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행방》 20180131 히가시노 게이고 作
소설 《연애의 행방》 은 평범한 로맨스를 놀라운 서스펜스로 풀어내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능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관련이 없어보이던 등장인물들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인연이 얽히고 설키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저는 원래도 소설의 등장인물들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연애의 행방》 모두 두 번 읽어야 했습니다. 처음 읽으면서 반전과 스릴을 즐기고, 두 번째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정리해 그려보는 것이지요.
8명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익살스럽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선,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 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여름 밤의 꿈》 의 스키장 버전이랄까요.
소설 《연애의 행방》의 가장 큰 매력은, 굉장히 영화적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를 텍스트로 옮긴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감정이 '당황한 표정'이라던가 '어딘가 어색한 손동작'처럼 시각적이고 영화적인 디테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래 장면은 소설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아주 초반의 장면이라 스포일러가 아니라고 판단되어 그대로 올립니다. 혹시라도 소설 내용을 미리 읽고 싶지 않으신 분은 뒤로가기를 눌러 주세요 :)
그런 생각을 해가며 고타는 새삼 4인조를 슬쩍슬쩍 훔쳐보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미유키의 시선이 지그시 고타의 얼굴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저절로 등을 꼿꼿이 세웠더니 그제야 미유키는 시선을 돌렸다.
(중략)
고타는 바짝 긴장했다. 혹시 내 정체를 알아본 것인가.
자신의 옷을 확인해보았다. 재킷도 바지도 새것이고 작년까지 입었던 옷과는 색깔이 전혀 다르다. 노란 비니모다 역시 미유키는 본 적이 없을 터였다. 고글은 거울렌즈라서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은 페이스마스크도 쓰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알아봤을 리가 없다. 고타는 체격도 평균적이다. 곤돌라에 탄 이후로 한 마디도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 목소리를 들었을 리도 없다.
- 《연애의 행방》 p.31
'고타'와 '미유키'는 결혼을 약속한 연인입니다. '고타'는 '미유키' 몰래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고 있지요. 그리고 '미유키' 몰래 바람 상대녀와 스키장에 놀러옵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스키장 곤돌라에 합승하게 된 일행 중에 약혼녀인 '미유키'가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다행히 '고타'는 스키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모두 가리고 있었지만, 혹시나 '미유키'가 자신을 알아볼까 전전긍긍합니다.
그 장면을 히가시노 게이고는 위와 같이 영화적으로, 보는 사람까지 심장이 쫄깃쫄깃해지게 표현합니다.
《연애의 행방》은 일단 첫 장을 읽기 시작하면, 다음 장이 궁금해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하지만 '깊은 맛'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들에 비해 다소 덜 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작 《용의자 X의 헌신》 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반전이 있었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에는 인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하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애의 행방》 은 전작들에 비해 다소 심심한 맛입니다. 20~30% 가량을 읽다보면, 정확히 '어떻게'는 모르겠지만 이 등장인물들이 서로 절묘하게 엮이겠구나, 하는 짐작이 되기 시작하거든요. 그 사실을 예상하고서 읽다보면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관되는 사건들이 약간은 억지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8명의 젊은이들이 쉼없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추파를 던지고 바람을 피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결혼을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의 (적어도 저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고요.
하여간,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스노보드와 스키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또는 가벼운 소설로 일상의 잡념을 떨쳐버리고 싶은 분들이라면 읽어볼 만 합니다.
《연애의 행방》은 《눈보라 체이스》에 이어 이른바 '설산(雪山)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동계스포츠를 애호하고, 특히 스노보드를 즐기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p.305
"아무튼 도시 사람들을 스키장에 데려가고 싶었어요. 스키장은 결코 멀지 않다, 도쿄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설산까지 자동차로도 신칸센으로도 갈 수 있어요. 《연애의 행방》의 등장인물들은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도 했죠. 그런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널리 알리려는 마음에서 실은 그 부분의 문장을 은밀히 강조했습니다. p. 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