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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Aug 17. 2021

화장실에 걸린 주방 장갑/김태희

일간 '별글' 시즌 1 <잡화> 원고

*일간 별글 시즌 1 원고 일부를 공개합니다.


“아니, 왜 주방 장갑이 화장실에 있어?”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나오면 열 중 아홉은 물어봤다. 바짝 마른 분홍색 오븐 장갑을 욕실에 걸어두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보기 드문 일었다.
 뜨거운 오뎅탕을 함께 먹던 친구의 말에 ‘그 장갑으로 식탁에 오른 것들을 집었냐’는 질문이 숨겨져 있었다.  


 ‘쟤 목욕용이야.’


그럴 때 나는 거실 한쪽 리빙박스에서 하루 24시간 중 20시간은 잠으로 시간을 보내는 반려 고슴도치를 가리켰다. ‘욕실에 걸린 주방 장갑’을 끼고 오뎅탕을 내어 온 위생 관념 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말했다.


“아직도 네 손에 안 잡혀?”


반려동물의 목욕을 장갑을 껴야만 한다는 말에 ‘여태 핸들링 안 하고 뭐 했냐’며 타박을 주는 사람도 있다. 하긴, 내 품에 온 지 약 4년이 다 되었는데 친해지지 못한 것은 내게도 큰 짐이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이 질문에는 항상 하는 대답이 있다.

“너 같으면 너 괴롭힌 사람에게 기대고 싶겠냐?”


 그렇다. 우리 집 거실을 독차지한 고슴도치는 내게 오기 전 학대를 당하고 몇 번이나 버려졌던 과거가 있다.  사람에게 극도로 예민한 고슴도치가 그나마 주방 장갑에는 몸과 마음을 내줬다.


고작 내 손바닥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크기의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등 쪽 가시가 뽑혀 가시가 듬성듬성 있었다. 남은 가시마저 손톱깎이인지 뭔지 모를 물체로 끝이 잘려 상해있었다. 피부도 상처가 굳고 각질도 쌓여서 그야말로 최악의 상태였다. 적어도 나는 이 고슴도치에게 사람의 따뜻함보다 남은 생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품게 되었다.


이 예민한 고슴도치의 건강한 가시 갈이와 피부의 각질 관리를 위해 주기적으로 약욕을 시켜줘야 했다.  하지만 고슴도치는 내가 리빙박스 근처만 가도 ‘쉭-쉭-’ 소리를 내며 가시를 세웠다. 나는 너무 안쓰러워서 뒷걸음도 많이 쳤다. 핸들링은 둘째 치더라도 건강을 위한 약욕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런 녀석이 목욕하는 데 꼭 필요한 것. 바로 ‘장갑’이었다.

주변의 고슴도치를 키우는 분이 고무장갑을 끼고 한다는 말을 들어 첫 약욕에 난 고무장갑을 준비했다. 그러나 고무장갑은 이 작은 고슴도치 앞에서 얇디얇은 위생비닐장갑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날 저녁, 내 손은 고슴도치의 가시독 때문에 밤송이를 꽉 잡았다 놓은 듯 울긋불긋 난리가 났다.


두 번째 약욕, 고슴도치도 나도 편안할 두껍고 비싼 극세사 장갑을 준비했다. 극세사라면 부드럽고 어느 정도 쿠션감이 있으니 고슴도치도 나도 편안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녀석의 가시가 보란 듯이 뚫고 들어왔다. 내 손은 바느질 할 때 쓰는 핀 쿠션이 된 것 같았다. 아프지만 고슴도치를 놓칠 수 없어서 용 썼다. 한겨울에 땀을 얼마나 흘렸던지 티셔츠가 홀딱 다 젖어버렸다.

수건으로 감싸 보고, 창문 닦을 때 쓰는 청소용 장갑도 써보고 내 손의 통증은 포기하자고 다짐할 즈음에 미역국을 끓이다 냄비뚜껑을 열기 위해 낀 주방 장갑이 홀연히 머리를 스쳤다.


“이거다!”


캔버스 천 같은 재질에 솜이 두툼하게 들어가 퀼팅이 들어간 다이소 3000원짜리 오븐장갑. 이것만큼 튼튼한 장갑이 없을 터였다. 이 장갑은 투박해서 도치도 눕기에도 편해 보였다. 미역국 끓일 때가 아니었다. 빠르게 가스렌지 불을 끄고 바로 고슴도치의 약욕을 준비했다.


대야에 물 온도를 맞추고 약욕제를 풀고 고슴도치를 데리러 갔다. 그 분홍색 주방 장갑을 끼고 말이다. 미역국의 소고기 냄새 때문인지 스스로 은신처에서 나와서 킁킁거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배 밑으로 손을 넣었다. 고슴도치는 ‘쉭-쉭-’거리며 경계했지만, 생각보다 편안히 안겼다. 가장 다행인 것은 가시가 손에 닿지 않는다는 점, 천에 녀석의 발톱이 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런 이유로 4년 동안 우리 집 변기 옆에는 분홍색 오븐용 주방 장갑이 항상 걸려있게 됐다. 24시간 중 20시간은 자고 4시간은 사료 먹고 쳇바퀴 돌리느라 정신 없는 우리 집 고슴도치, 아픈 과거를 조금은 무뎌지게 도와준 분홍색 주방 장갑.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우리 집 주방에는 주방 장갑이 없고, 나는 뜨거운 뚝배기를 나를 때 얇은 행주에 의존하고 있다.
 

-글짓는사람들 별글, 김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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