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

만 3세 남자아이 한복 빌려드려요. 언제든 연락 주세요.

by 김하예라

그날. 아들의 한복을 사기 위해 처음부터 노력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진심.


어린이집에서 설날 맞이 놀이와 세배 행사를 한다고 한복을 준비해오라고 한 이후로 난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동동이의 한복은 이미 한참 작아져있었기 때문에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사려고 했단 말이다. 그러나 어디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 내가 원하던 대로 , 계획대로 이루어지던가? 하루는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한 직후라 기운이 없었고, 그다음 날은 외출 준비를 다 했는데 자동차 열쇠가 없어져서 다시 들어왔고, 카카오 택시를 불렀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호출할 수 있는 택시가 없다고 했다. (없어졌던 자동차 열쇠는 그다음 날 거실의 서랍장과 매트 사이에 끼인 채 발견되었다. 이것은 분명 동동이 짓이라고 합리적 의심을 해본다.)또 하루는 동동이의 컨디션이 안 좋았고, 또 그다음 날은 내가 서울에 계신 지도교수님을 뵈러 가야 해서 한복을 사지 못했다. 참, 남편이 나 대신 한복 사러 가려고 계획을 했지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날 회사 같은 팀 사람이 코로나 확진이 되는 바람에 PCR 검사를 받고 집에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가 격리해야 했다. 동동이 한복을 사는 것을 못된 악마가 졸졸 따라다니면서 막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결국 설날 행사가 당장 내일 아침으로 다가왔지만, 내가 모든 일정을 마치고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에 뛰어갔을 때에는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있었다. 난 작아진 한복이라도 입혀서 보낼까 생각했고, 남편은 그냥 내일 어린이집에 보내지 말자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다른 이유이면 몰라도 한복이 준비되지 않아서 어린이집에 못 간다니 말이 안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머리를 굴렸다.


'그래, 빌리자!!'


난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교회에서 1년 동안 같은 소모임을 했고, 동동이와 비슷한 월령의 남자아이를 키우는 한 집사님께 밤 10시 30분이 넘어 메시지를 보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o o 어머니, 늦은 밤 정말 죄송해요. 혹시 ㅇㅇ이 한복을 좀 빌리러 가도 될까요? 내일 어린이집 행사라서 입고 가야 하는데, 제가 아직 못 구했어요.'

'어머나!! 동동이 어머니 반가워요. 다행히도 우리 아이는 모레가 행사예요! 지금 오시겠어요? '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실례를 하네요. 집 주소 좀 알려주시겠어요?'


ㅇㅇ이 어머니는 이제 아이를 막 재우려고 했다면서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주셨고, 문고리에 한복을 걸어준다고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메시지가 왔다.


'동동이 한복 신나게 입고, 또 뭐 묻어도 상관없어요. 비싼 것도 아닌 거거든요. 그러니 마음 편하게 입히시고, 돌려주시면 돼요!'


평소라면 드라이클리닝 해서 돌려드려야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는 내가 혹시라도 부담스러워하거나 미안해할까 봐 편하게 입어도 된다고 배려의 마음을 보내주신 것이다. 정말 감사했다. 밤 열한 시에 한복을 빌려 집에 돌아왔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아들을 위해 할 일을 했다는 뿌듯함에 잠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새벽 6시에 동동이가 선잠이 깨어 일어났다. 그리고 이유 없이 1시간을 울었다. 그러다 잠에 깨서 짜증이 난 그 아이도, 안고 달래던 나도 지쳐서 다시 잠들었다. 그 전날 서울까지 가서 높은 굽 구두를 신고 온 상가를 돌아다니다, 늦은 밤 아이 친구 엄마에게까지 찾아가 한복을 빌리러 다니느라 지쳤는지, 내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 9시가 넘어있었다. 그리고 새벽에 우느라 진을 뺀 아들은 누가 안고 도망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갈등이 일어났다. 재울 것인가, 깨울 것인가. 그때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동동이 담임선생님이 PCR 검사받고, 현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설날 행사는 매우 축소되었다고 양해를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동동이를 푹 재우기로 했고, 어린이집에는 보내지 않았다. 잠든 동동이를 꼭 껴안고 나도 다시 잠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빌린 한복을 사용도 못 하고 돌려드렸지만, 그래도 최소한 준비를 못 해 어린이집에 못 보낸 것은 아니니까. 내 할 일을 했으나, 어린이집 상황이 안 좋아져서 동동이를 안 보낸 것이니까. 나중에 아이에게 할 말은 있었다. 그리고 한복을 빌려준 ㅇㅇ이 어머니께 기프티콘을 감사의 마음과 메시지를 꾹꾹 눌러 담아 보내드렸다. 그다음 날, ㅇㅇ이는 깨끗한 한복을 입고 무사히 어린이집에 등원했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사실, 나는 그동안 아이와 관련된 부탁을 누군가에게 해본 적이 거의 없다. 다른 이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 것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정말 별의 별일이 생기고, 갑작스럽게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도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애써 외면하며 살았다. 어떻게 보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해서, 내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은 줄지언정 아쉬운 소리는 하지 않고 살겠다는 야무진 오만함이기도 하다. 나도 사실은 아들의 어린이집 행사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부탁을 하고, 아쉬운 소리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었다. 이제 나에게도 선을 넘지 않고, 상식 안에서 도움을 주고받으며 나와 너의, 우리의 아이들을 키워도 된다는 여유와 융통성이 생긴 듯하다.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이웃에 대해 나도 그만큼 편안해진 것이다...


동동이를 키우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내가 아이를 키우는 것도 있지만, 아이가 나를 더욱 괜찮은 사람, 품이 넓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사람으로 키워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혼자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아들의 식습관, 생활습관 개선을 위해서 어린이집 선생님들의 도움이 절실했고, 친구 엄마, 같은 반 친구들도 동동이의 건강한 사회성을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분들이었다. 밤 11시에 한복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바로 친구 엄마라는 이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온 마을이 함께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겠다.


어린이집 행사는 끝났지만, 다가오는 설을 위해 동동이의 한복을 샀다. 이번에는 넉넉하게 큰 것으로 샀다. 그리고 한복을 입고 나서 곱게 세탁하여 안방 옷장에 걸어놓을 것이다. 혹시 한복이 꼭 필요한 동동이의 친구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기꺼이 자신 있게 빌려주기 위해 예쁜 것으로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내 마음에 메모를 써 붙여 놓았다.


'만 3세 남자아이 한복 빌려드려요. 언제든 연락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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