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직업인 만큼, 여러 부류의 사람들, 매우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가진 이들을
만났고, 만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만날 것이다.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그들이 마음 한편에 빼곡히 쌓아놓았던
이야기들을 만나는 것이다.
때로는, 즐겁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듣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상처, 절망, 고난, 슬픔, 아픔이
스며있고 녹아있는 쉽사리 풀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버지니아의 작은 한인신학교에서
3년 동안 기독교상담학을 가르쳤다.
그곳에서 정말 너무나 다양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며, 울고 웃고 했다.
그들 중에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직업을 가진 남편을 둔,
이른바 '기러기 엄마'들도 많았다.
반면에, 그 반대의 사람들도 만났다.
도저히 자신에게 희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고 믿는 이들.
남편은 병들었고 아이들은 교육시켜야 하고
하루에 14시간 일하다가 비자 때문에 공부하러 온다는 학생이 기억난다.
갓 결혼해서 미국으로 공부하러 왔지만,
틀어진 아내와의 관계로 인해서 가정이 깨어져
이젠 사람을 믿을 수 없을 것 같다고
분노와 체념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30대 청년도 떠오른다.
20대와 30대 여기저기 이것저것 방황하다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해 시간을 보내는 자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전기설비사로 인정받으며 살다가
미국으로 건너와 한인교회 관리집사로 일하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며 학교로 오는 이의 이야기도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삶의 고단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한국도 안전지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 우리네 인생이 어디 눈물 한 바구니 담을 수 있는
사연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자신의 손을 떠났다고 믿는 사람들.
이젠 나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삶을 포기하려는 사람들.
성경에 나오는 갈대상자 안의 아기와도 같다.
아기는 캄캄한 갈대상자 안에서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배고파서 울고, 무서워서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자기의 울음소리를 들어주지 않아 또 울었을 것이다.
두려움, 슬픔, 답답함, 안타까움, 애끓음. 대소변을 갈지도 못하는 상황.
그야말로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마찬가지인 처지. 그를 누가 살려줄 수 있을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빗소리가 거세게 창문을 때리고 있다.
아마도, 하루 이틀 정도 더 강한 비가 내릴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분다.
그러나, 이제 곧 뜨거운 한여름의 열기가 전국을
태울 것이다.
숨이 턱턱 막혀 오며,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여름.
도저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흐르는 땀과 올라오는 불쾌지수.
연일 계속되는 35도를 웃도는 찜통더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탈출을 시도한다.
휴가를 떠나, 한 여름의 살을 태우는 듯한 폭염을 피하지만
우리는 다시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폭염을 피해 휴가를 떠나지만, 다시 돌아오면 또다시 무더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무더위는 도망간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때가 되면 스스로 물러간다.
그리고 서늘한 가을이 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그렇지 못하다.
나의 지나간 인생 속에서,
내가 만났던 많은 이들의 고난과 눈물의 이야기 속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더위는 피해 잠시 시원한 곳으로 떠날 수 있지만,
우리들의 삶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무더운 여름은 시간이 지나면 가을에게 자리를 내어주지만,
절망은 저절로 희망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절망이 없는 희망은 그 자체로서는 큰 의미가 없다.
절망을 마주하며, 매일 아침, 다시 살아가려는 용기를 내는 자에게
희망은 참으로 목마른 자의 생수처럼 다가온다.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것을 '존재의 용기' 혹은
'존재가 되려는 용기'라고 부른다.