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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기장 Apr 21. 2022

일에 대해 어디까지 진심이어야 할까?

소진, 자기 보호

  오늘은 맹하게 있다가 급식지도를 잊어버렸다. 무언가를 실수 빠뜨렸다는 느낌보다는 나사 하나를 빠뜨렸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나의 학교 생활은 너무 정신이 없다.


  어제 일과를 살펴보면 학교 오자마자 아침자습시간에 반별 검사를 실시했다. 1교시에 잠시 숨을 돌리려는데 교과 선생님과 울고 있는 학생이 들어온다. 진정을 위해 상담실에 머물렀다 담임에게 인계 부탁한다 한다. 2교시에 다른 학생 상담이 있기에 쉬는 시간에 담임에게 대략 자조치종을 설명하고 학생을 넘기려 한다.

  담임 선생님도 무척 바쁘시다. 수업태도가 나빴던 반 아이들을 지도하고 뛰어 올라가는 담임을 부른다. '무슨 일이세요? 저 지금 학생 상담 있는데요.' 자초지종을 간단히 설명하자 더 정확히 누구누구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 설명해달라 한다. 자세한 건 학생에게 물어달라 하자 이번 쉬는 시간 학생 상담이 끝날 때까지 학생을 맡아달라 하고 뛰어올라가신다. 나도 상담이 있는데.... 둘 다 바쁜 건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금 늦게 1교시 학생을 올려 보내고 상담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2교시 학생을 마주한다. 요즘은 학생 정서행동특성검사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방문한다. 여기서 상담교사가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자살생각이 있는 학생의 위험성을 평가하는 것이다. 예민하 보수적으로 판단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쓴다.


  3교시에 잠시 숨을 돌리는데 행정일이 몇 가지 온다.  4교시와 점심시간은 장기결석생의 가정방문, 5교시는 그에 대해 교감선생님과의 대화, 다른 학부모 상담 전화가 온다. 6교시 또 다른 심각한 학생을 만났는데 아이가 위험 상황에 있다는 것을 상담이 끝나기 직전에 이야기하게 되어 7교시까지 상담이 이어진다.


  이 모든 게 끝나고 나니 4시 15분... 4시 30분에 칼퇴를 한다. 그래도 칼퇴를 했기에 다행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집에 오자마자 쓰러지듯 누워 한 시간 정도를 잔 것 같다. 긴장이 풀리자 안구 주변에 두통이 온다.



  이 과정에서 매 순간 신경 쓰는 것은 관리자들의 눈이다. 관리자들이 꼬투리 잡아 내게 처벌을 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올라온다. 다른 학생들로 인해 학생 정서행동특성검사의 학생들이 계속 뒤로 밀리고 있다. 교감은 상담 학생 명단을 자꾸 달라한다. 검사 학생들 상담이 한 번씩 끝나야 추슬러지는 명단을 일주일에 1~2번 얼른 달라한다. 상담은커녕 검사도 다 끝나지 않은 상황이라 5월 달에나 가능할 것 같다 몇 번을 전달했지만 언제 나오냐 재촉한다. 곧 도대체 뭘 하냐며 따져올 것만 같아 상담이 자꾸 뒤로 밀리는 게 불안하다.

  가정방문을 갔을 때도 함께 했던 담임선생님이 수업에 늦지 않을까 초조하다. 가정방문까지 가도 등교하지 않는 학생을 어떻게 좀 해봐라 따져 물어 올 것만 같다. 6, 7교시 상담한 학생도 위험 상황에 대해 어디까지 보고해야 할지, 나중에 왜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냐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불안이 올라오는 이유는 이미 다 한 차례 씩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소리를 질러대며 때로는 끈질기게 감시당하며 하루에 한 번씩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시켜가며...


  그 와중에 행사를 하나 했으면 한다는 것과, 도서실 학생 중 부적응 학생 명단을 받아 관리하라는 것과, 작년 부적응 학생을 불러다 상담하라는 것과, 담임선생님들은 바쁘니 성과급 회의 서기를 맡아 달라는 것과, 너무 많은 통제와 쏟아져오는 요구와 그걸 거절할 수 없음에 숨이 차오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중요한데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되는 느낌이다.


  폭력에 적응해가는 것이다. 언제 내게 처벌이 돌아올지 몰라 매 순간 긴장하는 거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기에도 바쁜 시간에 관리자들의 시선을 신경 쓰는 거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도 전에 긴장이 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은 일이 한가한 편이니 긴장을 풀자. 일단 나를 추스르고 괜찮아지면 다시 열심히 일하면 된다.' 생각하는 거다.

  다시 아침자습시간에 반별 검사를 실시하고 있는데 한 담임에게서 1교시에 학생을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다. 어제 상담했던 학생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압도된다. 처음 드는 생각은

'이 학생이 계속 힘들어지면 안 되는데.'이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공감해줘야 할 위치인데

'이 학생이 계속 힘들어하다가 일이 생기면 또 내 탓이 될 텐데. 내게 소리를 지를 텐데'

라는 생각이 든다.


  그 뒤로 한 일은 잠깐의 회의 말곤 없다. 그래도 나를 지켜보겠다고 오늘은 쉬엄쉬엄 있자 생각했던 거다. 맹하게 점심을 먹으러 갔다 교무실로 간다. 잠시 친한 선생님을 보려 자리에서 기다리는데 옆 자리 선생님이 부적응 학생과 상담했던 학생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한다. 요즘 많은 학생들이 오고 간지라 잘 기억도 안 나고 머리도 안 돌아간다. 이 선생님은 틈틈이 반 학생들에 대해 묻는 걸 보면 아마 나보다 정신을 잘 차리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번뜻 '앗! 급식지도!' 이미 지도가 끝난 시간이다



  객관적으로 보면 오늘 나는 많은 일을 하지 않았다. 그저 1교시 학생이 더 심각해진 것을 보

'이 애로 인해 내가 실수를 하면 내가 힘들어질 것 같아.'

하며 힘들어했던 것이 전부다.

  상담을 하면 가장 중요한 것이 학생의 감정과 나를 분리하는 것인데 나는 지금 완전히 엮여 있다. 원인은 관리자가 어떤 부분을 꼬투리 잡아 나를 못살게 굴 것이라는 두려움이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다. 너무나도 이겨내고 싶다. 누군가에 의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 나를 지켜내고 싶다.



  내가 나를 지켜내는 방법은

1. 조금이라도 숨 돌릴 시간을 만들 것.

2.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관리자를 만족시킬 것.


이었다. 대학생 시절 알바 하나를 해도 시늉하듯 한 적이 없다. 평생 안 하던 걸 하려니 마음이 부산스럽다. 내 삶의 통제감을 잃어가는 것 같아 혼란스럽다.


  계속해서 마음을 내려놓으려 애써본다. 시늉하듯 일하더라도 중요한 일만큼은 여전히 제대로 일하려 한다는 점. 내게 무엇이 더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 실수하더라도, 누군가 나에게 소리를 지르더라도 여전히 내가 잘하고 있고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는 걸 안다는 점... 나를 다독일 힘이 남아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내 능력을, 노력을 믿어본다.

  급식지도 빠진 거 하나가 모든 것이 무너졌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 나를 지키기 위해 하는 행동들이 완전히 통제감을 잃은 것은 아니라는 점,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해 내 상황을 내가 조절하고 있다는 점, 관리자가 나를 비난하고 소리 질러 내가 감정적으로 흔들려도 온전히, 영원히 흔들리지는 않을 거라는 점... 내게 상황을 다르게 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애써서 하지는 말자 다짐해본다. 힘들 때는 힘든 만큼 흔들릴 시간도 필요하다. 힘들지 않으려 애쓸수록, 실수한 나를 자책할수록 회복은 점점 늦어지는 거다. 누군가 내게 폭력적인 세상을 보여줘도 내 세상이 무지갯빛이듯, 내 세상엔 아직 좋은 것들이 남아있음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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