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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Jul 25. 2018

내 눈치 보지 말고 자리 좀 비켜줘.

임신(2)

“아기 재우고 먹이고 씻기고 나면 하루 다 간다.”

육아 선배들에게 들었던 출산 이후의 삶.

그들의 말은 출산 후 내 삶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은 쓰윽 하고 지워질 거라는 말처럼 들렸다.


‘출산하면 친구들 만날 시간도 없을 거야.’

임신 36주.

서서 발가락이 안 보일정도로 부풀어 오른 내 배를 살포시 보듬어가며 꾸역꾸역 친구들을 만나러 나섰다.

약속장소로 나서는 길은 만만찮았다.  튼튼한 두 다리로 걸으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 6시.

버스, 지하철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주말 전야제를 위해 시내로 나서는 사람들로 꽉 찼다.

 뒤뚱뒤뚱 허리를 받쳐가며 무거운 몸을 버스에 실었다.


 퇴근시간. 역시나 빈자리는 없다.

내 눈은 먼저 분홍색 임산부 배려석을 향했다.

그곳에는 피곤에 지친 젊은 남성이 곯아떨어져 잠들어 있다. 노약자석은 머리가 희끗한 어르신이 앉았다.

‘서서 가야되겠구나.’  

생각하자 임산부 배려석 앞 노약자 석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앉아요.”

여러 번 거절했지만, 결국 노약자 석에 앉았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젊은 남성은 임산부석을 차지하고 나이 많은 할머니 자리를 내가 꿰찼다.


임신 초 보건소에서 나눠받은 임산부 배지는 무의미했다.

애초 들고 다닐 생각도 없었지만, 들고 다닌다고 한들 자리 비켜달라고 배지를 내밀 용기도 없었다.

암행어사가 쓰는 마패도 아니고, 임산부 배지 내밀며 ‘임산부니 자리 비켜주세요’ 라고 애써 말해야하는 것이 불편했다.


지하철. 역시나 임산부석은 이미 누군가 앉았다.

남녀 커플이었다. 임산부석에 앉은 여성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어쩔 줄 몰라 했다.

옆 자리 남성에게 ‘비켜줘야하나?’라고 물으며 내 눈치를 봤다. 그 찰나 맞은편 자리에 중년 여성이 일어서며 자리를 양보했다.

‘내 눈치 보지 말고 자리 좀 비켜주면 안됐었나.’

내 시선은 갈 곳 잃었고, 임산부 배려석을 차지한 여성과 마주한채 지하철은 목적지로 향했다.


대중교통은 대중교통대로 자리 앉아 가기 어렵고, 운전을 하면 주차장 이용이 쉽지 않았다.

각종 관공서, 종합병원 대형 할인마트 등 출입구 인근에는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이 있다.

임산부나 3세 미만 유아를 동반한 여성들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에 일반차량이 주차할 수 없도록 막을 수 있는 법적 강제조항은 없다.


헐렁헐렁한 상황에 임산부 전용 주차구역에서 주차하고 내리는 남성들이 허다했다.

 이따금 운전을 했던 만삭 때는 남성들이 차지한 임산부 주차구역을 비켜지나 일반 주차구역에 주차해야했다. 좁은 차간 공간을 빠져나오기 위해, 부풀어 오른 배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몸을 베베 꼬아 용을 쓰며 내 모습에 헛웃음만 나왔다.

임산부가 돼서야 일상에서 임산부 ‘배려’라는 단어가 허울뿐이라는 걸 몸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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