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가 내를 보고 웃네"
88년 시간을 건넌 만남
“삼신할머니가 아이를 점지해주는 건 다 때가 있나 봐.”
주말드라마는 결혼하고 나면 곧이어 여주인공이 배를 내밀며 임신 소식을 가족에게 알렸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이 내 앞에 놓이기 전까지 임신이 뭔지, 그 어마어마한 일을 알 턱이 없었다.
결혼한 내게도 아이가 쉽게 찾아와 주지는 않았다.
일본 출장길, 겨울철 두루미 수만 마리가 찾아온다는 가고시마 이즈미시를 취재했다. 예로부터 두루미는 건강과 복의 상징 아니었는가. 계절을 비켜 가 만나지 못했지만, 나는 두루미에게 소원을 빌었다. 이즈미시 두루미 박물관 입구 소원 나무에 한글로 꾹꾹 눌러 적어, 소원을 쓴 종이를 걸었다.
‘애기 생기게 해주세요.’
유럽에서는 황새가 아기를 물어다 준다 했는데, 내게는 두루미가 그런 존재가 됐다. 두루미는 곧바로 소원을 들어주었다. 출장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내 몸에 하나의 심장이 더 뛰기 시작했다. 신김치 냄새에 화장실 변기를 붙잡고 입덧했다. 안 먹던 돼지고기와 시고 쓴 자몽을 연신 먹고 싶어 졌다. 어떨 때는 군고구마만 한 달 내도록 먹었다. 내 몸에 심장 하나가 더 생긴 이후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임신은 아름답지 않았다. 기침을 하다가 소변이 샜고, 천장 보며 꿀잠을 자는 건 사치였다.
“엄마가 웃어야 아가도 웃는다. 알았제?”
뒤뚱거리며 걷는 만삭의 나를 보며 할머니가 말했다. 뱃속에 아이를 위해 웃을 일만 만들려 애썼다. 겨우내 잠든 매화 꽃망울이 봄을 터뜨리고, 코를 간지는 바람이 불던 날. 하늘 위로 비둘기가 내리쬐는 햇살 속으로 검은 점으로 사라지던 날이었다. 뱃속 아이가 세상에 나올 준비를 했다. 아이는 뱃속에서 16시간 동안 용쓰다, 지구의 공기 한 모금을 먹고 울어댔다. 3kg가 조금 넘게 태어났던 아이는 백일 동안 몸과 키가 세 배로 커졌다.
2018년 여름. 아기 오니가 백일을 넘긴 뒤 요양병원을 찾았다. 오니는 내 손가락 하나가 다 들어가지 않는 작은 손가락으로 뼈밖에 남지 않은 할머니 손을 꼭 쥐었다.
1930년과 2018년. 88년이 걸려 할머니와 증손자가 만났다. ‘나중에 손녀가 낳은 증손자도 안아보셔야 할 텐데’ 하고 바랐던 내 욕심이 이뤄졌다. 할머니에게 오니는 ‘웃음’이자, ‘기쁨’이 됐다. 매일 자라나는 아이의 사진과 동영상을 보며 할머니가 깔깔거렸다.
동영상 속 오니가 방실방실 미소 짓자. 할머니 입꼬리가 자연스레 따라 올라갔다.
“아이고, 아가가 내를 보고 웃네.”
동영상 속 오니의 모습을 보고 할머니는 자신을 보고 웃는다며 착각하셨다.
귀여운 착각에 나는 “오니도 할매가 많이 좋은 갑다” 하고 답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한 달의 한 번씩 오니와 함께 할머니를 찾았다. 낯선 환경에 오니는 금세 눈물을 터뜨렸지만, 티브이 소리만 들리던 요양병원의 병실에서 할머니는 생글생글 웃으며 우는 오니를 달랬다. 어릴 적 넘어져 우는 나를 보며 ‘괜찮다 괜찮아’ 하고 토닥이던 할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사랑, 사랑, 오니를 보는 할머니를 보며 내리사랑을 봤다.
88년 시간을 건너온 사랑이 병실 침대 위로 넘실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