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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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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Apr 28. 2020

나는 '시작형' 인간이다.

아이들의 낮잠 시간. 매일 단 두 시간 주어지는 평화로운 나만의 시간을 누리고자 책장 앞에 선다. 책장을 훑다 앞부분만 손때가 묻은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나의 첫 크로키> 다이어리 옆에는 그림 그리기를 취미 삼을 거라 사놓은 책이 있다. 나의 첫 크로키는 첫 장으로 끝나 있었다. 깎다만 색연필이 나뒹굴고 영어 공부하려고 샀던 책은 역시나 몇 장만 빨간 펜으로 줄 그어 놨다. 어릴 적 피아노 학원은 체르니 100번만 한 달 치고 관둬, 미술학원은 소묘한다고 연필만 열심히 깎다가 마쳤다.

그렇다. 일주일 단위로 인생 계획을 세우고, 시작은 있는데 끝맺음은 적다.


이른 아침에 하루의 일과를 시작해 아침시간을 활용하는 사람을 아침형 인간이라고 부른다면, 나는 시작은 창대하나 마침표를 '잘' 찍지 못하는 ‘시작형’ 인간이다. 시작형 인간인 내가 끝맺음을 했던 일은 손에 꼽는다. 수 십 가지의 시작 중 발을 동동거리며 애간장 태웠던 일이 있다. ‘경찰서’ 출입문 열고 들어가기다.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으레 했던 숙제 ‘가족 신문 만들기’. 가족 소개를 막힘없이 써 내려가다 ’ 가훈을 쓰기 전 연필을 멈췄다. “우리 집 가훈이 뭐야?”라고 묻는 내 질문에 엄마는 ‘정직하게 살자’라고 답했다. 친구 연필을 빌려 집에 오던 날. ‘빌리더라도 남의 물건을 집으로 가지고 오면 안 된다’며 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꾸지람을 들었다. 가훈과 엄마 훈육 덕(?)인지 스물여섯 해가 넘는 동안 경찰서 출입문을 열고 들어갈 일이라고는 없었다.


○○○뉴스 ◇◇◇ 기자입니다.’

뉴스를 보면 존재감을 뿜 뿜 뽐내며 외는 냉철한 기자의 마무리 말이 그렇게 멋져 보였다. 동경하던 기자직이었다. 스물여섯. 꿈에 그리던 기자가 됐다. 사회부로 발령받아 첫 출입처로 경찰서를 배치받았다. 경찰서 출입 첫날은 선배가 함께했다. 선배는 경찰서 민원실, 형사과 등을 안내하며 그와 친분 있는 경찰관을 소개했다. 친절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담고 ‘잘 부탁한다’며 손을 덜덜 떨며 명함을 드밀었다.


‘혼자 괜찮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다음날 경찰서 출입문에서부터 ‘안’ 괜찮았다. 두려웠다. 대학생활 4년 간 빵집, 마트 등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기자’ 직함을 달고 혼자 시작하는 첫 사회생활이었다.


‘아뿔싸. 글쓰기는 기자 재주 중 기본일 뿐이구나.’

첫날부터 이마를 탁 쳤다. 노트북을 넣은 배낭끈을 꼭 쥐고 경찰서 출입문 앞에서 서서 크게 들숨날숨을 내쉬었다. ‘그래 긴장하지 말자. 나 죄지은 것도 없잖아. 그냥 건물 출입문일 뿐이야. 이게 뭐라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속으로 중얼중얼 혼자 최면을 걸었지만 최면은 안 걸렸다! 지난밤 있었던 사건들을 확인하기 위해 서글서글한 웃음을 날리며 형사과 문을 열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형사가 까치집 한 머리를 긁적이며 무성의하게 고개만 까닥했다. ‘하하하, 밤새 안녕하셨죠.’ 명랑한 여동생 코스프레를 하며 알은체했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화는 끝. 형사에게 기자는 그저 귀찮은 존재였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매번 첫날처럼 경찰서 출입문 앞에서 심호흡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살다 살다 내가 경찰서 매일 출근할 줄이야. 그래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경찰서 입구에서 출입문까지 갯벌 위를 걷듯 발이 무겁게 떼 졌다. 데면데면한 당직 형사와 만남. 슬슬 눈치를 보다 어물쩡 대답하고 ‘수고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형사과 문을 닫았다. 찬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던 1월 달이었는데 경찰서로 출근하는 일주일 동안 겨드랑이 땀이 찼다. 나의 첫 사회생활 시작은 어설펐고, 씁쓸했으며, 진땀이 삐질 흐르던 나날이었다.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친절할 이유는 없어.”

무뚝뚝하고 냉랭한 형사들을 일주일 간 대하며 깨달았다. 사건을 놓쳐서 팀장에게 까이(?)는 날에는 머릿속에 끈이 팽팽하게 당겼다. 형사에게 ‘사건을 왜 말해주지 않았냐’ 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따져봤자. 그는 내게 굳이 사건을 말해줄 의무가 없는 사람이었다.

사회는 누구 하나 쉽게 내 숟가락에 밥 얹어주는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눈치껏, 명랑한 척, 센 척을 척척하며 6년 간 경찰서를 출입했다. 거기에는 의무감, 책임감이 첨가됐지만, 그래도 덕분에 첫 만남에 알은체하고 서글서글한 웃음을 날리며, 사람 좋은 사람 인상을 풍기는 코스프레도 척척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20대 때는 계획을 한 달 이상해본 적 없는 시작형 인간인 나를 참 많이 미워했다.

 ‘너는 왜 이렇게 밖에 못 하냐’, ‘싫증도 잘 내고 끈기 없는 나란 인간이 뭘 해 먹고살 수 있으려나’ 하며 열심히 적은 계획표만 쳐다봤다.

삼십 대 중반으로 향하는 오늘. 이제는 끝맺음 없는 나와 악수하고 받아들였다. 오늘도 나는 스케치북에 계획을 써 내려간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지지부진하게 끝내는 일도 많은 시작형 인간이지만. 이런 들, 저런 들 어떠하리. 어설프고 어색하고, 힘겨웠던 첫 시작 또한 다음 시작에 튼튼한 밑받침이 될 거다.

어제의 시작이 내일의 또 다른 나를 만드는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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