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eautiPo May 21. 2017

[Book]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20140730 존 버거 作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는 런던 출생의 작가 존 버거와 그의 아들 이브 버거가 함께 쓴 책입니다. 사십년간 함께한 존 버거의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만든 책이지요.


책은 크고 얇아서, 손으로 들었을 때는 마치 아이들 그림책 같은 느낌이 듭니다. 책 안을 펼쳐보아도 그림이 반, 글씨가 반 입니다. 그냥 읽어내려가면 5분 정도면 후루룩 넘길 수 있는 분량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렇게 읽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느리고 무겁고 슬프고 아름다운 책입니다. 노년의 아버지와 중년의 아들이 조용하게 마주 앉아 각자의 그리움을 조용히 읊조리는 듯한 책입니다. 한 자 한 자 눈길이 무겁게 옮겨갑니다.


이미 당신의 감긴 눈에 마지막 입맞춤을 한 다음이었지만
내가 글을 쓰는 탁자 위에, 당신의 안경에 끼울 렌즈 두 개가 든 봉투가 놓여 있소. (중략) 그럴 때면 당신은 안경의 아래쪽 절반, 그러니까 원시를 교정해 주는 부분이 조금 닳은 것을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지. 새로 맞춰야겠는데! 그래서 내가 옛날 처방전을 가지고 새 렌즈를 주문했지. 열흘이 걸린다고 하더군.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그 자리에서 전액을 지불하기로 했는데, 그건 일종의 서약이었을 테지. 렌즈를 찾으러 갔을 땐 이미 당신의 감긴 눈에 마지막 입맞춤을 한 다음이었지만.

-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p.16


엄마가 점점 더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아빠가 엄마 이마와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던 게 기억나요. 그래, 그래 여보, 그래... 라고 말씀하셨죠. 천천히, 천천히, 거의 속삭이듯이, 아빠 목소리는 거의 침묵에 가까웠어요. 아빠는 그 말을 몇 번이나 했을까요, 엄마?

-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p.34



작가 존 버거 (https://www.versobooks.com/books/2239-landscapes)



출판사의 서평에 따르면, 존 버거의 아내 베벌리는 2013년 별세했고 이 책은 그로부터 1년 후, 그녀의 일주기를 맞아 출판되었다고 합니다. 사십년을 함께한 아내를 잃은 여든 여덟 노인의 목소리는, 통곡의 울음이라기 보다는 묵묵한 쓸쓸함에 가깝습니다. 그의 아내가 아름다운 삶을 살았고, 마지막까지 그녀다움을 잃지 않으며 아름답게 떠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존 버거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아름다웠던 아내의 삶에 대한 추모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은 당신의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지
침대에 누운 당신이 온 몸을 꿰뚫는 것 같은 고통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할 때, 고통을 가라앉히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르핀이나 코르티손 주사를 한 대 더 놓아주거나 몸을 받치는 베개들을 다시 맞춰 주는 일밖에 없었을 때, 식사를 위해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 빨대로 뭘 마실 수만 있었을 때, 겨우 찻숟가락 - 당신이 좋아하던 손잡이가 달린 그 숟가락 - 으로 음식을 조금만 먹을 수 있었을 때, 하루에 여섯 번씩 당신의 몸을 씻겨 줘야 했을 때, 기저귀로 대소변을 받아야 했을 때, 욕창을 막기 위해 발뒤꿈치와 팔꿈치를 닦아 줘야 했을 때, 당신은 비할 데 없이 아름다웠소. 그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은 당신의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었지.

-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p.23



애써 참고 있는 고통에 완전히 둘러싸인 상태에서 맞이하는, 그런 즐거움의 순간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이 산딸기들은 크고, 팔월의 태양 때문인지 초기에 땄던 것들보다 훨씬 달더군. 당신이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할 때 내가 한 알씩 먹여 주었던 그것들보다 말이오. 그래도 당신은 그때 그것들이 더 입에 맞다고 했지. 입을 오물거리며 기분이 좋은지 장난스럽게 웃었는데.

애써 참고 있는 고통에 완전히 둘러싸인 상태에서 맞이하는, 그런 즐거움의 순간은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나는 모르겠소. 어쩌면 가늠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지.

-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p.26


이 책을 보고 있으면, 베벌리의 마지막 순간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아름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고 감히 소망하자면, 언제가 될 지 알 수 없는 저의 마지막도 그와 같기를 바랍니다.




존 버거와 이브 버거의 글은 단지 아내와 어머니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아주 많은 질문과 답이 동시에 저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이 책에는 삶과 죽음, 사랑한다는 것, 인간의 유한한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것, 그런 것들에 대한 단상이 군데 군데에 묻어나 있습니다.


죽음은 무언가를 또 하나 심는 것에 불과함을 알려 줄 테니
(...) 그리고 당신이 내게 말했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죽으면,
판에 박힌 말과 죽은 날짜 같은 것으로 나를 가두지 말고,
내가 잠든 곳의 흙을 한 줌 떠 주세요.
그럼 아마도 한 줄기 풀잎이 당신에게
죽음은 무언가를 또 하나 심는 것에 불과함을 알려 줄 테니 (...)

-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 p.12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글귀 中)




저는 얼마 전,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한 북카페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고, 존 버거라는 세계적인 작가를 모른 채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읽고 나서 찾아보니 공교롭게도 올해 초, 존 버거 역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훌륭한 작가를 너무 늦게 알게 된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아내의 빈 방_죽음 후에>를 시작으로,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Book]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혹하고 매혹당하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