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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Apr 03. 2020

‘카톡’은 지금도 울린다.


“2차로 자리 옮기면 상황보고 스윽 빠져. A가 나보고 김기자랑 나중에 브루스 한 번 춰도 되냐고 묻더라.”


경찰과 술자리였다. 나, 선배, 경찰 둘. 경찰 A 씨는  술자리 안주로 자신의 애인과 정동진을 다녀온 여행기를 무용담처럼 풀어놨다. 그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반지를 쳐다보며 초년 기자인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어두컴컴한 택시 뒷좌석. 앞좌석은 경찰 B 씨가 앉았다. ‘카톡’ 어둠 사이로 스마트폰 빛이 주머니 사이로 삐져나왔다. 선배는 B 씨와 대화하며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카톡을 보냈다.

선배 덕(?)에 나는 2차 술자리 분위기가 무르익기 전 유유히 노래주점을 빠져나왔다.


“남자들끼리 룸살롱 가면 같이 옷 홀랑 벗고 논다. 그렇게 친해지는 거지.”


선배가 말했다. 여자인 나는 경찰 출입기자의 한계가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주고받는 고급 정보들은 내가 흡연자를 자처하지 않은 이상 얻을 수 없었다. 여동생처럼 굴면 만만하게 봤고 기자로 존중을 바라면 ‘뻣뻣’하다 했다. 그중 가장 곤란했던 건 술자리를 2차로 옮겼을 때였다. 내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으레 경찰들은 도우미 언니(뭘 도와주는 건지는 목격하지 못했지만)를 불렀다. 문을 열고 언니가 들어올 때면 도우미 언니와 나는 민망했다. ‘나도 오빠를 불러 달라’ 손을 들고 호기롭게 허세를 부려야 하는지. 마이크를 잡고 즐겨야 하는지. 술잔을 들어야 하는지. 오갈 데 없는 손으로 노래주점 문을 열고 집으로 향했다.


“김기자, 내가 김기자 후원해줄게.”, “괜찮습니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도 잘 먹고 삽니다.”

기업인 C 씨가 말했다. 옆에는 술을 따라주는 이모(?)가 있었다. 그는 이모의 엉덩이를 만지며 내게 악수했다. 그는 악수하며 가운데 손으로 내 손바닥을 긁었다. ‘XX’ 속으로 욕이 튀어나왔지만 나는 억지로 웃었다.


기자 생활 동안 기억 남는 수십 개의 일화 중 몇 가지다. 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이에 문제제기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민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취재원과 사람 대 사람으로 유대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나의 한계인지 여기자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그들은 날 여자로 보았고 남성 세계의 견고한 성벽이 있었다. 그 성벽 안에는 성매매, 성희롱, 섹스 경험담 등이 공유됐다. 성벽 넘어 세상을 본 나는 아버지를, 남편을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됐다. 불안했다.


‘n번 방 파일인 줄..’ , ‘요즘 위험하다. 조심해라.’


단체 채팅방에는 버닝썬 동영상, 룸살롱 후기, 연예인 영상이 공유됐다. 남자 옆에 앉은 여자들은 5만 원, 10만 원으로 값이 매겨졌다. n번방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박사’가 경찰에 잡힌 건 그들에게 그저 ‘재수가 없어서’이었을 테다. 아내를 비롯한 가족에게 걸리지 않으면 여전히 문제 될 게 없는 성벽 안 세상이다.

n번방은 아동과 청소년이 피해자가 돼 더욱 국민적 공분을 샀다. 하지만 단체 채팅방 ‘카톡’ 은 지금도 울리고 있다.


‘단체 채팅방 영상 난 안 봤어’, ‘무슨 내용 올리는지 지켜만 봤어’라고 변명하지 마라. 남성만의 성벽 속에서 소비되는 여성은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또 누군가의 딸이 ‘영상’으로 공유된다. 그때도 그저 ‘ㅋㅋㅋㅋㅋ’를 누르며 지켜보기만 할 텐 가.


나는 분노한다. 나는 내 아들을 가해자로, 내 딸을 피해자로 만들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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