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절'을 놓치지 않으려면
'계절'을 놓치지 않으려면
- [설국(雪國)], 가와바타 야스나리, 1947.
1.
오랜만에 담배를 산 건,
오로지 '계절'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2018년에 26년간 피워 온 담배를 '끊었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참았다'.
끊었다 착각할 정도로 잘 참았지만 회사의 인사이동으로 2021년 겨울부터 시작된 나의 첫 자취생활 동안 수시로 깨어나는 매일의 새벽 한밤을 맞이하기엔 그래도 담배가 적격이었다. 그래서 하루에 새벽 그 시간에 한 까치만 태우기로 하고,
4년 만에 담배를 샀더랬다.
때는,
2021년에서 202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었다.
스무살이던 1993년 초에 내게 담배를 가르쳐 준 이는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의 '물새' 최민수였다. 극을 시작하는 오프닝의 푸른 배경에서 내뿜어지는 흰 연기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나는 담배를 필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렇다.
내게 담배는,
곧 '겨울'이었다.
2.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国境の長いトンネルを抜けると雪國であった)."
- [설국], '첫 문장', 가와바타 야스나리, 1947.
'첫 문장'으로 유명한 책들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1859),
허먼 멜빌의 [모비 딕](1851) 등.
https://brunch.co.kr/@beatrice1007/71
https://brunch.co.kr/@beatrice1007/386
https://brunch.co.kr/@beatrice1007/325
그리고 오로지 '첫 문장' 하나로 유명한 소설이 있다. 바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1899~1972)의 [설국(雪國)](1935~1947)이다.
소설은 우리로 치면 일제강점기 말기에 작가 나이 36세부터 48세(1935~1947)까지 12년 동안 씌어지고 다듬어졌단다.
내용은 당시의 제국주의적 국제 정치경제 및 사회 배경과 전혀 상관 없다. 그저 '눈의 고장'인 일본의 간토(관동) 지방 니가타 현의 '유자와' 온천 일대를 '설국(雪國)'으로 규정하고는 눈의 배경과 그 속에 녹아드는 인물들의 심리를 묘사한다.
1935년에 창작되었지만 1948년에 소설집 [설국]으로 출간되고, 1968년에 인도 시인 타고르에 이어 아시아 지역의 동양인으로서 두 번째로 [설국]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일본의 '상징주의' 또는 '신(新)상징파'나 '심리소설' 등의 거창한 이유보다는,
오직 소설의 모든 걸 담아낸 예의 '첫 문장'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자 주인공 시마무라가 사는 도쿄는 도시,
도쿄 도를 떠나 군마현을 지나며 니가타 현의 '눈의 고장'으로 들어가는 현의 '접경'은 도시적 '일상'과 몽환적 '설국(雪國)'을 가르는 '국경(國境)'으로 표현된다.
"눈 속에서 실을 뽑고, 눈 속에서 짜며, 눈으로 씻고, 눈 위에서 바랜다. 실을 뽑기 시작하여 천을 다 짜기까지 모든 일이 눈 속에서 이루어졌다."
-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1947.
부모 유산으로 놀고 먹는 남자인 시마무라와 '설국'의 게이샤인 고마코, 정체불명의 여인 요코.
이렇게 3인이 등장하되, 150페이지 분량의 소설 내내 별다른 사건이나 전통적 구성(플롯)도 없이 눈의 고장인 '설국' 니가타 현의 온천장 일대를 무심하게 그려낸다.
고마코와의 남녀 애정행각에 대한 구체적 묘사 따윈 없다. 그냥 소설 초반 '설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요코를 처음 보게 되면서 갑자기 '설국'의 게이샤 고마코 생각을 하며 그녀 몸 속 체취의 기억이 남은 자신의 왼손 검지 손가락을 코에 대고 냄새 맡는다. '설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요코의 정체는 끝까지 언급되지 않는다. '설국'의 온천장에서도 게이샤 고마코와의 관계는 겉돌기만 할 뿐이다. 나는 시마무라의 검지 손가락의 활약을 내심 기대했지만, 그저 우리 황순원 선생의 소설 [소나기](1953)를 읽었을 때 정도의 정서만 남고 만다.
소설 마지막 장면의 영화관으로 쓰이던 고치 창고의 화재 현장에서 요코가 왜 이층 객석에서 떨어졌는지 앞뒤 맥락 같은 것도 없다. 그저 화재 현장과 대비되는 '설국'의 밤하늘에 펼쳐지던 은하수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 고마코에게 시마무라가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다가 요코를 고마코에게서 빼앗아 안으려고 하는 사나이들에게 밀려서 비틀거렸다. 발에다 힘을 주며, 버티고 선 채 눈을 쳐든 순간, 쏴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은하수가 시마무라의 속으로 훌러내리는 것 같았다."
- [설국], '마지막 문단', 가와바타 야스나리, 1947.
특별한 플롯도 없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 전개 또한 없지만, 겨울이면 으레 떠오를 만한 소설로서의 [설국]의 고전적 힘은 역시,
도쿄의 도시적 '현실'과 니가타 현의 몽환적 '설국'을 가르는 위대한 '첫 문장'에서 기인한다.
계절로서의 '겨울'은 여전히 소설 [설국]을 부르고,
소설 [설국]은 '겨울'이라는 계절을 내내 놓치지 않는다.
3.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을 좋아하는 나는,
이 계절을 여태 글로 써보지 못했다.
항상 끊기보다 참았던 담배 생각이나 아니면 짧은 생애 특정한 추억 따위로 그 계절의 정취를 대신하게 되어, 내가 좋아하는 그 계절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까봐 이러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렇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여전히 놓치고 산다.
겨울.
계절의 입김을 담아 내뿜는 담배연기 말고 이 계절을 기억하기 위해 마을 도서관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고전소설 [설국]을 빌려서 나온 그날,
몽환적 책의 나라와 현실 세계를 나누는 '국경'을 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우연하게도 눈이 내렸다.
그리고 소설을 읽는 3일 내내 줄곧 눈이 내리고 또 쌓였다.
의도했건 아니었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1935~1947)은 '겨울'이라는 이 '계절'을 놓치지 않게 해주었다.
때는,
추억이나 사건, 또는 풀롯 따위는 없는,
2026년 초의 '겨울'이었다.
***
1. [설국(雪國)](1935~1947),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장경룡 옮김, <문예출판사>, 1977.
2. [소설가의 첫 문장], 김대웅 엮음, <북플라자>, 2024.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beatrice1007&logNo=224147150846&navType=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