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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완성 자서전 May 20. 2022

코로나 격리 덕분에 쓰는 글

안 썼으면 더 좋았을

확률 싸움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백 번 조심하면 될까 했더니 아니었다. 결국 어디서 인지도 모르게 코로나에 걸리고 말았다. 따가운 목을 움켜쥐고 방에 혼자 누워있자니 기가 찼다. 지난 2년 동안 도대체 난 뭘 위해 유난스러울 정도로 조심하며 살았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스쳤다.


역시  슈퍼 DNA 가졌나 하며 까불다가 뒤통수를 세게 맞고 나니  또렷해진 생각  가지를 기록해두려고 한다.


생각 #1.

지난 2년을 돌이켜보니 징글징글하게 미웠던 코로나가 나에게 유용한 방패가 되어주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열정 넘치는 마음에 못 미치는 저질체력, 귀찮음을 이기지 못한 호기심, 끊어내긴 아쉽지만 만나기는 싫은 사람, 가고 싶지만 안 가도 되는 여행 등등 많은 것들의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무언가를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아도 내 자신이 크게 못나게 느껴지지 않는 행복한 착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난 그 핑계 뒤에 숨어서 내 인생 최고로 나태하고 무기력한 버전의 나로 살았다. 이제 항체가 생겨 당분간은 코로나로부터 안전하다던데…아주 큰 핑곗거리가 사라지고 나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잠시 혼란스럽다.


생각 #2.

클리셰이지만 일상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것을 느꼈다. 격리 3일째 되던 날 갑자기 후각과 미각을 잃었다. 2주가 다 되어가지만 아직 60% 정도만 회복되었다. 맛이 안 느껴지니 식사시간이 즐겁지 않고 가족들을 위해 요리를 하는 것도 고역이다. 감으로 겨우 간을 맞추고 남편의 눈치를 살펴야 하니 매일이 테스트 같다. 그리고 나에게서 나는 향기?가 어떨지도 신경 쓰이고, 돌쟁이 아들의 기저귀에서 풍기는 냄새도 못 느끼니 기저귀 갈 타이밍을 자꾸만 놓친다.


격리 중 아이들을 못 만나니 (가족 중 나만 증상이 있어 혼자 방에서 격리를 했음) 힘들어도 아이들과 부대끼는 시간이 소중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며칠 새 새로운 개인기가 생긴 아이들을 보면서 아이들의 하루는 어른의 그것보다 길고 중요하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건강하게 다시 만났으니 아이들의 하루하루가 더 의미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생각 #3.

앞으로 나의 코로나 경험에 대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줄 기회가 생긴다면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경미하게 코로나를 겪은 일부 지인들이 이참에 아이들도 항체가 생기면 좋지 않냐며 격리를 뭐하러 하냐는 말을 했다. 솔직히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다. 그리고 과학이 확률상 현재 유행하는 변이가 치명률이 낮다는 걸 보여주니 그 생각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난 지인의 그 말이 다소 무책임하게 들렸다. 내 가족이 경미한 증상으로 끝나는 다수에 속하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코로나 확진 소식을 전해온다면 최선을 다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라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생각 #4.

난 결혼을 참 잘했다.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서로 사랑하겠노라 했던 약속의 무게를 느끼는 시간을 보냈다. 홀로 격리 중인 나를 대신해 두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을 하고 나의 식사와 간식까지 살뜰히 챙겨준 대단하고 고마운 남편. 나도 남편이 아팠다면 (그럴 일 없길) 그랬겠지만 남편의 마음과 노력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나중에 남편이 미워지면 오늘의 이 마음을 상기해야겠다.

격리중 남편이 만들어준 꿀맛이었던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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