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311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존재야.
우리랑 똑같이 생겼지만, 이름도 나이도 집도…, 아무것도 몰라.
단 하나, 그 사람이 지나가면 꼭 무언가가 남는다는 거야.
사람들은 남기지 않으려고 그에게 선뜻 건네지만,
그런 그들에게 그 사람은 꼭 이렇게 말하곤 사라진대.
“어딘가에는 반드시 남는다.”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후회를 수집하는 사람이야.
꿈틀거리며 삶에 대한 의지가 가득한 소리와 냄새로 사방이 진동하는 계절이 시작될 무렵.
이런 봄을 여러 번 맞이해온 노인이 있었어.
여느 날처럼 그녀는, 집 근처 강가에 앉아 흘러가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녀의 눈빛은 공허했고, 어딜 향해 뻗어야 하는지 모를 손끝은 떨렸어.
“또, 봄이 왔구만 그래.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질 않는 그 약속을….”하며 명치 언저리를 떨리는 손으로 꾸욱 눌렀어.
“꺼낼 수만 있다면, 이 물에 던져 흘려보내고 싶습니까?”
노인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어.
“당신이 소문으로만 듣던, 그분이시군요.” 노인은 말했어.
수집가는 별다른 말 없이 강가에 돌멩이를 하나 던질 뿐이었어.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셨고, 이렇게 말씀도 하시는데…, 왜 당신에 대해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거죠?”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노인은 가만히 듣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어.
“저는 젊은 시절, 한 사람과 어떤 약속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이제는…, 세월이 너무 지나 얼굴이 기억나지 않고,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도 흐려졌지요…. 뼈처럼 새겨진 이 ‘약속’이라는 것만 남아, 봄이 오면 여기가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어요.”
수집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채로, 그저 노인의 곁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았어.
“이런 후회도 없애주십니까?”
수집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는 노인의 그림자를 가로질러 지나갔고 그렇게 사라졌어.
노인이 감았던 눈을 떴을 땐,
짧지만, 깊은 낮잠을 잔 듯, 살랑이며 부는 봄바람이 깨끗하고 맑게 느껴졌지.
그녀는 한숨을 쉬며 무심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어.
오른손 손등에 검버섯 같은 작은 흉터가 눈에 띄었지만,
왼손 검지로 슥- 두 번 문지르고는 다시 강으로 눈을 돌렸어.
눈은 물결을 따라 흐르고, 손가락은 여전히 그 작은 흔적을 어루만지면서.
매미 소리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바람이 게을러졌어.
닿는 것마다 뜨겁고, 마시는 것마다 목마른 계절이 시작될 무렵.
밤에도 식지 않는 열기에 많은 사람들이 바닷가에 앉아 있었어.
한 남자도 사람들 사이에서 파도를 보고 있었지.
‘이렇게 모든 게 뒤집힐 듯 몰아치더라도…, 그 말을… 할 걸 그랬어.’
“그럼, 지금이라도 그 말을 전하는 건 어떠십니까?” 수집가가 그 남자의 곁에 앉아 말을 걸었어.
“네? 그걸 어떻게?” 놀란 남자는 되물었어.
“그 무거운 것을 제가 덜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다만, 흔적이 남을 겁니다.”
“흔적이라면…, 상처나 흉터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몸 어딘가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지요.”
남자는 고민에 빠졌어. 수집가는 늘 마주하게 되는 시간이기에 그저 가만히 기다렸어.
수집가가 생각하는 후회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어.
그리고 그것을 넘긴 자의 몸 어딘가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게 되었지.
사람들은 그것을 알고도 후회를 넘겼어.
어떤 이는 후회를 떨쳐버리거나 끝내는 것이 더 중요했고,
어떤 이는 그 흔적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가끔, 흔적이야말로 후회의 일부를 짊어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었어.
그는 그 후회들을 수집하며 떠돌아다녔어.
자신이 왜 이 일을 하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을 수도 있어.
그의 가장 깊은 곳에, 돌이킬 수 없는 것을 품고 있었거든.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했어.
망각은 축복이라고들 말하지만, 기억해 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의 후회를 거둬들이며,
그 무게와 사람들과 똑같은 흔적을 자신의 몸에 새기며 자신을 벌하기로 한 거야.
무게도 무게였지만, 멍처럼 퍼진 흔적이 문제였어. 거의 온몸을 뒤덮어 멀쩡한 곳이 없었어.
“너무 무겁습니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어.
“떠난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을 전하지 못했어요. 영원히 전할 수 없는 말인데, 이걸 안고 살아가기가 지금으로서는 너무 막막합니다.”
수집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런데, 저는 이걸 안고 살아가려고요.”
수집가는 어정쩡한 자세 그대로 멈춰, 그 남자를 들었어.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지만, 이 마음을 안고 살아야 계속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허공에다 말 걸듯 말해보기도 하고요.” 남자는 수집가를 보고 멋쩍게 웃었어.
자리에서 일어난 수집가는 고개 숙여 인사 후, 그림자를 밟지 않고 지나갔어.
미묘한 감정이 수집가를 감쌌고, 묘한 미소가 얼굴에 드리웠어.
수집가는 자신의 몸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후회를 계속 수집했어.
그러던 어느 날,
흔적이 너무 짙어지다 못해 깊어져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되었지.
그는 사라졌어.
그가 거둬간 후회들은 흔적을 남겼고,
그 흔적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갈 거로 생각했어.
후회를 넘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흔적과 후회를 받아들이고,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아 가는 이야기가 이어졌대.
수집가 사라진 후에도,
세상은 여전히 후회로 가득했어.
그리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후회 수집가가 태어나고 있을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