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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뜨거운 레모네이드 한잔을

아름세계 2025년 5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by 강아름

밤이 내린 시장 구석 한편에 자리 잡은 오래된 LP 바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뜨거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지금, 나는 나른한 행복을 느낀다. 마치 우주에서 중력이 없이 떠다니는 기분이다. 이대로 깃털같이 떠돌다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괜찮을 것만 같다. 이 우주를 운영하시는 노부부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할아버지는 기다란 바 테이블 중앙에 턱을 고이고 앉아 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손님이 들어와도, 메뉴를 시켜도 느릿하게 눈동자만 움직여 할머니 쪽을 바라볼 뿐이다. 커다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랫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케이블 TV 프로그램을 보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눈빛을 어떻게 알아챘는지 주문을 받으신다. 주문한 칵테일은 보드카와 오렌지 주스를 적절히 섞은 스크루드라이버로 오렌지 맛이 나야 하지만, 이곳의 칵테일은 그 종류와 상관없이 모두 소주와 다름이 없었다. 또한 레모네이드에는 얼음이 동동 띄워져 있었으나, 빨대를 통해 빨아들이니 뜨끈한 레몬즙이 혀를 데우고는 목구멍을 따라 흘러 내려간다. 아직 대류 현상을 거치지 않은 뜨거운 레모네이드와 비율 조절 따위는 사치스러운 소주 맛 칵테일을 만난 나는 이곳에서 더 이상 정해진 규칙이나 상식 따위에 기대지 않는다.


아무튼, 바의 시간은 흐르고 있다. 나는 그저 초침처럼 뛰는 심장 박동을 그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으로 전달하며 초조한 행복을 느낄 뿐이다. 철없이 시간이 멈추길 바라지만, 흐르는 것들은 막을 수가 없다. 하늘에는 구름이 흐르고, 풀밭에는 바람이 흐르고, 산 아래에는 강이 흐른다. 그들은 어떤 위대한 목적도, 음습한 악의도 없이 단지 흐를 뿐이다. 그럼에도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이대로 깊은 바닷속에 잠기고 짜디짠 바닷물에 잠식당하여 나라는 존재가 익사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리저리 부딪혔다. 변하지 않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먹지도 않고 어떻게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연어의 애처로운 몸부림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며 생긴 상처는 경험으로 아물었다. 그것이 흉터인지 훈장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경험이라는 댐을 쌓는 것만이 매정하게 흘러가는 세상에서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돌과 흙을 쌓고 쌓아서 다른 누군가나 무언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간 후에 좋아하는 일과 취미를 찾고 그곳에 뛰어들었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가용한 시간과 비용을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어느새 하기 싫은 것투성이였던 세상은 하고 싶은 것으로 가득해졌고, 쾌감과 성취감, 보람과 만족감을 느꼈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 행복을 위한 발판이 되었다. 나를 살아남게 했고 살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래서 편안을 희생시키기로 했다. 흘러가는 대로 살면서 나를 잃어버린다면, 내가 아는 행복을 놓쳐버린다면, 다시 지옥 같은 어둠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지옥은 땅에 묻힌 것이 사람인지 흙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잿빛의 밤이었다. 그곳에서 거울에 비친 나는 아무리 훑어보아도 사랑하고 싶은 구석이 하나도 없는 악마였다.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모든 순간이 도전이어야 했고 어떻게든 행복이라는 결과로 도출되어야 했다. 그렇게 컨베이어 벨트 위에 삶을 통째로 얹게 되었다. 행복을 주었던 삶의 의미들은 서로 엉겨 붙어 무거운 책임이 되어버렸고,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버려 고인 강물이 썩어가는 것도 모른 채 댐을 높이높이 쌓아 올렸다.


그러나, 꿈꿔 왔다. 아무렇게 살아가도 아무 일 없이 행복하기를. 작은 근육조차도 불편함이 없이 이완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는 순간에 어떤 죄책감도 없기를. 꿈은 당연하게도 좌절되어 조각났지만, 떨어진 파편들은 땅속에서 외로움으로 자라났다. 심리치료팀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격증을 따며 미래를 계획하고, 열정적으로 취미를 탐색하며 삶을 즐겼지만, 이제는 쉴 곳이 필요했다. 직장은 피곤하고, 집은 쓸쓸하고, 여행은 다급했다.


쉴 곳이 필요해… 아무 생각 없이, 아무 일 없이… Let There Be Love… Let There Be Love…….


뮤직비디오 속 록스타의 쇳소리에 눈을 뜨고 꾸던 꿈에서 깨어난다. 이윽고 차가워진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어느새 댐의 수문이 모두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강물은 다시 흘렀고 마음은 조금씩 정화되었다. 손에 땀이 난 그녀가 나를 올려다본다. 서로 마주보다 멋쩍게 웃는다. 사랑도 흐르는 성질을 지녔다. 먼저 뜨거운 여름 같은 사랑이 꽁꽁 얼어있던 나만의 겨울왕국을 녹인다. 사랑은 서로 다른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움과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녹아내린 자신을 서로에게 흘려보낸다. 처음엔 어색하고 낯설지만, 뜨거운 레모네이드가 차가워지듯, 둘은 섞여 하나의 시간으로 흐른다. 이제서야 보게 된 장면이 있다. 여전히 가만히 바에 기대 노래를 듣는 할아버지는 뒤에 있는 벽장에 가득한 레코드판과 멋들어진 턴테이블을 두고 유튜브로 뮤직비디오를 틀어주고 있었다. 소주 맛이 나는 칵테일을 홀짝거리는 그녀에게 이야기하자 까르르 웃는다. 자연스럽게 그녀가 품 안에 안긴다. 나는 깨닫는다. 그녀가 나의 쉴 곳이다. 그녀라는 바다를 향해 나는 강물처럼 흐른다. 어떤 목적도 의도도 없이 단지 흐를 뿐이다.


밤이 내린 시장 구석 한편에 자리 잡은 오래된 LP 바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차가워진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지금, 나는 나른한 행복을 느낀다. 마치 오래된 꿈을 꾸는 기분이다. 이대로 길을 잃고 떠돌다 깨어나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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