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는 '멸종'하지 않는다
'동화'는 '멸종'하지 않는다
- [그림 동화], 그림 형제, 1812~1819.
"... 동화를 읽는 인간은 멸종해 가지만, 인간에게는 동화가 결코 멸종하지 않기 때문...
바로 그러한 점을 '시(詩)'가 모든 영원한 것과 공유한다...
그것(동화)은 좋은 말 한 마디와 똑같이 우리 심성의 증언이다."
- [그림 동화], <2판 서문>, 그림 형제, 1819.7.3.
신기했다.
오래 전인 19세기 초에도 '동화'를 읽는 인간들이 '멸종'해 갔다니.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이 되어 왔고,
어른이 된 인간은 대부분 '동화'를 읽지 않았다.
1.
내가 '동화'를 다시 읽게 된 건,
초등학교 4학년인가 대략 열살이 넘었을 때부터 친다면,
첫 아이를 만난 서른셋까지 대략 20년 이상이 지난 후였다.
어린 시절,
책을 좋아했던 건 아니었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으니 책 속의 삽화를 보기 위해 '동물백과사전'을 들고 다녔고 '세계문학전집'을 펼쳤다.
몇몇 이야기는 TV에서 방영해 주던 일본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를 통해 대강 알았고, 오랜 시간 노란색 표지의 전집 앞에서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주로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집어든 동화책의 흑백삽화를 보며 어린 나는 상상을 펼쳤다.
초등학교 4학년 특활시간 독서반에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를 한 학기 내내 들고 다녔던 이유는 그 나이까지 책 한 권을 이어서 읽을 줄을 몰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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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코넌 도일의 셜록 홈즈 단편들을 빌려 읽으면서 나는 비로소 단편이나마 책 한 권을 온전히 읽을 수 있게 되었으니, 사실 어린 시절에 제대로 읽은 동화책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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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했던 로버트 스티븐슨의 [보물섬]조차도 아마 나중에서야 온전히 읽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세계명작동화' 전집에 수록된 아주 짧은 이야기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몇 편 읽기는 했으리라.
[이솝 우화]나 [그림 동화] 같은.
2.
내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었지만,
실은 내가 제대로 읽어보고 싶었다.
애기들 잠들기 전 40페이지 짜리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세계명작동화'를 주로 읽어주다가, [보물섬]이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빨간머리 앤], [오즈의 마법사] 등은 성인판으로 구해서 다시 읽었다. 국역으로도 읽고 영문판을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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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안데르센을 포함하여 장편 동화들은 비단 어린이들만을 위한 서사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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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고전동화들은 인류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이솝이나 그림 형제의 동화는 그닥 관심이 가지 않다가,
어느날 문득 유럽의 [신데렐라]와 우리의 [콩쥐팥쥐] 사이에서 동서양 구전동화의 '양자역학'을 떠올렸다.
서로 접촉이 없었을 것 같은데도 동일하게 전개되는 이야기.
[신데렐라]는 프랑스 동화수집가 샤를 페로를 통해서도 전한다지만, 독일의 학자 그림 형제의 수집본에서도 볼 수 있다.
제목은 [재투성이]다.
법학을 공부했다는 독일의 인문학자 야코프 그림(Jacob Grimm : 1785~1863)과 빌헬름 그림(Wilhelm Grimm : 1786~1859)은 독일 각 지역의 방언으로 구전되는 민담을 수집했다. 이들은 '그림 형제'로 불렸고 그림 형제가 모아서 엮은 이야기는 [그림 동화]로 우리에게 알려져 왔다.
독일 최초의 이 동화 모음집의 독일어판 원제는,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다.
1812년에 1권을, 1815년에 2권을 출간한 그림 형제가 [그림 동화] 2판을 내던 1819년 7월에 쓴 '서문' 격의 글 <민중문학의 바탕은 초록풀밭과 같다>에서 19세기 초반 당시에도 "동화를 읽는 인간은 멸종해 가지만..."이라는 요즘 들어도 익숙한 문장을 읽었다. 더 읽어보니 당시에도 시대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이야기 전승의 풍속이 사라지고 있는 풍토가 염려되었던 거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어른들은 당시 젊은 것들이 싸가지가 없어서 세상 말세라고 했다더니, 어쨌건 간에 오래 전부터 '동화를 읽는 어른'들이 이미 '멸종'해 가고 있었다니 새삼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세태에도 불구하고 그림 형제는 동화 같은 구전 이야기가 '초록풀밭'의 이삭과 씨앗들처럼 '시(詩)'의 모습으로 노래처럼 구비구비 전해져왔다고 쓰고 있다.
문자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이어진 이야기들은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교훈을 담고 있기도 하고 흐지부지한 결론의 전개 후에 뭔가 여운을 남기는 '동화'로 남기도 하는데, 그림 형제는 이런 이야기들이 인간의 맑은 영혼과 심성을 '증언'한다고 말한다.
추운 겨울에 화롯불 앞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들려주시던 독일 '가정의 동화(hausmärchen)'는 내 어머니가 어린 나를 아랫목에 앉혀놓고 조곤조곤 이야기해 주시던 동아시아의 도깨비불이나 구미호 이야기와 같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림 형제의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는 19세기 당시 독일 각 지역의 방언을 그대로 살리고 표준어를 두루 쓰면서 이후 독일어사전 편찬 작업 등에 큰 기여를 했단다. 그림 형제는 인문학자답게 1~2권은 이야기 모음집으로, 3권은 구전민담에 관한 방대한 연구논문으로 남겼다는데, [그림 동화]는 독일어 뿐만 아니라 독일문학에서도 아마 중요한 문헌일 수도 있겠다.
우리의 독문학자인 서울대 전영애 명예교수와 경북대 김남희 교수가 함께 지금껏 우리에게 익숙해 온 각색된 내용이 아닌 그림 형제가 채집하여 편찬한 독일어 원본 이야기 1~2권을 그대로 우리말 번역한 [그림 동화]를 펼치면 '날 것 그대로'의 동화를 접하게 된다.
[재투성이]에서 신데렐라의 가짜 언니들은 유리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가락과 뒷꿈치를 잘라 피바다를 연출하다가 악의 축이었던 새엄마의 거취는 온데간데 없이 새언니들만 신데렐라와 왕자의 결혼식에 가서 아양을 떨던 중 비둘기들에게 두눈을 쪼이고,
[눈처럼 하얀]에서 백설공주의 간과 심장이라고 착한 사냥꾼이 거짓으로 가져다 준 걸 남김없이 먹어치운 새엄마는 몇 차례 '미녀살해' 시도를 실패한 후 궁극에는 백설공주와 왕자의 결혼식에 굳이 또 구경갔다가 갑자기 나타난 불에 달궈진 쇠구두를 뜬금없이 신더니 뜨겁다고 춤추다 죽는다.
[라푼첼]의 결말은 라푼첼을 탑에 가둔 새엄마에게 속아 왕자님은 역시 두눈을 멀게되고 권선징악은 건너뛴 채 그냥 버려진 황무지에서 어쩐 일인지 이미 쌍둥이의 엄마로 살고 있던 라푼첼과 왕자가 다시 만나 심봉사와 심청이 부녀처럼 광명 찾고 잘 산다고 하면서 '갑분싸'로 끝나기도 하고,
[가시장미]에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건 왕자의 목숨을 건 용맹이 아니라 마녀의 예언대로 공주가 물레에 손을 찔려 잠든지 100년이 지나 마법이 풀린 순전한 운발이었는데 그 전에는 수많은 왕자들이 잠든 왕국의 문을 열다가 죽어갔지만 주인공인 운좋은 왕자는 하필 왕국이 잠에서 깰 때 들어간 거였다.
[헨젤과 그레텔]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 애초에 식량이 없다며 남매를 숲에 버리자고 했던 새엄마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이 한 줄로만 적힌 건 권선징악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당시 기근의 무서움을 은연 중에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는데 아동 유기로 입을 줄였음에도 역시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현실의 은유일 수도 있겠다.
그 외에도 [브레멘 시립음악대]나 [빨강 모자] 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는 그림 형제가 수집한 구전이야기 원작은, 그럼에도 우리가 읽어 온 '세계명작동화'와 다르다.
인위적인 훈육의 내용으로 수렴된다거나 명확하게 남기는 교훈의 메시지 같은 건 없다.
3.
그렇게 '교훈'이란 근엄한 지시와 통제 같은 기제로 전해지지 않는다.
아무리 '동화'의 교훈을 읽는 인간들이 멸종의 위기에 매번 봉착한다 해도,
날 것 그대로의 그림 형제 구전동화는,
노래처럼 수세기를 전해져 내려온 서사의 힘을 증거해주고 있다.
때 되면 흥얼거리는 시처럼 노래처럼,
'동화' 같은 인류의 옛날 이야기는,
'초록풀밭'처럼 결코 '멸종'하지 않는다.
***
- [그림(Grimm) 동화 : 아이들과 가정의 동화(Kinder und Hausmärchen)](1812~1815), 야코프/빌헬름 그림 형제, 전영애/김남희 옮김, <민음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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