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의 또 다른 이름

섬세하다. 정서적이다. 공감한다.

by 김하예라

예민한 아들 동동이를 키우다 보면 힘든 일이 많다. 그러나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지며, 아들에 관한 데이터가 쌓이자 아이의 장점을 하나둘씩 발견하게 된다. 그럴 때는 마치 금광에서 금을 캔 듯, 보석이 묻혀 있는 어느 밭을 발견한 듯, 기쁨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예민하다'라는 단어의 다른 말은 '섬세하다', '정서적이다', '공감 능력이 뛰어나다'라는 것이다. 아직 말을 잘 못하고, 표현능력이 서툴러서 그렇지 이 아이의 마음속은 다양한 사고와 느낌과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예민함'이라는 아들의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까탈스럽고 까다로우며 비협조적 아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볼 것이 아니라 미숙하지만 고유의 섬세함과 뛰어난 관찰력으로 사물과 현상을 탐구하고 깊게 파고들 것이라는 기대와 긍정적인 시각을 가져보려 노력했다.


섬세한 동동이는 집에서 놀거나 간식을 먹을 때, 비발디의 서정적인 음악을 들려주면 좋아했다.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을 느낄 줄 알아 손을 흔들며 리듬에 맞춰 춤을 추곤 했다.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이 나오면 가지고 있던 블록으로 피아노 음과 박자에 맞춰 탁자를 톡톡톡 두드렸다. 음감을 느끼고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특히 내가 자주 듣는 장범준의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 향이 느껴진 거야'라는 노래가 나오면 전주 부분이 나오기 시작할 때부터 엉덩이를 들썩들썩하더니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시도하는 것이 아닌가. 아직 우리말이 서투니까 음절의 마지막 글자만 따라 하는 식이었지만 분명히 음악을 느끼고 있었다. 경쾌하고 부드러운 음악을 즐기는 동동이를 보며 나도 함께 웃음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동동이를 깨울 때, 이전에는 '둥근 해가 떴습니다'라는 씩씩한 동요를 틀어주었는데, 요즘은 장범준의 노래를 틀어준다. 그러면 배시시 웃으면서 일어나곤 한다. 그렇게 '동동이'라는 소우주의 세계를 하나둘씩 알아가는 것은 육아의 커다란 수확이자 기쁨이다.


예민한 동동이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줄 알았다. 어느 날 아이가 즐겨보던 유튜브 동영상에서 주인공 여자아이의 동생인 어린 아기가 울고 있는 장면이 나왔다. 그러자 아들은 나를 한번 바라보고, 아기를 한번 바라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며 당황해했다. 동동이가 슬프다는 감정, 그래서 울고 있다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 번은 내가 다홍이를 혼낸 적이 있는데,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누나에게 다가가더니 누나의 손을 잡아, 자신의 볼에 가만히 갖다 대었다. 울지 말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은 내가 남편과 다투고 속상해서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때 동동이는 엄마라는 말도 할 줄 몰랐는데, 바쁘게 알파벳 조각을 하나씩 가져와서 책상 위에 놓고 갔다. 단어는 'MOMMY'였다. 동동이가 자신보다 한참이나 큰 누나를 위로할 줄 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엄마가 아빠랑 싸워서 지금 슬프니까 엄마를 한번 불러줘야겠다'라는 아이의 어여쁜 마음이 읽어지니, 내 마음도 몽글몽글 해지며, 이 아이의 섬세한 감수성을 인정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는 동동이가 아침에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고 울 때, 그것을 단지 아이의 이유 없는 생떼 정도로만 생각하고 그저 내 뜻대로 밀어붙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직 자신의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하는 아들의 눈을 찬찬히 바라보며, 그의 마음을 읽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동동이의 마음은 하루 내내 따스할 것이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어린이집에서 사회생활을 할 때, 커다란 힘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뭐라고 하든 말든 울어 젖힐 때도 있지만....) 보통 나는 아들이 울 때, '오늘은 피곤하니?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구나? 혹시 옷 입는 것이 귀찮은 거야?'라며 아들과 눈 맞추고, 천천히 말해주려고 노력한다. 시간 내에 빨리 아들을 등원시켜야 하겠다는 마음을 버린다. '어린이집 지각'이라는 개념을 잊는다. 그렇게 내 마음에 여유를 확보한 뒤, 아들에게 말을 걸어주면 동동이의 신경질이 가라앉으면서 '오늘은 엄마가 내 마음을 알아주네?'하는 안도의 표정이 스치고 지나간다. 바로 그때 아들을 한번 꽉 안아주고, 천천히 옷을 입히면 얌전히 따라온다. 이렇게 섬세한 아들이 원하는 것이 뭘까를 생각하면서 아들의 입장에서 말을 건네주면 그날의 어린이집 등원은 대성공이다.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것이다. 아들은 엄마의 일방적 지시가 아닌 엄마와의 감정적 교류를 원했다.


작년 겨울이던가, 동동이가 어린이집 여자아이들에게 고백을 받았다는 사실을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해 듣고 혼자서 웃은 적이 있다. 내가 예측하건대, 동동이는 아직 말을 잘 못해서 조용할 것이고, 친구가 울고 있으면 가만히 다가가서 손을 잡아 자기 볼에 갖다 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교실에 붙어있는 알파벳 자석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단어를 만들고, 친구에게 가르쳐주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쌍꺼풀지고 커다란 눈의 동동이가 조용하게 친구를 위로해 주고, 영어까지 알려주니 여자아이들 눈에 동동이가 멋져 보일 수도 있겠다. 어른의 입장에서는 우리말을 모르고, 잘 울고, 느린 동동이는 또래의 친구의 시선에서 보면 묵묵하고 천천히 자신을 위로해 주는 멋진 친구인 것이다. 마치 애니메이션 '뽀로로와 친구들'에서 모든 의사 표현을 '크롱'으로 하는 새끼 공룡 크롱을 또래의 친구들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알아듣는 것처럼 말이다.


새롭게 아들을 바라보니, 동동이의 언어와 사회성 발달에 대하여 내가 그렇게 밤새워서 걱정하고, 고민할 문제는 아닐 수도 있겠다는 어떤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느린 아이의 엄마로서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었다고나 할까. 아들은 자신이 타고난 발달 시계와 성향 지도에 따라 부지런히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어리석은 엄마인 내가 '내 아이는 이래야 한다'라고 고정관념에 완벽한 아들의 모습을 미리 그려놓고, 그것에 맞지 않을 때 실망하는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자존감의 성장은 아들뿐 아니라 엄마인 나에게 더욱 필요한 것이다. 당당해지자...


'조용한 음악, 경쾌한 멜로디, 타인과의 풍성한 감정 교류를 좋아하는 아들 동동이'라는 하나의 발견을 마치고 기록하며,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을 다시 한번 느낀다. 사람은 그 누구나 아름답다. 그러니 아이에 대해 걱정하거나, 애달픔에 울지 말자. 걱정 대신 관찰하고, 이해하고, 해석하자. 그러면 길이 보일지도 모른다. 날마다 흔들리는 육아라는 꽃들 속에서, 아들의 달착지근한 샴푸 향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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