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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02. 2024

3.1절에 영화 [파묘]를 보다

- [파묘(破墓)], 장재현, 2024.

3.1절에 영화 [파묘]를 보다

- [파묘(破墓)], 장재현, 2024.





1.


3.1절에 영화 [파묘(破墓)]를 보았다.


직장 동료들의 호평도 있었고, 2월 마감 후 선물같은 3.1절 연휴에 뭘하고 놀까 하다가 오랫만에 처와 함께 극장에 가볼까 싶어 나선 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인 종교적 신비주의와 '이단' 또는 오컬트(신비주의)와 카발리즘(밀교) 등을 배경으로 하는 [검은 사제들](2015)과 [사바하](2019)를 만든 장재현 감독이 올해 발표한 영화 [파묘](2024)를 보니 3.1절 즈음하여 개봉한 이유가 있었다.


저녁에 집 근처 영화관에 예매하고 처랑 '사전정리' 차원에서 집의 VOD로 영화 [곡성](2016)을 볼 때만 해도 난, 같은 감독의 작품인줄 알았다. 나홍진 감독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곡성]이 장재현 감독 작품으로 알고 있었다. 영화를 잘 모르는 나의 장르적 선입견이었던 거다.


어쨌든,

3.1절 낮에 집에서 다시 본 [곡성]에도 '일본 악마'가 등장했는데,

같은 날 저녁 극장의 [파묘]에서 나는 또 다시 '일본 귀신'을 보았다.



2.


"일찍이 '음양가'의 학술을 가만히 살펴본 적이 있는데, 길흉의 징조에 너무 집착하여 금하고 피하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하여야 한다는 것은 놓칠 수 없는 점이다..."

- 사마천,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기원전 1세기에 중국사의 '족보'를 [사기(史記)] 130권으로 처음 엮어낸 사마천(司馬遷)은 한무제 당시 상대부 호수라는 사람과의 문답형식을 통해 본인이 아버지 사마담을 계승하여 '긴 역사'로서의 '대(大)역사(빅 히스토리)' 서술을 이어가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기]의 <서문>격인 이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본기> 12권, <표> 10권, <서> 8권, <세가> 30권, <열전> 69권에 이어 마지막 130번째 권이다.

<태사공자서>를 통해 '태사공(太史公)' 사마(司馬)씨의 유래와 천문 및 역술을 너머 역사 서술을 가업으로 삼은 배경을 밝히고 '백가쟁명' 시대의 '유가', '법가', '묵가', '명가', '도가', '음양가' 등을 일별하면서 상대부의 질문에 춘추시대 공자로부터 전국시대 한비자까지 이르는 '역사서술'의 그 '역사적' 이유를 스스로 논한다. 문답형식을 빌지만, 굳이 '스스로' 논하고 있어 '자서(自序)'이며 마지막 <130권>임에도 모름지기 [사기]의 <서문>이다.


'획린(獲麟)이란 기원전 481년 춘추시대 노나라 애공이 서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기린'을 잡은 일인데, 당시 역사서 [춘추]를 쓰고 있던 공자는 '성인군자'가 나타나지도 않은 상황에서 '신비로운 동물'이 잡힌 상황을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춘추(春秋)] 저술을 중단했다. 흉노에 중과부적으로 맞서다가 항복한 한나라 장수 이릉을 변호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사기] 저술을 위해 자존심을 꺾고 궁형을 받은 '이릉의 화(이릉지화/李陵之禍)'를 겪은 사마천이 [사기]를 저술하면서 던진 화두는 "과연 하늘의 도는 무엇인가?"였다. 한무제의 절대권력을 중심으로 이때다 싶어 반대파 이릉을 헐뜯고 비난하면서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려던 정치모리배들과 소인배들은 [사기]를 통해 인류 역사서술에 크게 기여하게 될 사마천을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으며, 그러거나 말거나 절대독재자 한무제는 '기린'을 잡아 '성인군자'가 되려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사마천의 눈에 비친 한무제 대의 당시는 공자가 붓을 꺾던 '획린'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사마천은 '역사'를 기술했고 인류의 역사서술에서 큰 '기린'이 되었는데, 그는 <태사공자서>에서 "[주역]의 <대전>에 '천하는 하나인데 생각은 각양각색이고, 귀착점은 같은데 가는 길은 다 다르다'고 하였듯이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들은 다 같이 세상을 잘 다스리는 일에 힘쓰지만 그들이 따르는 논리는 길이 달라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며 당시까지 잔존했던 6개의 제자백가들의 특성을 논한다.


이 중 '음양가(陰陽家)'는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따라 자연을 해석하고 이를 인간사에 적용하는 경향이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51


"무릇 '음양가'는 사계절, 8방, 12차, 24절기마다 거기에 해당하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그에 따라 잘 행하면 번창하고 거스르면 죽거나 망한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서 '사람을 구속하고 겁을 먹게 하는 일이 많다'고 하였던 것이다. 봄에 태어나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고 겨울에 저장하는 이 자연계의 큰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천하 모든 일의 앞뒤가 없어질 것이다. 그래서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일하여야 한다는 것은 놓칠 수없는 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 사마천, [사기], '권130 태사공자서',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즉, 자연의 사계절에 맞추어 인간이 순응하고 노동한다는 원리는 합당하나, 너무 이에 끼워 맞추면 인간사를 너무 구속하게 된다는 사마천과 그의 부친 사마담의 2천년 전 통찰이다. '점(占)'을 쳐서 '길흉(吉凶)'을 가리고자 하는 인간들의 나약함을 경계하는 이 관점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41


"이 땅은 우리 손주들이 살아갈 땅이야."


풍수지리를 보는 지관인 김선생(최민식)이 영화 중후반부에서 한 대사가 대략 이 말이다.



친일파 자손들의 귀신병을 고치기 위해 무당(김고은)이 협업을 위해 찾아간 기독교인 장의사(유해진)와 함께한 지관 김선생은 이장할 묘지가 악지 중 최강 악지라는 걸 알고 처음부터 발을 빼고자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악지의 영향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결국, 영화에서 복선이 된 "여우가 호랑이의 허리를 끊었다"는 대사는, 중후반에 이르러 오래전 일본 '음양사'인 '여우' 같은 일본 승려가 앞잡이 친일파 고관대작을 중요한 지점에 매장했다는 의미였던 것인데, 그 땅이 대륙을 움켜쥔 호랑이 형상인 한반도의 척추 중간 허리쯤이라는 거다.

태백산맥 줄기의 허리 쯤에 강력한 쇠말뚝(鐵針)을 박았다는 역사적 식민야사가 이 영화의 모티브다.


한반도의 기를 끊기 위해 강원도 고성 어딘가에 일본의 '음양사'가 박아놓은 쇠말뚝을 덮기 위해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친일파 고관대작의 묘로 첩장을 했다는 진실이 밝혀졌다. 그 동안 조선독립을 꿈꾼 '도굴꾼'들이 수많은 '쇠말뚝'들을 뽑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중국 고대의 '음양가'와 같은 일본 근대의 '음양사' 승려의 묘수가 숨어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깨비 불'이자 쇠말뚝의 수호신인 일본 사무라이 장군(다이묘) 귀신이 등장한다. 삼국지 장수들처럼 키가 구척 정도 되는, 대략 2미터 70센티미터는 되는 거구의 귀신은 일본 갑옷을 입은 뿔이 두 개 달린 일본 귀면(도깨비) 상이다. 무당과의 대화에서 일본 중세 전국시대 마지막 전투였던 세키가하라 전투를 언급하는 것을 보면 '정한파'였던 토요토미 가문의 마지막 가신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쇠말뚝이고 뭐고 현재 먹고사는데 문제 없으니 무시하고 내빼자는 기독교도 장의사에게 지관 김선생이 한 말이, 중요한 건 땅이고 이 땅은 우리 손주들이 계속 살아갈 소중한 공간임을 역설한 게 예의 그 대사였다. 영화는 '민족정기'의 이념을 '땅'이라는 자연적이고 물질적 공간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다. 일본 귀신을 밖으로 유인하고도 찾지 못한 쇠말뚝은 결국 다름아닌 수직으로 박혀있던 일본 다이묘 귀신의 관, 즉 그 귀신 자체였다. '쇠(金)'로 대표되는 일본 장군의 시신 자체가 한반도의 허리를 끊는 거대한 쇠말뚝이었던 것이다. '쇠말뚝'을 객관적 사물로서 객체가 아닌 역사인식을 담지한 귀신이라는 주체로 반전시키는 장면에서는 '현대철학'적 인식론의 전환도 보인다.



근대 일본 '음양사'의 술수에 대항한 현대 한국의 '풍수지리' 지관 김선생의 최후 일격 또한 '음양가'의 그것이었다.


괴력의 거구인 일본 장군 귀신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궁금하던 찰나에 '음양가'에는 '음양가'로 대적하는 것이 기발하고도 유일한 해법이었다. 즉, '오행'의 상극과 상생원리가 그것인데, '쇠(金)'의 상극인 '나무(木)'로 물리치되 상극은 대등하므로 '나무(木)'와 상생인 '물(水)'과 결합하여 물리치는 것이다. 물이 나무를 낳는다는 '수생목(水生木)'의 원리로 지관 김선생은 오래전 독립투사 도굴꾼들의 비장한 이름들이 새겨진 곡괭이 나무자루(木)에 일본 귀신한테 얻어터진 자신의 피(水)를 묻혀서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이건 뭐 글로 쓰니 액션영화 같지만 실제로 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꽤나 '음양오행'적이고 장재현 감독스럽게 오컬트적인데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동양적 밀교와 신비주의를 '음양가'적으로 섞은 장면이다.


그래도 장재현 감독의 동양 밀교적 정수영화는 내겐 아직 [사바하]다. 서양식 성경에 나오는 '베들레헴 영아학살'을 주요 모티브로 하여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동양의 사천왕은 영화 [사바하]에서 부처가 아닌 영생의 이단교주를 호위하는 장군신이 되었다. 종교적 상상력의 융합이 상당하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352


영화 [파묘]는 한반도의 식민역사에 '음양가'적 야사는 물론 샤머니즘과 풍수지리 등의 관념론적 소재와 '땅'이라는 지극히 유물론적 메시지를 고르게 잘 섞었다.

지극히 고전적이며 현대적인 영화다.




3.


여기서도 나는 현대의 이야기보다, 영화에서 직접 묘사하지 않는 오래된 투쟁을 본다. 흑백사진을 보듯 근대 일본의 '음양사' 승려의 여우같은 신비주의적 계략과 이 쇠말뚝을 캐내려는 독립투사들의 우직하고도 비장한 도굴과정을 상상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54


[검은 사제들]을 보고나서 법정에 선 퇴마사 신부의 제도적 투쟁과 악령이 깃든 부사제의 영적 투쟁의 속편을 기대했듯,

[사바하]를 보면서 근대부터 현대까지 100년 이상을 살아온 이단교주의 삶을 상상했듯,

영화가 직접 그리지 않는 '부재(不在)'하는 이야기가 항상 궁금하다.


역시, 내 삶의 주제는 '부재(不在)'인가 보다.


***


1. [파묘(破墓)], 장재현, 2024.

2. [사기(史記)], 사마천(司馬遷) / 김영수 옮김, <알마>, 2010. /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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