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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스 Aug 13. 2020

PT를 마치고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숙명처럼



내가 하는 일은 참 여러 가지 수식어로 정의된다. PR, 홍보대행, 광고,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퍼포먼스, 컨설팅 등 그때그때 필요에 의해서 어필하는 전문성이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달라지지 않는 속성은 내가 뼛속까지 기획자라는 사실이다.

기획자는 일을 도모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고 설명하고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 그 기회 역시 단독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대부분이 경쟁 PT(프레젠테이션)라는 절차를 통해 왜 선택되어야 하는지를 증명해야 한다.

PT는 늘 긴장된다.
아마 골백번 거듭해서 익숙해져도 똑같을 것이다. 해결할 과제를 정의하고 나름의 솔루션을 찾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은 고민의 깊이만큼 길어진다. 그 시간에 비하면 30~40분 정도 주어지는 발표 시간은 가혹하다. 그 응축된 시간 안에 임팩트를 줘야 하기 때문에 혼자가 아닌 다수의 노력과 열정이 범벅이 된다. 준비하는 과정 안에서 여러 아이디어가 화학작용을 일으켜 활자로 그림으로 그리고 영상으로 다듬어진다.

PT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만큼은 아드레날린이 샘솟는다. 나의 발언하나 몸짓 하나가 평가받고 우리의 가설이 실험대에 오른다. 그리고 마침내 결론이 난다. 쏟아부은 에너지가 클수록 발표가 끝나고 찾아드는 허탈감의 무게도 무겁다.

어떤 PT는 후회가 남기도 하고 어떤 발표는 후련하다. 그만큼 여한이 없다는 의미다. 평가자의 눈빛과 표정 하나에 촉각을 세웠던 신경들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긴장이 이완된다.

때로는 가망 없는 PT를 도전이라는 명목으로 극복해야 하는 상황도 있다. 주로 우리가 제공한 서비스를 연장하기 위해 경쟁자로부터 프로젝트를 수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종종 일어난다. 고객이 이전에 제공받았던 우리의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찾을 때인데 이미 선택지에 우리가 제외되었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리한 현재의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는 단 하나의 기대와 단 한 줌의 자신감에 기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프리젠터와 호흡하는 청중 따위는 없고 세상에 홀로 선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제한된 발표시간을 조금이라도 넘길 기세면 발표 도중이라도 서두르라는 독촉을 받는다. 두어 번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끝까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놓고 온다는 PT전의 각오가 무색하게도 자신감은 이미 바닥을 치고 있다.

힘든 PT 하나를 끝냈다. 좋은 PT는 들을 자세가 되어 있는 청중이 뿜어내는 공기에서 발현된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상대가 느낀다면 당락에 상관없이 대개는 ‘고생했다’ ‘많이 준비해줘서 고맙다’는 피드백을 듣는다. 오늘은 운 나쁘게도 좋은 기운도 느낄 수 없었고 준비과정의 수고스러움도 인정받지 못했다.

마치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설익은 출연자의 역량과 실력을 난도질하는 패널의 자세로 우리가 준비한 방향성의 허점을 재단했다. PT 장표는 우리와 고객의 파트너십, 원팀으로서 프로젝트를 어떻게 이끌고 싶은지 포부를 이야기하지만 실상 현장에서 전달되는 건 프로젝트 수행사로 선정되기도 전에 경험하는 갑의 ‘위력’이었다. 그 위용에 억눌리면 채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지친다.

그래도 나름 인내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 자리에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에 감정 이입한다. 조금 덜 존중받더라도 프로젝트에 입장하기 위한 비싼 티켓값을 치른다고 생각한다. (때론 그 입장료가 무지 비싸서 속이 쓰릴 때도 있지만)

오랜 기간 경험을 토대로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찾았다. 쏟아부은 에너지에 대한 보상으로 나에게 선물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책이 되기도 하고, 스마트폰 케이스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족하다.

일종의 스스로에게 내리는 보상과도 같은데, 매번 정해진 루틴이 있거나 위시리스트가 정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점에 가장 갖고 싶은 것이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뭔가를 PT날짜에 맞춰서 주문해둔다.

사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선물보다도 경쟁에서 이길 때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를 낼 때만큼 신나는 일은 없다. 우선순위 협상자로 선정되면 단 하루 즐겁다. 당장 시작될 프로젝트 압박으로 잠 못 이룰 날이 많아지더라도 그날 하루 정도는 온전히 즐거움을 만끽하고 나눠가진다.  

오늘 또 하나의 경쟁 PT 성적표를 받아보았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함께할 수 없다’는 건조한 메일 사이로 ‘다음을 기약하자’는 메시지가 박혀있다. 이 기약이 보증되지 않은 공수표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아마 지금 하는 기획 일을 때려치우지 않는 이상은 앞으로도 골백번은 맞닥뜨릴 현실이란 점도 알고 있다.

그래도 또 다음 PT를 준비할 것이다. 내 생각과 주장을 설득하는 표현으로 온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는 30여분의 무대를 위해!! 설령 그 결과가 반드시 해피엔딩이 아닐지라도 웃고 버티고 극복하고 또 도전하고 넘어지고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는 일을 반복할 것이다. 그게 어떻게든 일을 도모하여 증명하는 기획자의 숙명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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