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님께 편의점 여직원들의 스토킹 피해 정황을 언급하며 꼭 수사해 주시기를 당부드렸다. 성실한 형사님은 그녀들을 만나 진술을 듣고 피해 사실을 조사한 후 전화를 주셨다.
"그분들이 신고할 의향이 없다고 합니다."
나랑 대화했을 때는 신고할 의향이 있고 피의자 처벌을 바란다고 분명히 말을 했었는데 생각이 바뀐 걸까?... 안 그래도 편의점 갈 일이 있어 겸사겸사 들렀다. 피의자 처벌을 바라지 않는 것인지 조심스레 여쭤보았더니, 자신보다는 먼저 일 했던 사촌동생이 스토킹을 심하게 당했는데, 굳이 신고할 의향이 없고 피의자 처벌까지 바라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는 설명을 했다.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항상 있는 일이라서요"
나이 불문하고 남자들이 와서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찝쩍대고, 전화번호 물어보고, 퇴근 시간 맞춰서 밖에서 기다리고, 워낙 자주 있는 일이라 그렇게 따지면 그 사람들 다 찾아서 신고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항상 있는 일이라 딱히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술 취해서 난동 부리는 사람들도 많고, 이상한 사람들을 워낙 많이 본다는 것이다. 이 모든 사람들을 싸잡아서 '진상 손님' 범주에 두는 것 같았다.
워낙 자주 반복되다 보니 편의점에서 일하는 여성이라면 그런 취급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일까? 처음부터 그녀가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에는 당황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어느새 부당함과 범죄도 문제 삼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런 상황에 익숙해져 버린 것일까? 항상 있는 일이라는 것 자체가 더 위험한 것인데도 워낙 많이 일어나다 보니 오히려 적응이 되어 당연시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두 달 동안 매일 낮밤을 가리지 않고 스토킹을 당했지만 "그냥 그러다 말겠죠. 요즘은 안 와요."라고 말했다.
스토킹 처벌법의 특이점은 피해 사실이 명백해도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으면 수사할 수 없다. 아무리 죄질이 나빠도 피해자가 피의자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면 처벌할 수 없다.
조금 안타깝게 느껴진 점은 자신들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임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당한 것이 스토킹 범죄인데, 범죄임을 모르는 것이다. 그녀들 또한 한동안 불안에 떨었을 것이고 힘들었겠지만,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원인을 나에게서 찾거나 스스로 자책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감정도 넘어서서 그냥 무뎌진 것이 아닐까?
스토킹 피해를 몇 년씩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당하는 사례들을 보면 피해자가 현재 당하고 있는 것이 범죄임을 몰라서 적극적으로 신고를 하지 않거나, (친구, 직장동료, 지인, 이웃, 전 애인, 전 남편 혹은 전 부인 등) 아는 사람이어서 딱히 처벌까지 바라지는 않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다 결국 물리적 피해나 신체적 상해까지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형사님의 말을 들어보니 그녀들에게도 피의자 영상과 사진을 보여주고 인상착의를 확인했는데 동일한 스토커가 아닌 것 같다고 한다. 생김새나 걸음걸이가 확실히 달랐다고 한다. 동일 스토커여도 문제지만, 동일 스토커가 아니라는 것도 문제였다. 주변에 이런 스토커들이 많다는 의미이고, 주변에 이런 피해자들 또한 많다는 의미니까. 우리가 모르고 살아갈 뿐이다.
경찰의 업무태만에 대해 크게 화를 냈던 옆집 남자분의 20대 딸도 딱히 신고까지 바라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면서 몇 번 무서운 상황이 있었지만 어두워서 인상착의를 기억하기도 어렵고, 어떤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신고까지 바라지 않는다고 형사님은 전했다.
"그렇군요... 피의자도 동일인이 아니고 그분들이 신고를 원하지 않는데 제가 더 이상 뭐라고 할 수는 없죠. 잘 알겠습니다." 하고 통화를 마쳤다.
생각해 보니 나도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저녁까지 하고 늦은 시간 혼자 길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돌아다녔었다. 나를 돌아보니 10대 때는 무지해서 두려움이 없었고, 20대 때는 관심이 없었고, 30대가 되어서야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특히 딸을 가진 후에, 우리 딸이 살아갈 세상이라고 생각하니 안전에 대해 민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웃 아주머니들은 한동안 나를 만날 때마다 많이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다. 이 동네는 다들 오래 살아서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대부분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이라서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워낙 사건 사고 없이 안전한 동네라서 늦은 밤에 아주머니들도 혼자서 아무렇지 않게 많이 다녔었고, 저녁 산책도 자주 하셨다고 한다. 내가 스토킹 사건을 공론화한 후 인식이 많이 달라져서 자신들도 가족들도 조심하고 있다며, 나에게 용기 내줘서 고맙다고 잘했다고 격려를 많이 해주셨다.
안전한 동네라고 생각하고 살았지만, 알고 보니 이 동네에서도 흔하게 일어나고 있었던 일이지 않았을까? 우리가 몰랐을 뿐. 형사님은 요즘 이 부근에 건설현장이 많아서 피의자 인상착의를 봤을 때 공사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되어, 건설자들이 장기숙박을 하고 있는 근처 몇 군데 호텔에 찾아가서 피의자를 아는지 물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도 이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