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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ul 29. 2020

오늘도 부단히 글 쓴다.

‘아 또 탈락이다.’

 공모전에 글을 낸 게 세 번째다.  결과 발표날에 빨간펜으로 달력에 동그라미 쳐놨다. 마우스 휠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김예린’ 이름을 찾아봤다. 없다. 혹시나 싶어 다시 마우스 휠을 돌려 천천히 결과 페이지를 내려 봤다.


‘없구나. 지원자가 천 명이 넘네, 하. 공모전은 당최 심사 기준을 모르겠어’


 기자직을 관두고 다시 자판에 손을 얹었다.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인 글감을 활자로 토해내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었다. 맑은 정신으로 내 마음을 돌아볼, 오로지 나만의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노트북 앞에 앉기까지 첫째가 세상 밖으로 나와 첫걸음마를 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6년 간 기자 일을 하는 동안 하루에 많게는 기사 4건 이상을 매일 찍어냈으니 글 쓰는 일이 몸과 머리에 인이 박혔다. 그나마 잘할 수 있는 거라고는 글 쓰는 것 밖에 없어졌다. 외부활동을 하게 되면서 명함이 필요했다.  ‘기자’라는 직함을 대신할 단어를 찾았다. ‘작가’, ‘에세이스트’. 김예린이라는 이름 뒤에 어떤 직함이 붙어야 할까. 고민했다. ‘작가’라는 단어는 너무 무거웠다.


‘김훈’, ‘김애란’, ‘은유’, ‘박완서’, ‘은희경’. 좋아하는 작가의 글들의 문장을 꼭꼭 씹으면 ‘와’ 하고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들과 동일 선상에 ‘작가’라고 불릴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기 합리화가 필요했다. 뜻을 찾아봤다. ‘작가’, 글을 짓는 사람. 백과사전에 이렇게 뜻이 풀이돼 있었다. 한참을 뜻을 읽어봤다. 누구나 글을 쓰는 세상. 땅을 딛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글감이 있다. 기술만 다를 뿐 다들 자기 이야기, 꾸며진 이야기를 세상에 말하고, 그들은 ‘작가’라 불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가’라는 단어가 톡 뽑은 휴지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매일 삼시세끼 밥을 짓듯 글을 짓는 사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여기서 멈췄다. 명함에 ‘작가’라는 직함 대신 ‘글 짓는 사람’이라고 새겨 넣었다. 글 짓는 사람으로 ‘참 글 잘 지었다’는 인정을 받고싶었다. 부지런히 공모전에 글을 응모한 이유였다.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결과 발표 페이지에 이름을 찾을 수 없을 때마다 입이 썼다. 당선작의 유려하고 울림 있는 글을 보며 좌절했다. 난 단어와 문장의 밑천이 없어 카드깡처럼 매번 돌려 막기만 했다. 초라했다. 공모전 결과에 무릎을 꿇은 뒤 등을 토닥거려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은유 작가의 ‘쓰기의 말들’이 ‘괜찮다고, 계속 쓰면 된다’고 따뜻하게 안아줬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자기 글을 믿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남들과 달라지려 하고 스스로를 부단히 연마하는 것이다. -윌리엄 진서>


‘처음’을 생각했다. 신문사에 입사하기 위해 글을 써 사장님께 보여드린 날.

사장님은 “르포기사를 쓰라고 했더니 일기를 썼네”라고 했다.

‘글 쓰는 선배들의 직언 덕분에 없는 밑천에도 하얀 백지 한 장을 꽉 채울 수 있을 정도가 되지 않았나?’ 쌓아 올린 시간 속에 글의 농도도 사골국물처럼 진해질 테다. 처음을 생각하며 나를 다독인다.

 내일도 모레도 부단히 글을 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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