-한(秦-楚-漢)' 이행기는 '전국시대'에서 '제국'으로 이행하는 첫 과도기였다. 리카이위안이 규정한 '포스트-전국시대'는 '전국시대'의 '후기'로서 '제국'을 본격적으로 열기 위한 준비기였다.
진시황이 놓은 제국의 초석은 서초패왕 항우의 '논공행상' 전략을 통해 기존의 전국시대와 새로운 제국의 제도간 '시간적(통시적)' 접속을 시도했고, 한고조 유방은 반진의 선봉인 초나라에 갇힌 제도를 진나라의 그것과 '공간적(공시적)' 접속을 완수하면서 2천년 중국역사의 원형을 만들었다.
이렇게 '포스트-전국시대'의 이행기에서 "진나라가 붕괴한다(진붕)".
그리고 8년의 '초한전쟁'을 거쳐 "초나라가 멸망([초망])"하면서 '포스트-전국시대'는 막을 내린다.
[진붕] 이후 [초망]이 임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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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2.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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