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0318
운은 오래된 정원에 서 있다.
그곳에는 초여름마다 꽃을 피우는 커다란 배롱나무가 한 그루 있다. 밤새 내린 비에 촉촉하게 짙어진 초록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어릴 적부터 이 나무 아래에서 소중한 순간들을 보냈다. 여러 날에 걸쳐 번갈아 피고 지며 햇볕에 알알이 빛나던 순간, 땡볕에 뛰어놀던 그녀와 친구에게 그늘이 되어주었던 어느 여름의 하루, 은은한 달콤함이 아이스크림인지 꽃향기인지 모를 정도였던 무더웠던 어느 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까지.
운은 가만히 나무를 바라본다.
연하지만 붉은 갈색을 띠는 나무껍질. 조각조각 얇게 벗겨지면서 흰 무늬가 생겼다. 매끈하지만 굴곡이 심한 줄기. 만지면 간지럼타듯 가지와 꽃잎이 흔들린다. 찬란하게 피어 있지만, 손을 뻗으면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하다.
‘기억은 꼭… 배롱나무 같아.’
꽃들이 피는 봄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만의 시간에 꽃을 피운다. 한 번에 흐드러지지 않고, 마치 어떤 선명하고 강렬한 순간을 새기듯이 퐁퐁- 여러 시간에 걸쳐 백 일 동안. 기억이 피어난 후, 그것들은 나를 이룬다. 단풍이 든 후 낙엽이 거름이 되듯이, 배롱나무의 뿌리를 감싼다. 거름이 된 기억들은 나무를 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또 자신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꽃들이 피는 봄과는 상관없이, 배롱나무는 오직 자신만의 시간에 꽃을 피운다. 한 번에 흐드러지지 않고, 선명하고 강렬한 순간을 새기듯 퐁퐁 터지며, 여러 시간에 걸쳐 백 일 동안.
기억도 그렇다. 피어나고, 저물고, 나를 이루어간다.
단풍이 든 후 낙엽이 거름이 되듯, 저문 기억들은 배롱나무의 뿌리를 감싼다. 거름이 된 기억들은 나무를 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만든다. 시간이 흐르면, 다시, 또 자신만의 꽃을 피우기 위해.
운은 조심스럽게 꽃잎 하나를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다.
강이와 함께 이 배롱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순간을 떠올린다. 쏟아지는 햇빛 아래, 두 사람은 가지 사이로 뚝 떨어지는 꽃잎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 순간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음, 사라진다기보다는 점점 희미해지겠지, 빛에 바랜 사진처럼.”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면 좋겠어.”
강이 운의 손바닥 위에 그 꽃을 올려놓았다. 둘은 조용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운은 이제 그때 그의 표정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없다. 기억 속 대화는 남아 있지만, 목소리의 온기는 식은 지 오래다.
운은 배롱나무 앞에 오랫동안 서 있다.
기억을 붙잡으려 하지만, 떠올릴수록 흐릿해진 부분에 억지로 그림을 그려 넣는 기분이었다. 그때,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꽃잎들이 흐드러지게 춤을 추었다. 손에 쥐고 있던 작은 꽃잎도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간다.
“흐려질 뿐이야.
때가 오면, 다시 피어날 거야.
풀 냄새 가득한 초여름 바람이 불면, 또 꽃망울을 터뜨리게 될 거야.
매화가 움트고, 유채와 벚꽃이 저문 후에야 피우는 배롱나무처럼.”
배롱나무 아래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억을 되새긴다.
찬란하면서도 덧없는 날들.
바래져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