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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an 28. 2022

우리 모두 '작가'가 되자

매일 쓰는 사람

“좋아하는 노래 듣고, 여유롭게 여행하며 글 쓰면서 살아가고 싶어,

여행 작가는 어떨까?”

머릿속으로 나의 미래를 그려봤다. 웃음이 났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싸이월드 다이어리 창의 비어있던 포도알에 보라색이 하나 채워졌다. 나의 20대는 매일 싸이월드 다이어리의 포도송이를 채우면서 흘러갔다.

글짓기에 실낱같은 소질이 있다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교내 시화전에 말도 안 되게 써낸 시가 작품으로 걸리고, 교내 신문에 시가 실렸다. 엄마가 도와준 6.25 한국전쟁 글짓기로 전교생 앞에서 대상을 받았다. 어느새 꼬맹이는 우쭐해졌다. ‘나 글 좀 잘 쓰나?’ 칭찬을 받는 일은, 꿈을 키우는 씨앗이 됐다. 칭찬의 씨앗 덕분에 10대를 지나 20대에도 포도알을 채우며 꾸준히 글 쓰는 사람이 됐다. 씨앗을 키우고, 꿈을 틔워 글 쓰는 사람으로 사는 꿈을 꿨다.

지역신문사 기자로 입사하면서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하지만 내가 쓴 글은 매일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이것도 기사라고 썼냐?’ 보도국 팀장 옆에 서서, 팀장이 기사를 퇴고하며 한숨을 내쉴 때 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기자로 살아가는 건 사막 한가운데 떨어져 물 한 통 들고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듯 외롭고 처절했다. 다행히 기사와 씨름했던 처절한 시간은 허투루 흐르지 않았다. 쌓이는 시간 동안 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금세 찾아내는 방법을 터득했고, 기사를 쓰는 속도도 덩달아 늘었다. 입사 초기 기사 한 건을 써내기 위해 반 나절이 걸렸다면, 2년 뒤 기사 한 건을 1시간이면 뚝딱 써내는 능력치를 얻었다. 기자 생활 6년 동안 난 매일 쓰는 사람이었다.


글짓기 ‘해방의 순간’

결혼과 출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새 가정을 꾸리고, 나를 닮은 아이를 보듬고 키워내는 일은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경력중단 여성’은 나와 상관없는 단어라 치부했건만, 6년간 기자 생활을 정리하고 난 어느새 경력중단 여성이 됐다. 내게 남은 건 오로지 글밖에 없었다. 내가 가진 ‘글빨’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순간 내가 제일 잘하고, 잘할 수밖에 없는 일이 글짓기였다. 24시간 중 단 2시간. 아이가 낮잠을 자는 시간이 유일한 내 시간이었다. 억울한 게 많았다. ‘임신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은 거야?’, ‘신생아를 돌보는 게 나를 갈아 넣는 일이라는 걸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 출산, 육아를 하는 동안 여자로서의 억울함, 부당함이 마음속에 들끓었다.

부글부글 끓는 마음의 온도를 낮추는 유일한 방법은 감정을 활자로 토하는 것이었다.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출산과 육아의 시간을 글로 써 내려가며 그 속에서 나를 봤다.

‘우리나라 산모는 엄살이 심하다’며 비아냥거리는 의사의 말에 분노하는 나, 첫 모유 수유를 하며 쩔쩔매는 나, 경력중단 여성이 된 자신을 걱정하는 나, 엄마의 마음을 마주했던 나.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엄마’에서 로그아웃해 온전한 ‘김예린’이 될 수 있었다. 나를 마주 보고, 나의 감정을 표현할 단어를 고르고, 문장으로 정렬하면서 일상의 궤도에서 벗어났다.

글짓기는 해방의 순간이자, 나를 바로 마주 보는 시간이었다. 제일 잘할 수 있는 글짓기로 끊어진 경력을 이어 붙였다. ‘김예린 작가’가 됐다. 작가 직함이 찍힌 명함을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눌 때면, 이런 탄성이 돌아왔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부러워요.”

부러움과 동경을 접할 때마다 난 진심으로 말했다.

“계속 쓰면 누구나 잘 쓸 수 있어요.”

듣는 이에게는 나의 대답이 그냥 하는 말로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지난 시절의 내 경험은 ‘글짓기 실력은 시간에 비례한다’고 믿게 했다.


일단 쓰자

우리가 연필을 들고 끼적이기를 머뭇거리고, 자판을 두드리기를 꺼려하는 건 평가받는 두려움 때문이다. 글짓기가 두렵다면 새로운 이름 즉, 필명을 짓거나, 이름을 숨긴 채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지난해 (사)어린이와작은도서관 협회 ‘문화예술전문가’로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게 됐다. 글짓기 수업에서 나는 이름을 지운 글짓기의 ‘자유’를 엿봤다.

아이들에게 글짓기라는 데 대한 막연한 어려움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나는 수업을 할 때면 종이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말라고 한다. 주제에 맞게 글을 쓴 뒤 이름이 적히지 않은 종이를 비행기로 접어 앞으로 날리면, 글이 적힌 비행기 종이만 봐서는 글쓴이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익명성’ 안에 숨은 글은 자유로워졌다. 아이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던 상상을 종이 안에 써냈고 서로의 상상을 이어 붙여 멋진 이야기 한 편을 뚝딱 완성했다.

글짓기 앞에서 우물쭈물하게 된다면 생각나는 걸 일단 쓰자. 단 다섯줄의 문장이라도 제목을 달고,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보자. 다섯 문장에서 시작해 매일 한 문장씩이라도 글을 늘려간다면 한 달 뒤 A4 용지 한 면을 꽉 채울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매일 쓴 글은 나만 보지 말자. 블로그, SNS 등을 통해 ‘익명’, ‘필명’에 숨어 남에게 글을 선보이자.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보여줘도 더 이상은 부끄럽지 않는 단단한 용기를 가지게 된다.


우리 모두 ‘작가’가 되자

글짓기는 나보다 앞서 달려가는 시간의 초침에 끌려가지 않게 한다. 글 짓는 찰나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 된다. 찰나를 고르고 내 이야기를 활자로 표현하면 찰나는 영원히 글로 박제된다.

바야흐로 ‘에세이’의 시대다. 20대 도배사와 청소부, 유품정리사, 60대 임시계약직 노인장 등 많은 사람들이 제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 담아내고 있다. 요즘 도서관 책장에 서서 에세이 서고를 바라보면, 행복하다. 서고의 책들은 우리 사회가 무지개 보다 더 다채로운 색을 지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 준다. 평범하고 소소하지만, 특별한 나만의 삶을 나누다 보면 우리는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글로 만난 우리는 서로의 삶을 응원하게 된다.

‘작가’의 사전적 정의는 ‘글 짓는 사람’이다. 2022년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술술 풀어놓는 글 짓는 사람이 더 많아지 길 소망한다. 서툴러도 좋다. 지금 쓰자. 우리 모두 작가가 되자. 글짓기 앞에서 망설이는 그대를 위해, 내가 글짓기 앞에서 우물쭈물할 때마다 읽어보는 마법의 주문을 선물하면서 이 글의 마침표를 찍는다.


“닫힌 방 안에서는 생각조차 닫힌 것이 된다.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발 디딘 삶에 근거해서 한 줄씩 쓰면 된다.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누구나 글감이 있다는 것. (중략) 글쓰기는 만인에게 공평하다.”

-은유, 『쓰기의 말들』, 유유출판사(2017), 48p


[김해문화재단 소식 2월호] 웹진 'TALK COLUMN'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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