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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un 18. 2020

바지런해지자

'엄마'와 '김예린' 사이를 오가며

‘으앙’

어스름한 새벽. 둘째의 울음소리가 방문 사이로 비집고 내 귀에 꽂혔다.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굴렸다. ‘몇 시나 됐을까. 저러다 울음을 멈추진 않을까’

침대에 딱 달라붙어 있어 보자고 마음먹었는데 결국 울음에 지고 말았다.

오전 4시 45분. 창밖으로 해가 하늘을 주황빛으로 물들이며 스멀스멀 밤을 밀어내고 있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고 깨지 않게 숨을 꾹 참고 방문을 닫았다.


무거워진 눈꺼풀이 세상을 깨우는 해를 구경하느라 가벼워졌다.

무엇을 할까. 소파에 물에 젖은 곰인형처럼 너부러져볼까. 어제 산 책을 읽어볼까.

풀내음을 가득 뿜어내는 새벽 공기에 반해 명상 자세를 취했다. 양반 다리를 하고 무릎 위에 손을 가볍게 내린다. 허리와 목은 하늘 향해 곧게 뻗은 나무처럼 꼿꼿이 세우고 눈을 살포시 감는다. 들숨 날숨에 차디찬 새벽 공기가 코로 들어와 폐 속 가득 퍼진다.

‘들이키는 숨이 폐를 지나 허리를 지나 발끝으로 지나갑니다.’  요가 선생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눈을 감은 채 태양 경배 자세를 시작한다.

‘해가 세상을 밝히는 시간, 태양 경배 자세라니 이토록 신성할 수 있을까.’ 태양신을 믿었던 잉카 문명의 제사장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오롯이 혼자 창을 뚫고 뿜어지는 빛을 받으며 손바닥을 맞대고 손끝을 머리 위로 올렸다. 나의 들숨 날숨에, 내 몸짓에 도르르 말렸다 쭉 펴지는 뼈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느꼈다.



‘으앙, 엄마’

이번에는 첫째다. 시계 시침은 5시 45분을 가리켰다. 모든 것을 멈추고 아이를 달래러 안 방으로 들어간다. 내 품에 쏙 들어간 아이는 다시 잠을 청한다. 아이도 나도 깊은 잠에 빠졌다. 출근하는 신랑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잡곡밥에 김을 또르르 말아서 아이 입에 쏙 넣는다. 티브이를 보기 시작한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는 ‘콩순이’다. 마트에서 콩순이가 그려진 아이용 김을 샀더니 밥 먹기 싫어하던 아이는 며칠 전부터 김밥을 우걱우걱 씹어 먹는다.  

‘응가해볼래.’ 밥을 먹더니 장운동이 활발해졌나 보다. 아이는 밥 먹다 말고 의자서 일어나 뚜벅뚜벅 외진 공간으로 향한다. 밥 먹으면서 응가하기. 아이들의 몸은 정말 정직하다.

‘응가 다했어. 엄마 치워죠.’

아이의 응가는 매번 치워도 냄새를 맡을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온다. 아이가 놀랄까 봐 매번 숨을 크게 참고 구역질 소리가 몸 밖으로 나오지 않게 꾹 눌러 담는다.

 ‘스스로 응가를 치우고 정리하기까지 엄마의 손은 얼마나 더 필요할까.’ 잠깐 생각하다. 물로 깨끗이 씻어준다. 내친김에 세수도 하고 손도 씻자. 엄마 도움보다 혼자 하고 싶은 세 살 아들은 세면대에서 세수도 하고 손에 비누칠도 한다. 다시 밥 먹고 어린이집 가방 챙기고 등원하고 나면, 이제 둘째 차례다.

둘째는 아침잠이 쏟아지는지 울었다. 품에 안겼다. 눈을 비벼대며 칭얼댄다. 젖을 먹이자 10분도 채 되지 않아 잠든다.



오전 9시 30분. 아이 낮잠 시간 동안 나는 몸을 움직인다. 청소기를 밀고 방 닦고 나면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다. 명상과 요가로 몸을 깨웠으니 자전거를 타며 땀을 내본다. 어제 산 책을 하나 집어 들고 운동기구에 올랐다. 손가락으로는 한 장 씩 책 장을 넘기고 발은 바지런히 움직인다. 등이 축축해지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마 위로 또르르 땀이 흐른다. 눈에 들어가기 전 스윽하고 빠르게 닦아 냈는데, 땀보다 내 손이 느렸다. '아, 따갑다. '



샤워하기 전 누런 물 때가 가득해진 타일 위로 락스를 뿌린다. 솔로 벅벅 문지르고 샤워기물을 뿜어 씻어낸다. ‘이제 햐애졌네.’ 묵은 때를 벗겨내듯 개운한 기분으로 샤워 한다.

마우스로 써야 하는 글은 피해 가고 백지의 흰 창을 켜냈다. 쓰고 있는 할머니 글은 숙제 같다. 그리고 아프다. 창고 속 처박혀 잊힌 상자 속 편지를 꺼내면 기억도 감정도 다시 선명해진다. 할머니 이야기도 그렇다.  매번 자판을 누를 때마다 휴지로 눈을 누르기 바쁘다. 할머니를 생각해도 조금 덜 아플 때 글 쓴다. 네모난 그리움이 동글동글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기억을 끄집어내기 때문에 언제 완성될지 모르는 글이다.

커서만 깜박이는 흰 창에 내 생각을 떠들어본다. 요가는 몸으로 나를 느끼는 방법이라면, 글쓰기는 물가에 비친 나의 정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만져보는 시간이다.


부지런하다는 말보다, 바지런하다는 말이 좋다. 나란 인간은  때론 ‘바지런’과 수평선 끝과 끝처럼  떨어져 있지만, 요즘은 바지런 떨고 싶어 진다. 매일 ‘엄마’와 ‘김예린’ 사이를 왔다 갔다 하려면 놀지 않고 꾸준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래. 내일도 바지런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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