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적으로 나는 여기저기 여러 번 뺑뺑이로 돌려지다 마지막으로 가평경찰서 본사에 있는 <여성청소년 수사팀>으로 이관되었고, 젊은 형사님이 전담 경찰로 임명되었다. 집 근처 동네 경찰서보다 차로 30분 정도 더 가야 하는 거리였지만 그래도 더욱 전문성을 갖고 있는 수사팀이라고 하니 믿고 출석했다.
이번에는 정말 마지막이길 바라며, 새로운 형사님의 사건 파악을 돕기 위해 상세히 진술하고, 진술서를 작성했다. 방문 전 서로 통화를 한 상태였고 미리 개인적으로 작성해두었던 진술서를 제출 한 후였다. 형사님은 나를 만나기 전 이미 사건을 꼼꼼히 파악하고, 피해장소로 파악되는 길가에 있는 모든 CCTV를 확인한 후 였다. 사건 진술 후, 자신의 모니터를 책상 반대편에 있는 내가 잘 보이도록 보여주었다.
폴더에는 10개 정도의 CCTV 영상 파일이 보였다. 사건 당일 내가 다녀온 헬스장에서부터, 집으로 오는 15분가량의 길가에는 큰 4거리에 있는 가평군청 소속 CCTV가 있었고, 다음으로 다이소 CCTV, 몇 군데 CCTV를 더 거쳐 집 앞 편의점 CCTV, 주유소 CCTV, 마지막으로 우리 집 앞 CCTV를 모두 살펴보신 후였고, 영상을 확보해 둔 상태였다.
내가 피해 현장 시간을 예측한 것은 내 핸드폰 통화 목록에 경찰서로 처음으로 신고한 시간을 근거해서 편의점 CCTV 의뢰를 했던 것이다. 사건 당일 5회 경찰과 통화를 주고받은 기록이 있었다. 하지만 10분 정도 차이가 나는 이유를 형사님과 대화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형사님은 내가 헬스장에서 4거리를 통해 우리 집까지 오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4거리에서 이때 통화를 하고 계시더라고요'라는 말을 했고, 그제야 나는 아차 싶었다.
당시 4거리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신호등이 고장 나서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데 난감해하고 있었다. 주말이고 관광지라 주민보다는 관광객들이 더 많아지고, 차도 사람도 평소보다 훨씬 많아져서 복잡해지기 때문에, 이때 나는 동네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신호등이 고장 나서 거리가 위험한 상태임을 알렸던 것이다. 즉, 스토킹 사건 전에 다른 사건으로 경찰과 1차적으로 먼저 통화를 한 것이 핸드폰 목록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스토킹 사건 관련 첫 신고는 통화 목록 중에서 두 번째 신고 전화였기 때문에, 두 번째 신고 시간을 기준으로 했어야 CCTV 상에서 피해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략 10분 정도의 시간 차가 있었던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편의점 CCTV 상에서 내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사건 시간을 정확히 말씀 드리지 않아서 수사에 혼란을 드렸을 까봐 죄송하다며 형사님께 피해시간 오류가 있었음을 말씀드리자 너무 쿨하게 "괜찮아요, 그건 전혀 문제없어요. 피해 사건 시간을 분 단위로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없고, 피해상황에서 그런 걸 기억하는 것도 어려워요. 그걸 찾아내는 건 경찰이 할 일이죠"라고 형사님이 말씀하셨다. 지금까지의 경찰에 대한 불신이 사라지다 못해 내 마음은 녹을 대로 녹아있었고, 형사님에 대한 무한 신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형사님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헬스장에서 우리 집까지 길가에 있는 CCTV 영상을 순차적으로 확보해 가면서, 어느 시간대면 스토킹 피해 현장인 편의점, 주유소 그리고 우리 집 앞 CCTV에 내가 나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유소를 시점으로 앞, 뒤 길가 CCTV에 내가 나올 때까지 영상을 계속 파헤치고 지켜본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경찰들이 너무 무책임해서 극단적으로 비교가 되는 것일까? 피해 사실을 바탕으로 피해 정황이 나올 때까지 끝까지 영상을 찾아보았다는 형사님의 노력이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진심으로 감사했다.
더욱 감사한 일은 딱 스토킹 피해 시간까지만 CCTV를 본 것이 아니라, 그 후 피의자가 언제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살펴보았고, 한참 후 피의자가 떠난 후 내가 집 밖으로 나와서 피의자의 위치를 살핀 후 다시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스토킹 사건 후 나에게 추가적인 피해 사실이나 위험 상황이 없었는지 까지 살펴보신 것이다. 이쯤 되면 감동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경찰이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상세하게 수사를 할 수 있는데, 왜 전에 만났던 경찰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만 말했을까 원망이 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나의 모든 행동과 발자취가 길거리마다 CCTV에 그대로 기록되는 것이 살짝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고, 반대로 범죄 예방이나 수사 측면에서 봤을 때 참 다행이라는 이중적인 감정이 스쳤다. 확실한 건 길거리에서 코도 파면 안 되는 세상이 온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CCTV에 나의 모든 행동이 다 찍히고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숨어도 다 잡히니까 제발 정신 차렸으면 좋겠다.
내가 나온 CCTV 영상을 처음으로 관찰했는데 당시 직접 겪은 피해 현장보다 훨씬 더 무섭게 보였다. 내가 스토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며 뒤를 돌았을 때, 스토커가 내 뒤를 재빠르게 따라오면서 달려오는 장면이 마치 범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상당히 빠른 속도라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만약 그가 흉기를 들고 뒤에서 위협했다면 당시 내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경찰은 CCTV 보기 전과 본 후 심경이 달라졌는지 물었다. '크게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으나, 좀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내가 사라진 후 피의자가 왔던 길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쪽 동네사람이 아니면 알기 어려운 더 안 쪽 골목을 통해 도망치는 것을 보면, 이 동네에 살거나 이 동네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에 대해 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도망친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가 큰 소리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을 들어서인지, 그도 당황한 모습이 살짝 보이는듯 했고, 내가 사라지자 도망치듯 자리를 피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진술했다.
아쉽게도 그가 도망친 안 쪽 골목은 주택가라서 더 이상 CCTV가 없는 길목이었고, 더욱 신기한 것은 그 길로 갔을 때 나올 수 있는 큰 길가에 모든 CCTV를 형사님이 오랫동안 살폈고,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집 주변 길과와 시내쪽 길가 CCTV를 상세하게 확인했으나 그의 모습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다고 한다. CCTV가 없는 골목골목을 잘 알지 않고서야, 혹은 그쪽에 거주하고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CCTV 속 피의자의 모자 때문에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그의 걸음걸이는 일반적이지 않았고, 발걸음이 빠르고 팔을 힘차게 많이 휘두르는 걸음걸이었다. 형사님은 CCTV의 인상착의와 특이한 그의 걸음걸이를 바탕으로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우리 집 주변을 수색했고, 주변 CCTV를 계속해서 살폈다고 한다. 하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다고 전해왔다.
만약 긴급 상황시 피의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특이한 옷차림이나 악세사리, 일반적이지 않은 몸의 움직임이나 말투 등을 캐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경찰 수사와 피의자 수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가 많다고 한다. 때문에 범죄자를 볼 때 내가 보는 관점과 형사님이 보는 관점이 달랐다. 형사님은 CCTV를 보고 일반적이지 않은 피의자의 특이점 위주로 발견했다.
형사님의 동의하에 외부 공개나 타인에게 영상 전송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CCTV 영상을 내 핸드폰에 동영상과 사진으로 찍어서 보관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인상착의와 특이한 걸음걸이를 토대로 다시 한번 주변 마당발 아주머니들에게 보여드리며 이런 사람 본적 있는지, 혹시 본다면 말씀 주시라고 부탁드렸다.
형사님은 용의자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본 피의자가 맞는지 물었지만 매번 아니었고, 그 후로도 한동안 피의자를 찾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