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지금

한 해의 끝에서, 다음 발걸음을 고르다

by 내 마음 맑음

숨 가쁘게 달려왔다. 멈출 줄도 모르고, 돌아볼 틈도 없이 앞으로만 걸어왔다. 25년의 끝자락에서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서. 그렇게 25년의 끝자락에 서서, 26년을 향해 한 발짝 내딛기를 머뭇거리고 있다.


인생은 외줄타기와 닮아 있다. 발아래는 깊고, 줄은 가늘며, 균형은 늘 잠시만 허락된다. 과거에는 외줄 아래에 아무것도 없었다. 넘어지는 순간은 곧 추락이었고, 추락은 선택이 아니라 결과였다. 운이 좋으면 살아남았고, 운이 나쁘면 다쳤다. 그래서 외줄 위에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몸을 세웠고, 두려움을 숨겼고,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았다. 어쩌면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는 그 긴장이 이미 삶을 조금씩 닳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외줄을 타지 않아도 되는 삶이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한다. 적어도 내 삶은 언제나 그 줄 위에 있었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다음 발을 내딛어야만 했다. 끊임없이 외줄을 건너면서도 정작 외줄을 잘 타는 법에만 집착한 채, 떨어졌을 때의 자신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는 배우지 못한 채 살아왔다.


어느 시점부터 외줄타기 연습을 멈췄다. 대신 아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안정망을 만들기로 했다. 언제든 넘어져도 괜찮은 삶, 추락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기로 했다. 이미 수차례의 추락을 통해 균형 감각은 결코 완벽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고, 아무리 조심해도 거센 바람은 예고 없이 분다는 것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줄을 더 단단히 붙잡는 대신, 줄이 끊어졌을 때의 나를 붙들어 줄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 내가 선택한 방향이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받아줄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은 약함이 아니라 생존의 지혜에 가깝다.


여러 번 외줄에서 미끄러졌다. 아래에는 내가 만든 안정망이 있었고, 그것은 나를 곧바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바닥까지 떨어지게 두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인정이다. 지금 많이 지쳐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1년을 정말 열심히 힘겹게 살아왔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 Unsplash


그렇게 어느덧 25년의 끝자락에 서 있다. 특별히 슬프지도, 특별히 기쁘지도 않은, 그렇다고 아무 감정도 없는 것은 아닌 상태. 잘 버텨온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놓친 것 같기도 한 마음. 지나온 일들을 하나하나 붙잡아 정리할 힘은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었다고 넘길 수도 없는 시간.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애썼고, 몇 번은 지쳐서 떨어졌으며, 그럼에도 다시 올라왔다는 사실만이 용히 남아 있다. 무엇을 잘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기억해 보려다 이내 그만둔다.


쉽게 흔들렸으나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다. 끝까지 가려 애썼다기보다, 끝까지 나를 데리고 가려 했던 시간이었다. 방향을 알 수 없을 때에는, 모른다는 상태를 서둘러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간절하게 붙들었다. 버티는 대신 의미를 찾으려 했고, 성과보다 존엄을 지키려 했다. 그렇게 25년은 나를 앞세우기보다 나를 놓지 않으려 애쓴 한 해였다.


26년이 시작된다. 사실 다른 날과 다를바 없는 또 다른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우리는 매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외줄 위에서 익혀온 생존 전략도, 버텨내던 방식도 잠시 내려놓은 채, 다시 빈손으로 출발선 앞에 서본다.


<Invictus> 라는 시는 성공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존엄을 말한다.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이며, 내 영혼의 주인이다”라는 문장은 외줄 위에서 흔들리는 나에게 끝내 놓지 말라고 말한다. 굴하지 않음이란 넘어지지 않겠다는 오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한다. 삶이 아무리 거칠게 흔들어도, 나라는 존재의 중심만큼은 내어주지 않겠다는 고독 속의 결의이다. 어쩌면 내가 외줄 위에서 끝까지 붙잡아야 할 것은 균형이 아니라, 스스로를 향한 믿음일지 모른다.


삶은 어쩌면 외줄타기처럼 위험한 곡예이자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넘어져도 되며, 그럼에도 다시 걸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예술이다. 나는 지금도 외줄 위에 서 있다. 25년의 끝과 26년의 시작 사이에서 잠시 멈춰 서서 앞을 바라본다. 외줄 위에서 마주한 풍경이 눈물 나게 아름답다. 지금 이 문장을 읽으며 잠시 눈을 감은 이들의 마음속에, 저마다의 풍경이 고요하면서 찬란하게 펼쳐질 것이다. 이제는 조금 덜 두렵다. 지금은 방향을 몰라도 된다. 내년에도 나는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리고 이제는 더이상 외줄타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괜찮다.


© 출처 Unsplash




Invictus

by William Ernest Henley


Out of the night that covers me,

Black as the Pit from pole to pole,

I thank whatever gods may be

For my unconquerable soul.


In the fell clutch of circumstance

I have not winced nor cried aloud.

Under the bludgeonings of chance

My head is bloody, but unbowed...


It matters not how strait the gate,

How charged with punishments the scroll,

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굴하지 않으리


온 세상이 지옥처럼 캄캄하게

나를 엄습하는 밤에

나는 그 어떤 신이든, 신에게 감사한다.

내게 굴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음을.


일상의 그악스러운 손아귀에서도

나는 신음하거나 소리 내어 울지 않는다.

우연이라는 몽둥이에 두들겨 맞아

머리에서 피가 흘러도 고개 숙이지 않는다.


천국의 문이 아무리 좁아도,

저승의 명부가 형벌로 가득 차 있다 해도

나는 내 운명의 지배자이고,

내 영혼의 주인이다.




William Ernest Henley

영국의 시인, 비평가(1849~1903). 유년 시절 결핵으로 한쪽 다리를 잃었고, 에든버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시를 썼다.


축복/ 장영희 지음/ 비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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