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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Sep 21. 2022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었던 나를 위한 신의 선물

학위논문과 아들 육아

한동안 나는 나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를 주곤 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상황의 한계를 열심히 극복하여,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했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따뜻한 마음으로 배려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하는 인성을 고루 갖춘 사람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나의 배려와 존중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런 단서가 붙곤 했다.


'단, 나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에 한해서 나도 친절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칭찬이나 친절한 말을 해주는 사람들만 좋아하고, 나에게 쓴소리나 충고를 하는 사람은 마음에서 배제해 놓거나, 적절한 거리를 둔다는 것이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 누군가 나에게 하는 쓴소리를 들을 때, 나는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렵고, 마음이 여려서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에게 싫어 소리 하는 그와는 거리를 두겠다는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15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았기에, 누군가의 지시를 듣기보다는 지시를 하는 것이 훨씬 더 익숙하고 쉬운 일이었다. '남 가르치려 하는 말투'가 아주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고, 고마워하지만 나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귀담아듣기보다는 애써 잊으려 노력했고, 마음속에서 지우려고 했다. '아니, 나는 정말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요?'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럴 리가....... 참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 '나에게 충고는 하지 마세요. 어차피 안 들을 테니까.'라는 고집스럽고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불통 & 꼴통'이었다.


대신, 남에게 소위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쓴소리를 들을만한 행동은 처음부터 하지 않겠다면서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살았다. 타인에게는 알아서 친절하게 행동했고, 남의 부탁을 거절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친구와의 약속을 내가 먼저 어긴다든지, 쓰러질 정도가 아닌대도 결석을 한다든지, 혹은 성대결절도 아니면서 내 수업을 휴강한다든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결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 완벽한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면서 살았다.


어느 날부터인가 신은 나의 그 고질적인 특성인 '남에게 싫은 소리 듣는 것을 죽기보다 더 싫어하는 오만함'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작정하신 것 같았다. 그래서 나의 모난 부분을 깎고, 부수고, 문질러서 단련시키시기로, 그래서 진짜 괜찮은 사람을 만들기로 마음을 먹으신듯했다. 그분이 나를 위해 선택한 것은 '박사학위논문 작성'과 '자녀 양육 과정'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나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하기 싫다고 도망갈 수도, 남이 대신해 줄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롯이 '남에게 쓴소리를 들어야'하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는 끝없는 사막처럼 막막한 시험이었다.


원래 박사학위논문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었는데, 포기하기에는 이미 늦었기에 어쩔 수 없이 시도한 것이었다.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님의 자세한 피드백을 받으면서 '나는 과연 바보가 맞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도 교수님은 평소에 말씀을 많이 하시는 분은 아니셨다. 내가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글을 써 가지고 가도, 절대로 말씀을 거칠게 하는 분도 아니셨다. 논문 지도받는 시간에 그동안 쓴 논문을 프린트해서 몽땅 가져가면 그 자리에서 소리 내어 읽으시면서 빨간펜으로 고쳐 주셨다. 문장을 읽으시다가 '그런데 이건 무슨 말이지요?', '이건 논리적으로 흐름이 맞나요?', '여기 이 부분은 빼야 되겠지요?'라는 말씀으로 차분히 지도를 해주셨다.


한 시간 넘게 나는 내가 쓴 말이 안 되는 문장들을 교수님의 목소리로 하나하나 들어야 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나는 논문을 쓸 능력이 없는 사람이 맞다'는 것과 '나의 논문은 쓰레기가 맞나 보다..'라고 확신하며 너덜너덜해진 멘탈을 간신히 붙잡고 집으로 온 적이 몇 번이던가. 집에 돌아와서는 눈물과 한숨을 삼키며 수많은 문장을 아낌없이 삭제하고 다시 쓰곤 했다. 거기에 다섯 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1차 심사, 2차, 최종 심사를 받고, 학교 연구 윤리 위원회의 심의에서 한번 떨어져서 2차 심의를 받는 과정까지 총 다섯 번의 심사를 받았다. 심사평(혹평이 대부분)을 들은 후에는 여지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다섯 명의 심사위원이 내 논문에 써놓은 피드백을 보고 있으면 그분들의 조언이 마치 날카로운 면도칼이 되어서 마음에 30센티미터 정도의 상처를 지익하고 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처는 상처고 학위는 받아야 하니 특별한 수는 없었다. 그저 고쳐야 했다.


다음으로, 자녀 양육(그중에서도 아들)은 나를 더욱 할 말이 없게 만들었다. 논문은 그래도 내 손으로 쓰는 거니까 '자녀 양육'에 비하면 훨씬 쉬운 '입문자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거의 하나도 없는 아들, 얘는 3세 무렵부터 갑자기 예민한 성격이 발현되더니, 낯선 환경을 굉장히 싫어하고, 본인이 하기 싫은 것은 죽어도 안 하겠다는 고집을 부렸다. 아들 육아를 통해 나는 싫은 소리를 여한 없이 들었다. 내가 피하고 싶어도 하루에 두 번은 꼬박꼬박 만나야 하는 아들의 담임선생님은 하루에 두 번씩 나에게 다양하고 자세한 요구를 하셨다. 어느 날은 어린이집 등 하원 시간에 선생님이 다른 아이 어머니와 이야기 나누시는 틈을 타서 눈인사만 나누고 어린이집을 쏜살같이 나온 적도 있다. 그랬더니 오후에 선생님이 나에게 전화를 하셨다. '아까 미쳐 말씀을 못 나누었다는데 혹시 시간 되시냐'면서 선생님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이의 어린이집 생활을 지켜보며 느낀 아이의 단점, 부족한 점, 약한 점을 조목조목 거의 한 시간가량 말씀해 주셨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었고 따뜻하고 조곤조곤한 말투로 해주셨지만, 선생님의 쓴소리는 나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러나 들어야 했다. 


박사학위 논문 작성과 아들 육아라는 두 가지 어려운 훈련과정을 거치며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내가 얼마나 듣는 것을 못하는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몇 년에 거쳐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쓴소리, 잔소리, 싫은 소리를 듣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 무엇보다, 나는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고, 완벽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에 이르러 결국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다. 부족한 점을 인정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또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말하면 그만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경청'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누군가 나에게 해준 쓴소리는 나를 향한 해코지가 아니라 나를 위한 약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의견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새기고 귀를 기울여 듣게 되었다. 약이 되는 쓴소리 덕분에 무사히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고, 아이를 더욱 밝게 키울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신은 나에게 어려운 과제를 자꾸 던져주면서 못살게 하고,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완벽이라는 무거운 허상, 나만 옳다는 자기 확신의 오만함을 이제 그만 내려놓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유롭게 마음껏 실수하고, 즐겁게 수정하고, 행복하게 완성하는 기쁨을 알게 해 주셨던 것이었다. 이제는 나에게도 남에게도 불편한 사람이 아닌, 편한 사람이 되면 참 좋겠다....


자, 출제자의 의도를 알았으니 내 인생에 주어지는 문제를 쉽게 풀어갈 것 같다. 그리고 문제를 풀다가 뭐... 좀... 틀려도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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