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20180222 기예르모 델 토로 作
최근 각종 포털에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리뷰들이 계속 눈에 띄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정보를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아서 자세히 읽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칭찬 일색이라는 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이 90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들리기도 했지요. (☞http://naver.me/FeUN2S4h)
아카데미 작품상 소식이 있기 며칠 전, 저는 이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서 제게는 물음표만 남았습니다. 제 소양이 부족한 탓인지, 제게는 너무나 불친절한 영화일 뿐이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여주인공 엘라이자와 괴생물체 간의 뜨거운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사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여러 영화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다못해 그 옛날옛적 디즈니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에도, 미녀와 야수가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나름의 개연성이 존재하는데 말이죠.
영화 속 괴생물체는 '사회적으로 숨겨야 할, 수치스러운' 존재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기괴한 비늘로 덮여있는 괴생물체의 외모도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이자가 그 괴생물체와 사랑에 빠지게 된 이유를 저는 도무지 영화 속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영화의 앞부분에는 엘라이자의 외로움이 드러납니다. 엘라이자는 사회적으로 소외받는 장애인입니다. 아마도 감독의 의도는, 소외당하고 외로운 엘라이자가 우연히 괴생물체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겠지요?
영화 초반 외로운 엘라이자의 모습을 보며 저는 혼자서 추측했습니다. 소외받는 여주인공에게 괴생물체가 편견없이 대해주면서 사랑이 싹트는 계기가 되겠구나!
그런데 그런 사건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주인공은 처음 본 괴생물체와 처음 본 순간부터 갑자기 사랑에 빠지더니, 금지구역에 몰래 들어가 계란을 나누어 먹습니다. MP3는 커녕 워크맨도 없던 1960년대에 커다란 레코드 재생기를 바리바리 싸들고와서 그와 함께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거부감이 드는 존재'와의 사랑이니 굳이 굳이 설명을 내놓으라는 떼를 쓰는 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인간들의 흔한 로맨스에도 최소한 관객들에게 감정이입을 할 '구실' 정도는 주지 않는가,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영화를 다 보고나서,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의 평론을 읽었습니다. (☞http://magazine2.movie.daum.net/movie/48217) 물이 가지는 상징적 의미, 초록색과 빨간색의 의도적 배치, 주류와 비주류의 뚜렷한 대비. 구구절절 너무 그럴듯해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그러나 제 찝찝함이 전부 해소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동진의 해설을 읽고 나니 더욱더 확신이 들 뿐이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와 스토리를 위한 영화라기보다는, 특정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감독이 장면장면을 '설치'한 작품같다는 생각.
비유하자면, 어떤 책이 대중소설인 줄 알고 읽었는데 난데없이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의 파격적인 산문시가 등장했을 때의 당혹감이랄까요.
저의 이 모든 불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결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결말을 보고 나서 제 불만은 절반으로 줄어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영화 전반에 걸쳐서 느껴지는 물의 에로틱한 이미지는 그 자체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서사적인 면에서 아쉬움이 많은 영화로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