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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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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Dec 30. 2021

그날 밤, 엄마의 문장

어떤 밤이었다.

아빠가 부재했던 밤. 천장 조명을 끈 방 안으로 주황빛 가로등 불빛이 창문 틈으로 삐져나왔다. 나는 엄마 옆자리에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린 채 누웠다. 내 옆에 누운 엄마는 내 왼손 깍지를 꼈다.


"린아, 너를 중심으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네 손을 잡고 네 곁에 있어 주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거란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게 아니란다."


어슴푸레 주황빛이 비치던 천장을 바라보며 엄마의 말을 상상해봤다

손을 뻗은 내 손을, 내 친구가 다정히 잡고, 내 친구의 손은 다른 친구가 잡고 선 모습을.

깍지 낀 손과 손이 이어져 강강술래 하듯 둥근 원이 만들어진 모습을. 마주 본 내 사람들이 날 보며 웃으며 서 있는 모습을.


엄마와 움켜쥔 손깍지를 더 꽉 잡았다. 행복한 상상에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어린 날, 엄마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따뜻한 상상에 마음도 따스운 밤이었다.


2021년 12월 31일 서른 네 번째 생일.

서른 네 번째 맞이한 생의 색깔은 알록달록 다채로웠다.

새로운 시작에 섰으며, 시작 앞에서 늘 그랬듯 난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하면 되지'를 입버릇처럼 내뱉으며, 내게 주문을 걸었다.

시작과 함께 생겨나는 두려움의 씨앗을 잠재우는 주문이었다.

매번 호기롭게 새로운 일에 뛰어들었지만, 잠들기 전 떠오르는 두려움 앞에 잠을 설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들 앞에 서서 목청껏 떠들고 돌아온 뒤 시간을 뒤돌아봤다. 더 나은 내가 되지 못한 시간을 책망했다. 책망을 디딤돌 삼아 앞으로 나아갔고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애썼다.


이력서는 신발을 끌고 온 역사의 기록이라 했다. 현재의 시간에 발을 딛고 앞으로 걷다, 서른넷을 뒤돌아보니 신발을 끌고 많이도 걸어왔다. 생을 걸어가는 시간 속에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인제야 그날 밤, 엄마가 말한 문장에 고개 끄덕일 수 있다. 나를 알아봐 주고, 안아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손을 잡고, 내 생의 향기가 더 짙어지고 있다는 걸 안다.


서른네 번째 생의 축하받으며 행복한 선물을 받았다.

'엄마 멋져!'하고 안아주는 아가들.

나의 시작을 언제나 지지해주는 신랑.

'잘했다고, 장하다'고 응원해주는 가족들.

'함께여서 든든하고 행복했다'는 별글 작가님들의 따뜻한 말.

꾸준함으로 자신을 다듬어 새로운 하루를 만들어가는 인터뷰어들.

고민하며 아이들 앞에 섰던 나의 시간을 '메마른 마음에 단비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해준 사서님.

'괜찮아, 잘하고 있어'라고 토닥여주는 언니들.

'마음이 즐거운 일을 재밌게 하자'고 내일을 함께 채워 갈 친구들.


엄마의 문장을 증명하듯, 많은 인연이 내 손을 잡고 생을 나아갈 힘을 줬다. 내년에도 나는 시작 앞에 망설이지 않고 '하면 되지' 주문을 걸 거다.

컴퍼스로 반원의 반경을 조금씩, 조금씩 넓히듯 내 생의 반경을 넓히고, 삶의 향기는 더 짙어질 테다.


감사한 나의 삶, 사랑받고 사랑 나누며,

서른 다섯 번째 생을 채워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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