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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하예라 Dec 20. 2022

가방 들고나갈 일

얼마 전 여동생이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내주었다.  하늘색 가방 사진이었다. 요즘 같은 가을이나 곧 다가올 겨울철에 하기에는 약간 차가운 느낌의 색상이었다. 그렇지만 봄이나 여름에는 어떤 옷에도 어울릴 법한 색깔이었다. 색상이나 모양, 크기 모두 딱 내 마음에 드는 멋스러운 핸드백이었다.


"언니, 이 가방 언니 할래?"

"응?"

"나는 이제 이런 가방 안 들 것 같아서... "


동생은 딸을 출산한 지 6개월 정도 되었고, 한참 아기를 키우느라 정신이 없다. 동생은 정장 옷차림에 어울릴 것 같은 그 가방을 한동안은 하지 않을 것 같다고, 자신은 천으로 된 튼튼하고 큰 기저귀 가방 하나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익숙한 느낌으로 심장에서부터 뭔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동생은 자신의 역할, 즉 아기 엄마에 무척 충실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심리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록 휴학을 하기는 했지만 박사과정 학생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여 정성껏 키우는 일은 이 세상에서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소중하고 가치로운 일이다. 그러나 아기 엄마이면서 '나 자신'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울컥하는 마음을 잠시 누르고 동생에게 말했다.


"그 가방을 들고나갈 일을 만들면 되지. 그걸 왜 언니를 줘?"

"어울리는 옷도 없어."

"옷을 사. 그리고 가방을 메고 나가."

"하긴. 결혼식도 가야 하고. 입을 옷이 없으니까 나가기가 싫더라.. "

"그래. 너는 엄마이기도 하지만, 상담사이기도 하고, 대학원생이기도 하잖아. 복학을 해야하지만...당장 이번 주에 교회 갈 때, 제부에게 아기 띠 하라고 부탁하고 너는 예쁘게 옷 입고, 구두 신고 오면 되지."

"그런가...?"

"그럼!!"

"이 가방은 그냥 내가 가지고 있는다."

"그래. 언니 줄 생각하지 말고 가지고 있다가 예쁘게 옷 입고 그 가방 메고 외출해! 알았지? "

"응. 내가 왜 그렇게 할 생각을 못 했을까?"


대화 끝에 동생의 목소리가 한층 더 밝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에 아웃렛에 가서 예쁜 원피스를 한 벌 살 것이라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하루 종일 아기만 바라보고 아기 생각만 하느라, 자신을 꾸미는 것을 잊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참 잘했다고 칭찬을 잔뜩 해 주었다. 아기 엄마라고 해서 모두 기저귀 가방만 들고,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만 다니라고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니까.


나를 위해 고른 작은 귀걸이 한 쌍, 예쁜 블라우스 한 벌, 가을에 어울리는 짙은 베이지색 플랫슈즈 한 켤레의 가격은 그렇게 비싸지 않다. 아기를 남편에게 맡겨놓은 어느 토요일 오후, 나를 위한 액세서리와 옷을 멋지게 차려입고, 대학로의 어느 극장에 가서 괜찮은 연극을 한 편 보고, 극장 근처에 있는 어느 작고 근사한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집에 돌아오면, 그동안 쌓였던 육아 스트레스를 많이 해소할 수 있다. 연극을 보러 외출할 때, 꼭 친구랑 함께 가지 않아도 된다. 가장 친한 친구인 나 자신과 함께 가는 것이니까 외롭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친구랑 약속하려면 둘이서 시간 맞춰야지, 둘 다의 취향에 맞는 연극 찾아야지, 예매 누가 할지 정해야지, 앤분의 일로 나눠서 돈 보내줘야지 아휴 복잡하다. 영유아를 키우느라 지친 엄마에게는 친구와 만나는 것 자체가 정신적 스트레스일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러니까 혼자 준비해서 심플하게 외출했다가,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재빨리 집에 들어오면 그만이다.


어느 책에서 '엄마의 날씨가 아이의 성격을 형성한다.'라는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 엄마가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야 아이도 엄마의 미소를 바라보며 더욱 밝게 클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늦둥이 아들을 키우며 내가 가장 기분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연습을 참 많이 했던 것 같다. 그중 하나가 예쁘게 차려입고 토요일 오후의 한가로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꽤 효과가 있어서 지금도 꾸준히 실천 중이다.


나의 여동생도 어린 딸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바빠서 남편이 있는 주말에는 그저 쓰러져서 자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엄마는 늘 수면이 부족하니까 말이다. 그러나 하루 아니 반나절 정도만이라도 아기와 떨어져서 나를 위한 시간을 만들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며 자유를 누려보는 것도 참 괜찮지 않은가? 나만의 방법으로 마음에 충전을 완전히 해준다면, 앞으로 해야 할 육아를 더욱 즐겁게 기운 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자, 그러니까 이제 가방 들고나갈 일을 만들어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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